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에 KBS에서 발매한 CD들 중 '한국의 작곡가' 라는 앨범이 있었다. 내가 그 앨범을 어떻게, 또 왜 샀는지는 이제 기억도 나지 않지만 용케 지금까지도 진열장에서 살아남아 있는 것을 보면 무슨 사연이 있었으리라 짐작이 간다. 그 CD에는-모리카와 준(한국어 이름 홍난파)이 작곡한 '관현악을 위한 모음곡' 을 열외로 친다면-한국 최초의 관현악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곡이 하나 들어 있는데, 바로 채동선(1901-1953)이 작곡한 '현악 합주를 위한 협주곡' 이다.
CD 속지의 해설에서는 채동선을 '진정한 의미로 한국음악 창작에 있어서 새로운 길을 연 작곡가' 라고 평가하고 있는데, 그 말에 동감하는 바이다. 물론 그가 당시로서는 드물게 독일의 슈테른 음악원에 유학해 음악을 배운 인물이라서 그러한 평가가 나왔을 법하지만, 무엇보다 채동선의 가장 큰 업적은 '서양음악의 토착화' 에 가장 앞장서서 활동했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바이올리니스트로 주로 활동하던 채동선이 작곡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32년 쯤으로 추정되는데, 작품 번호 3번을 달고 있는 현악 4중주 제 1번이 그 첫 성과물이었다. 이듬해에는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곡인 가곡 '고향(정지용 원시)' 을 작곡했는데, 훗날 작사자가 월북하는 바람에 1980년대 후반까지 이은상의 '그리워' 로 가사가 바뀌어 불려져야 했던 아픈 과거를 지닌 곡이다.
이번에 소개할 '현악 합주를 위한 협주곡(op.9)' 은 1940년 쯤 작곡된 것으로 여겨지는 작품인데, 정식 명칭은 '고전 형식에 의한 현악 합주를 위한 협주곡' 이다. 제목 그대로 하이든이나 모차르트 류의 음악을 벤치마킹한 3악장짜리 곡인데, 당시 발표된 서양 스타일의 악곡이 가곡이나 독주, 실내악에 한정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꽤 의미가 큰 작품이다.
작곡자 자신이 꽤 오랫동안 독일에서 수업을 받았던 만큼 기법이나 형식 면에서 (그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깔끔하게 작곡된 작품인데, 문제는 '그것으로 끝' 이라는 점이다.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면 십중팔구 서양 작곡가의 이름을 댈 것 같을 정도로 완벽한 고전 모조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속지에도 '채동선의 후기 작품에서는 그 내용에 있어서 한국적 색채의 추구가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 곡에서는 그런 구체적인 시도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고 쓰고 있다.
결국 초기의 채동선도 당시 식민지 지식인들의 공통된 모순인 '서양문화의 우월함을 인식해야 일제에 대항할 수 있다' 는 식의 사고 방식을 벗어나지 못한 듯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그는 이후 그러한 경향이 극에 달한 끝에 '일본 귀화인' 이 되어버린 모리카와 준이나 구로야마 사이민(한국어 이름 현제명), 가네시로 쇼타이(한국어 이름 김성태) 등과 같은 '주류의 길' 을 걷기를 의식적으로 거부했던 것이다.
실제로 채동선은 이 곡을 쓴 뒤 모든 공적인 활동에서 손을 뗐고,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는 거의 은둔 상태로 지내면서 전통음악의 수집과 채보 작업에 몰두했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서양음악과 전통음악 모두를 끌어안기-이 해방 후에 창작된 여러 작품에 녹아 나온 것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이 작품은 채동선의 창작 활동 전반기를 총결산하는 의미로 쓰여졌다고 생각된다.
해방 후 채동선은 민족적인 성향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지만, 정치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온건 우파였다. 따라서 그는 김순남이나 이건우 등 좌익 작곡가들과는 정적 관계였지만, 친일 부역자 계통의 '짝퉁 우익' 인사들과도 마찬가지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찌 보면 '자유 진영' 이 된 남한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주도적인 위치에 있을 수도 있었지만, 친일 부역자들이 거의 예전처럼 힘을 얻어 각종 요직에 진출하는 바람에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60세도 넘기지 못하고 피난지였던 부산에서 영양실조와 복막염으로 숨을 거두기까지 채동선의 생애는 상당히 파란만장했었다. 그 고투의 순간들은 작품 속에서도 실증되고 있는데, 외로운 개척자로서 그의 작품이 다시 평가받는 날이 오기를 바랄 뿐이다.
음반은 위에 쓴 대로 KBS에서 나온 것 한 종류 뿐이다. 현악 주자 출신인 박은성이 KBS 교향악단을 지휘해 녹음했는데, 합주력이 곳곳에서 무너지고 있어서 유감이다. (녹음을 다듬을 시간이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곡 자체가 연주하기 까다로웠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오랫동안 폐반되어 있는 상태인데, 3악장 첫머리가 KBS 1FM의 'KBS 음악실' 시작 BGM으로 계속 사용되는 것을 제외하면 듣기도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