재즈가 태동된 것은 기껏해야 100년 하고도 몇십년 정도지만, 그 파급력은 그보다도 더 오랜 전통의 음악과 대등하거나 혹은 능가하고도 남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된 데는 물론 초기 재즈가 음반 녹음 기술의 발달과 맞물려 대세를 잘 탄 것에 기인하고 있는데, 다만 초기 SP 시절에는 수록 시간의 한계 때문에 대다수의 곡들이 기껏해야 3분~4분 반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듀크 엘링턴 같은 이들이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10여 분에 달하는 대곡을 종종 쓰기 시작했고, 2차대전 종전 후 독일로부터 징발해온 테이프 레코더 '마그네토폰' 의 개량이 이뤄지면서 테이프가 녹음에 도입되자 이런 시도는 더 자주 있었다.
테이프 시대의 재즈는 대체로 한두 사람의 솔로 역량에 맞춰가는 단촐한 것에서 벗어나 리더를 중심으로, 혹은 리더도 없이 여러 명의 솔로가 코러스나 리프와 함께 번갈아가며 선보여질 수 있었다. 빅밴드 시대의 방만한 편성에서 훨씬 감량된 소규모 밴드나 트리오, 쿼텟, 퀸텟 등은 특히 이러한 연주를 거의 그대로 담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 더없이 큰 행운을 얻은 셈이었고.
하지만 테이프는 물론이고, 1980년대에 선보여진 CD조차도 한 장에 담을 수 없는 대작을 작곡한 이들도 더러 있었다. 그 중에는 엘링턴 식의 '재즈 작곡' 을 비밥과 쿨, 모던 재즈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거쳐가며 나름대로 발전시킨 베이시스트 찰스 밍거스(Charles Mingus, 1922-1979)를 빼놓을 수 없다.
밍거스가 단순히 유능한 재즈 베이시스트에서 작곡가로 유명해지게 된 계기는 1953년에 조직한 '재즈 작곡가 워크샵' 이었다. 여기서 밍거스는 종래의 '즉흥 위주' 재즈를 면밀히 분석하고 엄격한 악보로 만드는 시도를 했지만, 2년도 채 가지 않아 한계를 느끼고 중단했다. 그 대신 밍거스는 동료나 후배 재즈 뮤지션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연주의 흐름이나 방식을 악기 연주나 노래로 미리 들려주고 거기에 맞추어 따라오도록 하는 식의 방법을 생각해냈다.
물론 모든 뮤지션이 밍거스의 방식에 동조한 것은 아니었고, 특히 '스타 플레이어' 들의 경우에는 의견 충돌이 잦아져 싸움으로까지 연결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밍거스의 이런 '성깔' 은 음악 영역 뿐 아니라 1950~60년대에 미국 사회를 뒤흔든 흑인 인권운동과 맞물려 꽤 극단적으로 나타나기도 했으며, 유명 인종차별주의자를 대놓고 비꼬는 곡이라던가 흑인의 '우월함' 을 나타내는 곡을 음반으로 만들어 내놓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밍거스가 작곡과 연주에서 최전성기를 이뤘다는 1960년대에 특히 이러한 '주의주장을 담아낸 곡' 들과 함께 엘링턴 식의 대작을 벤치마킹한 곡들이 나왔는데, 그 중 가장 규모가 큰 작품이 '묘비명(Epitaph)' 이라는 타이틀로 만들어진 두 시간짜리 대곡이었다.
이 곡은 1962년에 블루 노트에서 발매된 '타운 홀 콘서트' 라는 음반에 짤막한 두 개 트랙으로 같이 수록된 것이 처음 공개된 음원인데, 청중들이나 청취자는 물론이고 세션과 공연에 참가한 연주자들마저도 밍거스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저 음반은 별 호응이 없이 묻혀졌고, 밍거스 자신도 매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후 저 대작은 연주되지 못했고, 밍거스가 1979년에 지병이었던 다발성 경화증 악화로 타계하면서 거의 잊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재즈 음악학자였던 앤드류 홈지(Andrew Homzy)가 밍거스의 미망인이었던 수 밍거스(Sue Mingus)의 요청으로 유품인 악보 더미들을 분류하다가 곡의 악보들을 대량으로 찾아냈고, 1989년에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복원하는데 성공했다.
그렇게 해서 밍거스가 살아 생전에는 그냥 '맛배기' 수준으로 선보여졌던 저 '묘비명' 이 같은 해 6월 3일에 뉴욕의 앨리스 털리 홀에서 '전곡 초연' 되었다. 일반적인 빅 밴드보다도 더 큰 편성을 요했기 때문에, 사실상 더블 빅 밴드 체제로 특별 편성된 재즈 오케스트라가 동원되었다. 멤버들의 섭외와 총지휘는 재즈와 클래식 양 편에서 정통한 원로 작곡가 군터 슐러(Gunther Schuller)가 맡았다.
