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정치' 라는 관계는 소위 '순수예술인' 들에게는 거북스럽던가 귀찮은 개념이겠지만, 이것에 대해 제대로 고찰하지 않고는 음악이 가진 '그림자' 를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예전에 썼던 글에서도 지적했듯, 음악도 다른 예술들과 마찬가지로 충분히 정치에 이용당하거나 이용할 수 있는 장르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한국에서도 '순수' 라는 이름을 등에 업고 전혀 순수하지 않은 활동을 해 온 보수적인 예술인들의 공공연한 방해 공작 때문에 이 관계를 주로 탐구하는 '음악사회학' 영역도 이제 초보적인 단계를 막 벗어났을 뿐이고, 아직까지 연구할 과제는 많이 남아 있다.
같은 분단 국가였다는 처지 때문에 독일도 그 분야에 있어서 꽤 논쟁 거리가 풍부한 편인데, 특히 최근까지 '뜨거운 감자' 로 남아 있던 것이 바로 한스 아이슬러(Hanns Eisler, 1898-1962)의 생애와 음악이다.
쇤베르크에게 배우고 있던 초기의 몇 년간을 제외하고는 음악 활동 내내 사회주의자로서의 자신을 숨기지 않았고, 분단 후 동독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폐허로부터 부활' 이라는 제목의 동독 국가까지 작곡했다는 이유로 서독에서는 단단히 미운 털이 박혀 버려서, 공식적으로 해금이 이루어진 1970년까지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도 터부시될 정도였다.
그리고 서독에게 동독이 흡수 통일이 된 이후에는 '구닥다리 이념의 화신' 정도로 치부되는 경우가 허다한데, 다만 동베를린에 있던 음악대학이 '한스 아이슬러 음악대학' 으로 개명된 것에서 약간의 '복권' 이 이루어 졌을 뿐, 그의 음악은 여전히 본국에서도 연주 빈도가 그리 높지 않다. (그나마 최근에 좀 활발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반공을 국시로 삼고 있던 한국에서도 아이슬러의 음악은 오랫동안 금지곡이었는데, 80년대에 그의 음악들 중 '연대의 노래', '통일전선의 노래', '비밀스러운 행진' 같은 투쟁가요 계통의 작품들이 비밀리에 재야 인사들이나 운동권 학생들에게 보급되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 접한 아이슬러의 작품도 이 투쟁가요들이었는데, 독창 가수였던 에른스트 부슈의 선동적인 금속성 목소리가 소름끼칠 정도였다. 이들 곡은 실제로 한국어로도 번안되어 시위 현장에서 불려지기도 했고, 국내 민중가요들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아이슬러가 항상 이러한 '투쟁가요' 일변도의 창작을 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영화음악이나 무대음악에 있어서 상당히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렸는데, 전자의 경우에는 음악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와 공동 집필한 '영화를 위한 작곡' 이라는 최초의 영화음악 이론서까지 탄생시켰을 정도였다.
그리고 망명 시기에는 기악 분야에서도 꽤 많은 작품이 창작되었는데, 그것들 가운데에는 여섯 편의 관현악 모음곡이나 '다섯 개의 관현악곡', 실내 교향곡 같이 영화음악을 가지고 재구성한 것들도 꽤 많았다. 당시 영화음악을 '낮은 단계의 음악' 으로 치부하고 있던 미국에서는 매우 참신한 시도였다.
영화음악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1932년에 작곡된 '작은 교향곡(Kleine Sinfonie op.29)' 도 아이슬러의 독특한 창작 성향이 전면에 깔려 있는 작품이다. 아이슬러는 이 11분 정도의 4악장제 교향곡으로 '후기 낭만주의의 거대증과 신고전주의의 속물성' 을 엿먹임과 동시에 나치 치하의 독일에 대한 비판 의식을 깔아 놓았다.
이 곡은 1935년에 런던에서 에르네스트 앙세르메의 지휘로 초연되었고, 소련에도 소개되어 보수적인 작곡가였던 미야스코프스키 등에게까지 호평을 얻어냈다. 그 때문인지 이 곡은 뜸하게 연주되는 아이슬러의 관현악 작품 중에서도 그나마 연주 횟수가 많은 곡이 되었다.
아이슬러는 비록 쇤베르크의 소시민 기질과 순수예술 지향에 대한 못마땅함을 평생 간직하고 있었지만, 그에게 배운 12음 기법이라는 기술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망명 기간 동안 발견하게 되었다. 물론 쇤베르크 방식을 무작정 따라간 것은 아니고, 좀 더 협화적인 성향을 추구했다. 동시에 그가 써왔던 투쟁가요의 선동적인 양식과 재즈의 영향을 더했고, 상당히 간결한 형태로 다듬고 응축시켜 내놓았다.
