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소개된 '중국음악' 이라고 하면, 대개는 홍콩이나 타이완 등의 대중음악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온라인이나 오프라인이나 마찬가지인데, 중국에서 연주되는 전통음악이라던가 클래식 계통 음악의 정보는 한국에서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그나마 알려진 작품으로 따지면 피아노 협주곡 '황하' 와 바이올린 협주곡 '나비 연인' 정도가 있다. 전자는 랑랑이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후자는 바네사 메이가 EMI에서 음반을 발표해 국제적으로 유명해졌다. ('황하' 의 경우에는 심지어 북한에서까지 CD가 나왔다.)
피아노 협주곡 '황하' 는 대개 작곡자를 표기하지 않거나, 혹은 중국 근대음악의 1세대 거물인 시안 싱하이(冼星海, 1905-1945)를 거론하곤 한다. 하지만 시안 싱하이는 단지 협주곡의 뼈대가 된 '황하 대합창(서양에서는 '황하 교성곡(Yellow River Cantata)' 이라고 번역됨)' 을 작곡했을 뿐이고, 협주곡은 시안이 죽은 뒤 20년도 더 지나 발표된 곡이다.
시안 싱하이는 1905년에 마카오의 가난한 어부 가정에서 태어났고, 아버지가 어릴 적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싱가포르로 이주해 열네 살 때까지 그 곳에서 자랐다. 이후 중국으로 돌아와 광저우, 베이징, 상하이 등지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배웠는데, 상하이에서는 1929년에 학생 시위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음악원에서 제적당하고 말았다.
결국 시안은 프랑스 유학을 결심했고, 파리 음악원에 입학해 뱅상 댕디와 폴 뒤카에게 작곡을 배웠다. 약 7년 간의 프랑스 체류 동안 시안은 경제난으로 사보가와 전화 교환수 등을 전전하면서 바이올린 협주곡과 소나타, 피아노 모음곡, 가곡 등을 작곡했고, 1935년에 다시 중국으로 귀국했다.
시안이 귀국한 시점은 이미 중국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던 때였다. 그는 곧 항일운동에 뛰어들었고, 네 곡의 대규모 합창 작품과 관현악곡, 기악곡, 300여 편의 가곡들을 비롯한 많은 작품들을 창작했다. 1940년에는 소련으로 건너가 기록 영화 '옌안과 팔로군' 의 음악 작업에 참가했는데, 1941년 독소전쟁이 터지자 신장 방면으로 귀국하려다 국경의 반공주의자들에게 쫓겨나고 말았다.
결국 시안은 카자흐스탄의 알마 아타로 옮겨갔고, 거기서 두 곡의 교향곡과 관현악 모음곡, '중국 광시곡' 등을 작곡했다. 하지만 너무 다망한 활동을 오랫동안 한 까닭에 건강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고, 결국 영양실조와 결핵에 시달리다가 모스크바의 크렘린 병원에서 41세의 나이로 객사하고 말았다.
사후 시안은 중국 정부에 의해 거의 영웅으로 떠받들어 졌으며, 현재 중국 국가이기도 한 '의용군 행진곡' 을 작곡한 녜 얼(聶耳), 인민해방군 공식 군가인 '팔로군 행진곡' 을 작곡한 정 뤼청(鄭律成)과 함께 '중국 3대 작곡가' 로 칭송받고 있다. (참고로 이 중 정 뤼청은 우리에게 '정률성' 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조선인 작곡가다.)
시안의 이름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 작품인 '황하 대합창' 은 1939년 봄에 완성된 작품인데, 가사는 당시 항일 문인으로 이름이 높았던 광 웨이란(光未然)의 연작시를 사용했다. 광 웨이란은 1938년 11월에 우한이 일본군에게 점령된 뒤 자신의 극단을 이끌고 옌안으로 도피하고 있었는데, 도중에 후커우 폭포에서 한 뱃사람이 부르는 노래를 듣게 되었다.
