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잡설

안익태의 '잃어버린' 시간에 대하여-'잃어버린 시간 1938~1944'

머나먼정글 2007. 3. 18. 15:32
네이버에서 '푸르트벵글러' 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다가 뜻하지 않게 찾아낸 신간을 어제 입수했다. '망명 음악, 나치 음악' 이라는 책을 집필하기도 했던 음악학자 이경분이 2006년에 독일 베를린과 코블렌츠의 국립문서보관소와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문서 보관소 등을 샅샅이 뒤져 찾아낸 자료들로 재구성한 안익태의 독일 체류 시절 행적을 담은 책이었다. (휴머니스트, 13000\)


물론 이 책도 지난 번 참석했던 '만주국 동영상 공개 겸 강연회' 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다만 송병욱이 '객석' 기사에서 지적했던, 안익태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사용한 '호칭 문제' 나 '만주국 축전곡=한국 환상곡' 설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더불어 녹음 자료의 부족으로 인해 이견이 오고 가는 안익태의 음악 역량에 대한 문제도 다루고 있다.

이경분은 '스승과 제자 간의 호칭 문제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고, 두 통의 편지 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고 입장을 표명했고, '만주국 축전곡' 에 대해서는 당시 안익태의 콘서트 에이전시였던 한스 아들러의 홍보지를 참고해 교향 환상곡 제 2번 '교쿠토(극동)' 일 가능성이 더 높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그리고 안익태의 음악 역량에 대해서는 당시 베를린 필 지배인이었던 게르하르트 폰 베스터만이 일독회(Deutsche-japanischen Gesellschaft)에 객원 지휘자 선정 문제로 보낸 편지에서 고노에 히데마로보다 안익태의 음악성을 더 높이 샀고, 그 결과 1943년의 베를린 필 연주회에 안익태가 지휘자로 선정되었다고 쓰고 있다. '객석' 의 진화영 기자가 들었다는 은퇴 단원의 회상은 아마 착각이었을 것이라고-개인적으로는 외모가 서로 비슷했던 고노에와 안익태를 혼동하지 않았나 하는 해석을 하고 싶다-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 연구 중에 밝혀진 고노에의 군국주의 지향적인 음악 활동과 안익태의 활동 간의 병치, 김경래와 로리타 안의 서술에 대한 오류 지적, 학술적인 친목회로 창립되었던 일독회가 나치에 의해 군국주의 홍보 단체로 변질된 과정, 만주국 공사 에하라 고이치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사이에 오간 편지, 고노에와 안익태 외에 베를린 필과 관계를 맺고 있던 일본 지휘자들인 야마다 고사쿠, 기시 고이치, 오타카 히사타다 등에 대한 정보, 푸르트벵글러와 카라얀에 대한 서술 등 주변 자료들도 상당히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다만 이경분 자신도 책의 후기에서 밝히듯 '안익태를 친일파로 몰아붙여서는 제대로 된 연구가 힘들며, 그가 2차대전 후에 보여준 애국적인 행동까지 무시할 수는 없다' 는 입장이다. 덧붙여 문서 보관소에 있던 수많은 일본어 자료들에 대해서는 '일본어를 읽을 수 없다는 것이 매우 원통했다' 고까지 쓰고 있는데,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음악학자들이 후속 연구를 계속 해주었으면 한다.

이 책을 구입하기 전에 나는 '객석' 에 2회 실린 송병욱의 주장, 그리고 그에 대한 안익태 기념재단 측의 반박, 1992년에 '음악동아' 의 별책 부록으로 나왔던 안익태 작품집 CD, 고노에 히데마로 편곡의 '에텐라쿠' 가 담긴 낙소스의 CD 등을 계속 참고하면서 대단히 허탈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만주국 강연회가 끝나고 며칠 되지 않아 한 초등학교 교사가 '애국가는 친일파 작곡가가 썼으니 부르지 마라' 고 가르쳤다고 해서 징계를 먹는 등의 웃지 못할 촌극도 있었고.

그렇다고 해서 안익태에 관한 문제를 덮어두고 '기분 전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만큼 우리는 역사적인 현실에 대해 굉장히 무지하고 무능했고, 이제 그것을 깨우치기 시작하려고 첫 걸음을 디디고 있는 중이다. 이 과정을 소홀히 하면 돌아오게 될 손해 혹은 피해도 다시 우리가, 혹은 우리의 후손들이 지게 될 것이다. 예술이라고 해서 정치/사회적인 평가에 절대 열외일 수도 없고, 오히려 이 기회에 제대로 된 연구가 이루어져서 감정과 향수에 기반한 '억지춘향식 신화 만들기' 라는 관행 자체를 타파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