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에 있는 식당은 레스토랑이건 뷔페건 가볼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설령 간다고 해도 누군가가 '쏜다길래' 엉겨붙던가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제대로 된 유명 호텔의 뷔페라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지를 눈으로던 입으로던 위장으로던 확인한 기회이기도 했고.
초대자인 령 님은 연말이라 예약하기도 쉽지 않았다고 했는데, 아예 어디로 갈 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집을 나선 터라 궁금하기도 했다. 호텔 로비로 들어가서부터는 '이거 너무 고급스러운걸 대접받아도 되려나' 는 소시민스러운 불안감을 느끼기도 했고. 아무튼 테이블에 앉고 부터는 없던 식욕도 자연스레 발동했다.
우선은 샐러드부터. 새우와 잘게 찢은 닭고기, 새싹 채소, 페타 치즈, 올리브 절임 등을 조금씩 담아서 시저 드레싱을 뿌리고 먹었다. 큰 그린 올리브에서 씨가 나올 줄은 몰랐는데, 잘못했다간 이빨 나갈 뻔했다. 아무튼 올리브 빼면 대만족.
그 다음부터는 드디어 본격적인 '무규칙 섭렵시간'. 칠리새우와 오리알, 케이퍼 얹은 훈제 연어, 인도식 야채볶음밥, 문어 세비체, 칠면조 가슴살구이, 호주산 등심스테이크, 양갈비구이, 탄두리치킨 등. 고기님 영접에 환장한 십덕의 전형적인 식탐을 보여주는 접시다. 접시 위에 있는 것도 다름 아닌 전복죽.
다음 접시. 음식 집는게 점점 규칙을 떠나 개념이 없어져가는 것 같기도 했다. 네 종류의 샤오마이와 깐풍기, 칠리새우, 또 등심, LA갈비, 유산슬, 마르게리타 피자. 샤오마이 중에는 새우가 통째로 들어간 것도 있었고 상어지느러미가 들어간 것도 있었다. 저 때 내 표정을 누군가 찍었다면 참 볼만했을 텐데.
세 번째 접시. 가장 개념없이 담았는데, 우선 새우초밥과 게살초밥, 가리비초밥, 정체모를 생선의 초밥 등 네 종류를 담았다가 빵과 치즈가 수북히 쌓인 코너를 지나칠 수 없었다. 그래서 곡물 박힌 빵 두 종류와 살구절임, 치즈 네 종류를 추가로 담았고. 이것도 마찬가지로 황홀했지만, 치즈가 생각했던 것 보다는 좀 맛이 아햏햏했다. 치즈 중에 가장 맛있었던건 과일이 촘촘이 박힌 약간 시큼하면서도 달달한 크림치즈였고.
사실 뷔페 가면 주요리보다는 디저트 뽕빨로 악명높은게 내 식습관인데, 당뇨병이 유전되는 가계에서 참 한심하기 그지 없는 악습인 셈이다. 어쨌든 디저트 코너도 나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았는데, 조금씩 먹는데 힘이 들기 시작했지만 근성을 발휘했다.
일단 치즈케이크와 초코브라우니, 호두파이, 네 종류의 쿠키를 덜고, 다시 빵 코너로 가서 자두절임과 살구절임, 과일 박힌 크림치즈조각을 덜어왔다. 물론 이번에는 주요리들의 유혹에 먼저 넘어가긴 했지만, 디저트 코너를 먼저 발견했다면 여기서 몇 접시는 더 먹었을 것 같았고.
그리고 마지막. 자그마한 초콜릿들과 요거트 아이스크림인데, 아이스크림 코너에서는 토핑을 셀프로 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달디단 시럽이나 소스와 견과류 등을 준비하고 있었다. 탐이 나긴 했지만 일단 호두 한 조각과 아몬드 한 숟갈 정도로 토핑했다. 초콜릿들은 가나슈부터 시럽에 절인 호두나 땅콩, 아몬드, 화이트 초콜릿 등이 든 것까지 꽤 다양했고.
커피를 마지막으로 처절하기까지 했던 만찬이 마무리되었는데, 먹고도 바로 일어날 수가 없어서 뷔페 식사 제공이 종료된 7시 30분 이후에도 가만히 앉아서 담소를 나누다가 자리를 떠야 했다. 아무튼 내 식욕을 이렇게까지 끌어올린 외식은 지금까지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는데, 평생동안 먹지도 못할 것 같았던 호사스러운 것들이 입에 들어가는 재미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호텔을 나와서는 추가로 문화상품권 3만원어치까지 받는 호사를 누렸는데, 여름방학 때 지휘하고 받은 답례 치고는 너무 고급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물론 내년에는 아마 만복감보다 더 격심한 사회상을 맞이할 지도 모르겠지만, 접시에 담고 입에 우겨넣던 순간 만큼은 잊을 수 없는 행복한 기억이 될 것 같고.
*다시 한 번 이 비천한 안여돼 십덕 소햏에게 만찬 먹여주시고 선물 주신 령 님께 감사드립니다. 굽신굽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