이 노래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광은 1939년 1월 옌안에 도착하자마자 이 연작시에 착수했고, 그 해 춘절 전야제에서 이 시를 낭송했다. 그 낭송회에는 시안도 청중으로 입회했는데, 그 역시 이 연작시에 감명을 받아 불과 6일 만에 은신처였던 동굴에서 이 곡을 완성했다.
이 곡의 작곡 과정에는 흥미있는 일화도 포함되어 있다. 시안이 단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된 광이 그 당시로서는 무척이나 귀했던 설탕을 1kg 가량 사들고 와서 시안에게 건넸고, 시안은 이 설탕을 간식으로 먹으면서 이 곡을 완성했다고 한다.
'황하 대합창' 은 1939년 4월 13일에 산시성 북부 공립 학교의 강당에서 우 시링의 지휘로 초연되었는데, 합창단은 겨우 40명에 불과했고 관현악은 더 보잘것 없는 소규모 실내악 편성이었다. (심지어 경유통과 세숫대야까지 악기로 등장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을 비롯한 청중들은 이 곡의 애국적인 메시지에 열광했고, 곧 중국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시안은 1940년에 소련에 갔을 때 이 곡을 정규 서양 관현악(+중국 전통 악기 포함)과 대규모 합창단 용으로 다시 편곡했고, 프롤로그를 덧붙여 아홉 개 악장으로 확대했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에는 그의 후배 작곡가들인 리 후안지와 양 량쿤이 차례로 개작했는데, 리는 시안의 1940년판에 기초해 새로 관현악 편곡한 개정판을 상하이에서 초연했다. 양은 리의 개정판을 더 손보면서 프롤로그를 1악장으로 통합시킨 8악장짜리 칸타타로 완성해 베이징에서 초연했다.
현재 연주되는 '황하 대합창' 은 최종판인 양 량쿤의 개정판에 의한 것인데, 각각의 표제는 다음과 같다;
1. 황하 뱃사공들의 노래 (黃河船夫曲)
2. 황하 송가 (黃河頌)
3. 하늘에서 내려오는 황하의 물 (黄河之水天上来)
4. 황하 물의 노래 (黃水謠)
5. 황하의 문답곡 (河邊對口曲)
6. 황하의 탄식 (혹은 분노. 黃河怨)
7. 황하를 지키자 (保衛黃河)
8. 크게 외쳐라, 황하여! (怒吼吧, 黃河!)
각 악장마다 낭창자의 나레이션이 첫머리에 붙어 있고, 2악장(바리톤)과 5악장(소프라노)에서는 독창자들만 노래한다. 4악장에서는 가벼운 테너 두 명 또는 남성 민요가수 두 명이 제목 그대로 문답창으로 노래하고, 마지막에 합창이 가세한다. 6악장은 윤창, 즉 합창의 돌림노래로 연주된다.
피아노 협주곡 '황하' 는 위에 쓴 대로 이 '황하 대합창' 을 모델로 만들어진 곡이다. 문화대혁명 중반기인 1969년부터 중국 정부가 국가적으로 진행한 계획이었는데, 피아니스트 인 쳉종을 비롯해 류 슈앙, 주 왕화, 솅 리홍, 수 페이싱, 시 수청 등 중국 중앙악단의 단원들이 이 이 곡의 작곡에 참여했다.
협주곡은 서양의 것과는 좀 다른 4악장제로 구성되었는데, 각각 '전주곡: 황하 뱃사공의 노래', '황하 송가', '황하의 분노' 와 '황하를 지키자' 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관현악은 2관 편성의 정규 서양 관현악으로 되어 있지만, 중국 전통 악기인 비파(1, 3, 4악장)와 디지(3악장 초반 솔로)가 같이 편성되어 있다. (몇몇 녹음들은 비파를 생략하고 디지의 솔로를 플루트 연주로 대체하고 있다.)
