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식민지 여럿 거느렸던 나라 치고 '중화주의' 에 빠지지 않은 나라가 별로 없을텐데, 영국도 마찬가지다. (아니, 유럽 제국들 중에 가장 심했으면 심했지.) 그런 점과 '입헌군주제' 를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 탓에, 호감이 가면서도 때로는 싫어지는 나라가 되고 있고. (상징적인 의미던 실질적인 의미건, 군주라는 직종은 개인적으로 '엿이나 먹으삼' 임)
그런 맥락에서 바라다 볼 수도 있는 앨범이 EMI에서 하나 나왔었는데, 제목부터 '뭔가 쓸데없이 거대하다' 는 느낌이 드는 '10000 Voices' 였다.
ⓟ 1992 EMI Records Ltd.
영국 하면 요전에 들렀다가 간 맨유나 첼시, 아스날 등등에서 보듯 축구가 꽤 인기가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물론 그 축구 말고도 흔히 이야기하는 '럭비' 도 동양권 국가에서는 생소한 종목이라서 그렇지 영국 현지에 가보면 축구 못지 않게 인기가 높다고들 한다.
그래서 자기네들 식민지였던 소위 '영연방' 국가들끼리 럭비 챔피언십도 매년 개최하고 있는데, 군대에서 X뺑이 치던 사이에 뉴질랜드 어학연수 갔다 왔던 근육질 동생 말을 들어보니 저 럭비 챔피언십 열리는 날이면 2002년 월드컵 때와 맞먹을 정도의 열기가 시내를 온통 휘감는다고 할 정도다.
1953년에 개최된 그 챔피언십에서 웨일즈랑 뉴질랜드 대표가 겨룬 날이 11월 22일이었는데, 그 당시에 뉴질랜드가 워낙 강팀이라서 웨일즈가 경기 내내 맥을 못추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경기 종료 10분 가량을 남겨 두고 웨일즈 응원석에서 갑자기 자신들의 국가-영국은 지방마다 준국가 격인 노래가 하나씩 있음. 웨일즈는 내 아버지의 땅(Hen wlad fy nhadau)-를 비롯한 전통 민요를 일제히 합창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던 것이었다.
그 노래에 '필 충만해졌는지' 결국 그 마지막 10분 동안 웨일즈가 거꾸로 뉴질랜드를 꺾는 이변을 연출했는데, 그 즉흥적인 합창에 착안해서 몇십년 뒤인 1990년에는 웨일즈 대 프랑스 럭비 경기의 개막식 행사를 위해 영국 각지의 아마추어 남성 합창단을 마구 끌어모아 대규모 임시 합창단 조직을 만들어서 공연하기도 했다.
이어 1992년 5월 23일에는 아예 10000명이라는 인원으로 카디프 암즈 파크(Cardiff Arms Park)의 내셔널 스타디움 한켠을 꽉 채우고 공연을 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오기에 이르렀다. 합창단의 이름은 'côr y byd', 영어로는 'The World Choir' 로 정해졌고. 그리고 저 엄청난 인원들을 반주할 악단으로는 웨일즈(Welsh), 북아일랜드(Irish), 스코틀랜드(Scottish)와 콜드스트림(Coldstream, 잉글랜드) 네 곳의 근위 연대(Guards Division) 소속 군악대들이 소집됐다.
