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잡설

겨울나그네 (테너판 최초 전곡 녹음)

머나먼정글 2007. 10. 22. 19:43
슈베르트(Franz Schubert, 1797-1828)의 3대 가곡집 중 가장 길면서도 깊은 절망감과 좌절감을 가득 담아내고 있는 것이 바로 '겨울나그네(Winterreise)' 인데, 사실 독일어 원제를 그대로 직역하면 '겨울여행' 이 되지만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오역이 더 시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인지 계속 통용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간간히 '보리수' 나 '봄의 꿈' 같은 좀 가볍고 비교적 긍정적인 감정을 노래하고 있는 곡들도 있지만, 곡집 전체의 정서가 어둡고 무겁기 때문인지 대개 바리톤 독창으로 많이 불려지고 있다. 흔히 '명반' 으로 인정받는 앨범들도 마찬가지로 게르하르트 휘슈(EMI), 한스 호터(EMI),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DG) 등 바리톤 가수들의 녹음이 많고.

하지만 워낙 인기있는 가곡집이다 보니 바리톤 외에도 베이스, 테너, 알토, 심지어 소프라노도 부를 때가 종종 있는데, 바리톤 다음으로는 테너들이 많이 부르는 것 같다. 다만 바리톤에 비해 테너판으로 이뤄진 녹음은 좀 늦게 나온 편인데, 시기가 꽤 드라마틱했다.

얼마전 교보 핫트랙스에 갔다가 '미하엘 라우흐아이젠(Michael Raucheisen)' 이라는 이름이 찍힌 꽤나 장수가 많은 CD 전집이 성악 쪽 진열장 위에 놓여있는 것을 보게 됐다. 확인해 보니 라우흐아이젠이 반주자로 남긴 녹음 거의 전부를 모아놓은 대전집이라고 했는데, 가격이 그만한 대전집 치고는 너무 싼 편이었지만 워낙 장수도 많고 해서 사지는 않았다.

라우흐아이젠은 1889년에 바이에른의 소도시 라인 암 레흐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유리직공이었지만 교회에서 오르가니스트와 합창 지휘자로도 활동한 열성적인 아마추어 음악가이기도 했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자연스레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고, 결국 아들이 음악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자 가족 모두가 아들을 뒷받침해주기 위해 바이에른 주도인 뮌헨으로 이사할 정도였다.

물론 라우흐아이젠이 주로 배운 악기는 피아노였지만, 바이올린 실력도 뛰어났는지 뮌헨 선제후 극장 관현악단의 바이올린 주자로 잠시 일하기도 했고 교회 오르가니스트로 부업을 뛰기도 했다. 1920년대부터 반주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유명 성악가들의 리사이틀에서 반주자를 거의 도맡다시피 했다.

그래서 라우흐아이젠은 자신보다 10년 후배인 제럴드 무어와 함께 반주자라는 직업의 가치와 중요성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데, 그가 협연한 성악가들은 세기 힘들 정도로 많지만 대충 이름있는 이들만 꼽아도 프리다 라이더, 에르나 베르거, 마리아 이보귄,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 칼 에르브, 헬게 로스벤게, 페터 안더스, 율리우스 파착, 한스 호터 등 상당히 많다.

1933년에는 위에 열거한 성악가들 중 칼 에르브의 아내였다가 이혼한 마리아 이보귄과 결혼했는데, 이보귄은 슈바르츠코프의 스승이기도 해서 유명한 인물이다. 같은 해부터 '세계의 노래(Lied der Welt)' 라는 타이틀로 그 때까지 작곡되었던 모든 독일어 가곡을 녹음한다는 초대형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나치의 입김이 상당 부분 작용해 멘델스존과 말러 같은 '유태계' 작곡가들의 작품은 제외되었다. (대신 친나치 성향의 리하르트 트룽크 같은 '관제 작곡가' 들의 작품이 들어갔다.)

이 대규모 녹음 작업은 2차대전이 시작되어서도 계속 진행됐는데, 물자 부족으로 상업용 녹음 대신 방송용 테이프 녹음이 주가 되었다. 1940년에는 베를린 제국 방송의 성악과 실내악 부서 책임자로 임명되었고, 이후 종전 직전까지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수많은 녹음 세션을 진행했다.

라우흐아이젠이 나치 시기에 남긴 방송용 녹음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942~43년에 한스 호터와 녹음한 예의 '겨울나그네' 전곡인데, 겨우 30대 초반이었던 가수로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어둡고 무거운 정서를 듬뿍 담아낸 녹음으로 평가받으며 프라이저와 DG 등에서 계속 CD로 발매되고 있다.

라우흐아이젠은 호터와의 바리톤판 외에 최초의 테너판 전곡 녹음을 할 계획도 세우고 있었는데, 그 계획이 실행에 옮겨진 것은 전쟁이 이미 절망적인 패전 상황으로 확실히 가닥이 잡혀 있던 1945년 1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