라흐마니노프와 중국 음악을 믹싱한 듯한 이 곡은 1970년 초연 때부터 저우언라이가 찬사를 보낸 작품으로도 유명한데, 그 때문인지 문화대혁명 후반기부터 간간히 찾아온 외국 음악인들과 악단도 이 작품을 종종 연주했다. 특히 필라델피아 관현악단은 유진 오먼디의 지휘로 이 곡을 RCA에 녹음했고, 빈 필을 이끌고 방중한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이 곡의 악보를 불과 몇 시간만에 외우고 지휘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협주곡판은 지금도 논란 거리를 만들고 있는데, 바로 4악장의 클라이맥스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느리고 장렬하게 울려퍼지는 선율은 '황하 대합창' 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둥펑홍(東方紅)' 이라는 산시성 북부의 민요인데, 리 유위안이라는 농부가 중국공산당과 마오쩌둥을 찬양하는 가사로 바꾸어 애창되고 있는 노래다.
아마 중국 정부가 강권으로 이 곡에 마오쩌둥의 존재를 부각시키려고 삽입시킨 것 같은데, 음악적으로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지만 그 '정치성' 을 떼놓을 수 없는 작품이 되어버려 골칫거리가 된 것이다. 특히 문화대혁명이 4인방의 체포와 덩샤오핑의 복귀로 끝나면서, 이 곡의 '문화대혁명 잔재' 는 껄끄러운 요소로 남게 되었다.
결국 이 곡은 문화대혁명 기간에 창작된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덩샤오핑 정부에 의해 금지곡이 되고 말았는데, 해외에서는 그 엄청난 선전 공세 때문인지 여전히 이 협주곡이 인기를 끌고 있었다. 1990년에 중국 중앙악단은 시 수청과 두 밍신을 기용해 이 곡의 '마오쩌둥 냄새' 를 제거한 새로운 개정판을 발표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여전히 국부로 칭송받는 존재였고, 문화대혁명의 수괴로 단죄된 이들은 4인방과 그 쫄따구(?)들이었기 때문에 '굳이 둥펑홍을 없앨 필요가 있었느냐' 는 지적도 나온 것이 사실이다. 그 때문인지 이 협주곡은 지금도 1970년대의 원전판으로 연주되는 경우가 많다.
'황하 대합창' 은 홍콩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낙소스의 산하 레이블 마르코 폴로(Marco Polo)와, 역시 홍콩이 본사인 후고 프로덕션(Hugo Productions)에서 CD가 나와 있다. 이 중 마르코 폴로의 CD를 작년 12월에 아주 우연히, 그리고 운좋게 코엑스몰의 애반레코드에서 입수할 수 있었다. (아마 낙소스 신보 더미에 잘못 섞여서 들어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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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폴로 음반은 차오 딩(曹丁)의 지휘로 양 샤오용(바리톤), 장 시밍(남성민요), 왕 징화(테너), 유 페이민(소프라노) 등의 독창자들과 상하이 필하모닉 합창단, 상하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것이다. 원래 가사가 중국어인 데다가 CD 속지에 영어 번역본마저 없는 것이 단점이지만, 연주 자체는 별로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하다. 다만 양 량쿤 개정판을 썼으면서도 3악장을 생략하고 연주한 것은 좀 의문이다. (속지에서도 생략과 관련된 언급이 하나도 없다.)
피아노 협주곡판은 위에 쓴 대로 상당히 많은 음반이 나와 있는데, 국내에서 가장 구하기 쉬운 것은 랑랑의 DG반과 인쳉종의 낙소스반일 것이다. 하지만 랑랑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고, 인쳉종은 관현악단이 너무 허약해서 비추다. 개인적으로는 지난 번 '나비 연인' 때 언급한 홍콩의 스테레오파일 CD가 그나마 가장 나은 것 같은데, 그마저도 4악장에서의 실수가 좀 거슬린다. (물론 원곡의 디지와 비파 연주를 들을 수 있다는 큰 메리트도 있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