물론 웨일즈에서 열린 공연인 만큼 웨일즈어로 된 노래가 여러 곡 들어 있었는데, 지금도 노래 제목 뜻이 파악이 안돼서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는 곡도 몇 곡 있다;
Lewis Harsough: Gwahoddiad
Emrys Jones: Morte Criste
Joseph Parry: Myfanwy (무반주)
Giacomo Puccini: Nessun dorma (from 'Turandot'. 데니스 오닐 독창)
(negro spiritual): Steal Away (무반주)
(welsh traditional): Bugeilio'r Gwenith Gwyn (올리버 사먼스 독창)
Albert Hay Malotte: The Lord's Prayer
Arwel Hughes: Tydi a roddaist
(welsh traditional): Welshman (군악대만 연주. 웨일즈 근위연대 군악대장 피터 해넘 중령 지휘)
Curly Pitman: The green, green grass of home (톰 존스 독창)
Richard Wagner: Roman War Song (from 'Rienzi')
Giuseppe Verdi: Speed Your Journey (from 'Nabucco')
Richard Wagner: Pilgrims' Chorus (from 'Tannhäuser')
(american traditional): Battle Hymn of the Republic (기네스 존스, 톰 존스, 데니스 오닐 독창)
James James: Hen wlad fy nhadau (기네스 존스, 톰 존스, 데니스 오닐, 올리버 사먼스 독창)
독창자들 중에 마지막 두 곡에 특별 출연한 기네스 존스(Gwyneth Jones)는 최근에 진은숙의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에 여왕 역으로 출연하기도 한 소프라노 가수로, 영국 출신 여성 성악가로는 드물게 바그너 작품에까지 손을 대서 바이로이트 등의 무대에서 호평을 받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데니스 오닐(Dennis O'Neill)은 한국에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영국 내에서는 꽤 인기있는 테너 가수라고 하는데, 여기서 부른 '공주는 잠못 이루고' 는 좀 이상하다. 어쨌든. 그리고 올리버 사먼스(Oliver Sammons)는 1991년에 전영국 어린이 합창 경연대회에서 남자 부문 콰이어보이(choirboy)에 선정됐던 보이 소프라노 가수였고.
그리고 톰 존스(Tom Jones)가 소위 '대중음악 가수' 로는 유일하게 독창자로 출연했는데, 기네스 존스와 마찬가지로 웨일즈 출신이란 점이 크게 작용한 것 같았다. 독창을 시작하자마자 환호성이 터질 정도였으니까. 총지휘는 'Welshman' 이라는 행진곡 빼고는 오와인 아르웰 휴즈(Owain Arwel Hughes)라는 웨일즈 출신 지휘자가 맡았고. (참고로 아홉 번째 곡인 'Tydi a roddaist' 의 작곡자인 아르웰 휴즈는 지휘자의 아버지임)
합창단은 이름만 보면 정말 세계 각국에서 골고루 몰려든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거의 대부분이 영국의 아마추어 합창단들이었다. 외국에서 온 단체는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우크라이나, 오스트레일리아, 이탈리아 각 하나씩 뿐이었고.
사실상 집안 잔치였는데도 'World' 라는 수식어를 쓴 것을 보면 소위 '자뻑 증세' 도 참 중증이다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래도 나름대로 대규모 합창 행사를 치뤄냈다는 자부심을 인정해 줘야 되는지 어쩐지.
원체 대규모에다가 야외 공연이라서 녹음하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군악대랑 독창자들은 가까이에서 마이크로 잡았다고 해도 전체적인 소리는 아마 공연 장소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녹음한 것 같다. 그래서인지 볼륨 자체는 공연의 규모에 비하면 좀 작은 편이고. 하지만 그 어마어마한 인원이 부르는 노래의 스케일은 확실히 다른 합창음악 음반과 비교하면 차이가 확연하다.
(↑ CD 속지 뒷면의 합창단 공연 장면. 참고로 '극히 일부' 만 찍혀 있음)
저 공연이 그 뒤로 얼마나 계속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CD 속지에 1993년 모집도 받는다고 광고를 실어놓은 것을 보면 그 다음해에도 계속된 모양이다. 다만 오래 가진 못한 것 같고. (하긴, 그 10000명 식비나 숙박비 등만 해도 대체 얼마였을까) 그리고 공연이 행해졌던 내셔널 스타디움은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는 대신 밀레니엄 스타디움이 들어서 있다.
결론: 영국 특유의 중화주의가 좀 고깝게 보이긴 하지만, 꽤나 드문 대규모 공연의 실황이니 나름대로 듣는 재미나 의미는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