이들 12음 기법과 투쟁가요, 재즈는 모두 나치가 경멸해 마지 않는 것들이었고 아이슬러는 이를 이용해 적들의 속을 단단히 긁으려고 작정한 것이었다. 이 '작은 교향곡' 에서도 아이슬러는 위의 3요소를 적절히 활용하고 있는데, '주제와 23개의 변주' 인 1악장에서부터 아이슬러식 12음 기법을 엿볼 수 있다.
2악장과 3악장은 모두 2분 남짓한 매우 짧은 단편들로 구성되었는데, 2악장에서는 투쟁가요 양식을 응용하면서 '얼빠진 극장 음악' 에 대한 풍자도 진행하고 있다. 가령 트롬본이 '해묵은 대중가요풍 멜로디' 를 불어제끼자 이내 베이스 드럼의 타격으로 단호히 가로막고 잽싸게 첫머리의 행진조 악구로 이동하는 것이 그렇다.
'인벤션' 이라고 되어 있는 3악장은 재즈에서 착상한 듯한 트럼펫과 트롬본의 와와 뮤트가 꽤 냉소적인 분위기를 풍기는데, 제목대로 바흐를 연상시키는 건조한 스트링과 야유조의 금관이 대비되면서 일종의 아이러니한 현실을 묘사하고 있다.
4악장에서도 아이슬러는 투쟁가요의 행진 리듬과 12음 기법을 끌어오면서 3악장의 냉소와 2악장의 풍자 등을 군데군데 배치해 전체적인 구조의 유기성을 고려했고, 끝까지 간결함을 잃지 않고 있다. 아이슬러는 소위 '순수음악' 의 대표 격으로 여겨져온 교향곡이라는 형식을 유지하되, 그 순수성이라는 이름으로 악용되어 온 과거의 유산을 척결하는 의미로 이 곡을 작곡한 것이다.
아이슬러의 작품이 그나마 제대로 된 재평가를 받게 된 것은 통일 후였다. 데카의 소위 '퇴폐음악' 시리즈에 그의 작품 중 가장 복잡난해한 것으로 평가되는 '독일 교향곡' 이 포함되었고, 바리톤 마티아스 괴르네와 피아니스트 에릭 슈나이더가 연주한 '헐리우드 노래집' 도 출반되었다.
하지만 아이슬러 작품을 가장 많이 내고 있는 음반사는 구 동독 소유였던 베를린 클래식스인데, 국내에는 제한된 품목 만이 극소량으로 수입되고 있어 구하기가 쉽지 않다. 카탈로그를 살펴 보면 관현악, 실내악, 성악곡, 합창곡, 독주곡 등 거의 모든 분야의 작품을 포괄하고 있고 아이슬러가 직접 지휘해 녹음한 히스토릭 계열 음원까지 갖추고 있어서 사실상의 '아이슬러 전집' 을 형성하고 있다.
이 '작은 교향곡' 은 독일의 클라시크 프로둑치온 오스나브뤽(Classic Produktion Osnabrück. 약칭 CPO)에서 발매된 아이슬러 관현악곡집으로 가지고 있는데, 이 음반 역시 구 동독 소재의 악단인 마그데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Magdeburgische Philharmonie)가 마티아스 후스만(Mathias Husmann)의 지휘로 1992년 10월에 녹음한 것이다.
ⓟ 1993 Classic Produktion Osnabrück
지명도가 별로 없는 악단과 지휘자의 연주지만, 내용은 꽤 충실하다. 아이슬러 음악의 공격성과 풍자, 냉소도 효과적으로 표현되고 있고, 살짝 건조한 듯한 녹음 성향도 플러스 요인이다. 이 '작은 교향곡' 외에 '관현악을 위한 세 개의 소품(1938)', '다섯 개의 관현악곡(1938)', 실내 교향곡(1943) 과 '희극을 위한 서곡(1948)' 이 같이 담겨 있다.
사회주의를 표방하던 국가들 대부분이 와해되고, 최근에는 중국까지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이념 자체의 생명력은 거의 없어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구상의 갈등 요인이 완전히 제거된 것도 아니며, 특히 강대국들의 '무조건 들이대고 보자' 는 식의 패권주의와 천민자본주의 같은 요소가 예술과 결탁해 대중들을 바보로 만들 위험성은 여전하다.
아이슬러의 음악이 그러한 현실에 대한 '효과적인 대안' 으로 제시되지는 못하더라도, 음악인들에게 있어서 현실 인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준다는 점에서, 그리고 대중과 소통하기 위한 예술인들의 자세에 대해 상당히 유용한 힌트를 준다는 점에서 더 활발한 재평가 움직임을 기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