ⓟ 1990 Sony Music Entertainment Inc.
밍거스 사후 1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였기도 했기 때문에, 이 초연은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CBS(이후 소니)에서 더블 앨범으로도 발매되었다(위 짤방). 워낙 규모가 크고 난해한 구성의 곡이다 보니 초연에 참가했던 트럼페터 윈튼 마살리스조차도 '트럼펫 연습곡 중 고난도의 패시지를 모아놓은 것 같다' 라고 술회했고, 1989년의 초연과 순회 공연 이후 이 대작을 연주할 엄두를 내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밍거스 탄생 85주년이었던 작년(2007년)에 가서야 두 번째 순회 공연이 이뤄졌는데, 단순한 리바이벌 콘서트가 아니라 1989년 초연 이후 뉴욕 퍼블릭 라이브러리와 링컨 센터 자료실에서 밍거스 유고를 정리하던 중 새로 발견한 엘링턴 스타일의 곡을 추가로 삽입한 일종의 '개정판' 공연이었다. 이 공연도 초연 때와 마찬가지로 군터 슐러가 섭외해 편성한 31명의 뮤지션들로 구성한 악단이 연주에 참가했다. 편성을 적어보면;
이 '대군단' 들은 4월 25일에 뉴욕을 시작으로 클리블랜드(27일), 로스앤젤레스(5월 16일)와 시카고(5월 18일)에서 공연했으며, 1년 뒤인 올해(2008년)에 할 레너드 출판사에서 홈지, 슐러와 수 밍거스의 상세한 분석과 해설을 포함한 완전판 총보가 출판되었다.
하지만 2007년 투어는 아직 CD나 DVD로는 출반되어 있지 않은데, 대신 미국 내 최대 공영방송사 중 하나인 내셔널 퍼블릭 라디오(NPR)에서 로스앤젤레스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 공연의 실황을 녹음한 것이 1부와 2부로 나뉘어진 무삭제 스트리밍 서비스로 제공되고 있다. (클릭)
방송을 들어보니 처음에는 청중들이 한동안 곡의 길이와 방대함에 좀 주눅들어 있는 듯한 모습이었는데, 30여 분을 연주하고 나서 슐러가 곡에 인용된 기존 선율-특히 두드러지는 것이 드보르자크의 '유모레스크' 와 콜맨 호킨스나 듀크 엘링턴의 파퓰러 넘버들임-이나 앞으로 곡의 방향이 어떻게 될 지를 상세히 설명한 뒤에는 솔로 연주가 끝나고 코러스나 리프가 이어질 때 박수를 보내는 등 일반적인 '재즈 콘서트' 의 매너를 점차 회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1989년 뿐 아니라 2007년의 개정판에서도 복구되지 못한 부분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데, 곡의 대미를 장식하는 피날레였다. 이 부분은 밍거스가 남긴 메모 등을 바탕으로 (마치 모차르트 레퀴엠의 쥐스마이어 완성본처럼) 곡의 서두에 제시된 메인 코러스들을 즉흥으로 변주하면서 끝맺도록 하고 있다. 또 특별히 어떤 주장을 담은 격한 나레이션과 노래가 선보여지기도 하는데, 아마 작곡 당시의 흑인 인권 운동에 대한 일종의 격문으로 여겨진다.
워낙 긴 곡인 만큼 '길다' 는 생각을 하면 할 수록 듣는데 지장이 많은데, 차라리 (물론 밍거스 자신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10분 가량의 재즈 넘버들을 연속으로 듣는다고 생각하면 듣기에 좀 홀가분하다. 그리고 곡의 골격은 여전히 즉흥 연주를 꽤 중시하는 재즈 전통에도 상당 부분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솔로의 역량을 즐기는 일반적 감상법도 적용할 수 있다.
솔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악기들은 재즈에서 레귤러인 색소폰족이나 트럼펫, 트롬본, 베이스, 피아노 등이지만, 2부에서는 잠깐이나마 바순이 꽤 화려한 솔로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저 라인업에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아마 색소폰 주자들 중 몇 사람이 겸했을 플루트와 오보에, 코랑글레(잉글리시 호른)같이 재즈에서 듣기 흔치 않은 목관악기들의 소리가 가끔 나오는 것을 듣는 재미도 있고.
물론 마지막의 피날레가 미완성이라는 점 때문에 '밍거스의 원래 의도를 100% 반영한 복원이냐' 는 질문은 계속되겠지만, 밍거스 자신도 "이게 내 묘석 이름이야!" 라고 했을 정도의 역작이 복원되었다는 사실 만으로도 재즈 역사상 중요한 이벤트이자 증거물로 남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정규 음반 출반 좀 굽신굽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