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군에 있을 적에는 '세 개 중 택해라' 라고 해서 잠시 불교를 믿은 적이 있었지만, 완전히 형식상이었고 그 뒤로는 지금까지 무교인으로 지내는 중이다. 솔직히 심정을 까놓자면, 어느 종교도 믿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다. (더군다나 종교가 '교조주의' 쪽으로 흐르기 쉬운 이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는 더더욱.)
뭐 그렇다고는 해도 종교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 커다란 악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천주교 같은 경우에는 내게 꽤 좋은 인상으로 각인되어 있는데, 명동성당 같은 곳을 가보면 마음이 저절로 경건해지는 것도 그 때문인 듯 하다. (그러고 보니 가상 공간이라고는 해도 '마리미테' 에 나오는 사립 리리안 여학원도 천주교 계통의 미션 스쿨이다.)
소위 '종교음악' 에 대해서도 비슷한 취향인데, 실제로 그 동안 내가 탐닉해 왔던 레퍼토리들도 모차르트와 베르디의 '레퀴엠', 베토벤의 '장엄미사', 브루크너와 푸르트벵글러의 '테 데움', 그리고 레어 애청곡선 초기에도 다룬 바 있는 이건용의 'AILM을 위한 미사' 까지 천주교 전례 관련 곡들이 많다.
물론 예외도 있는데,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 같이 라틴어 전례문이 아닌 성경 말씀을 골라 텍스트로 한 돌연변이 같은 곡도 포함된다. 그리고 이번에 소개할 슈베르트(Franz Schubert, 1797-1828)의 '독일 미사(Deutsche Messe D.872)' 도 마찬가지다.
이 곡은 작품 번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슈베르트 후기의 것(1826년)이다. 가사는 시인이자 물리학자였던 요한 필립 노이만(Johann Philipp Neumann)이 독일어로 집필한 것인데, 통상 미사문의 형식을 뼈대로 하고는 있지만 내용은 오히려 루터파 개신교의 영향이 짙은 것이었다. 그리고 베르디의 '레퀴엠' 에 마지막 곡으로 쓰인 '리베라 메' 와 마찬가지로 '주기도문(Das Gebet des Herrn)' 이 마침곡 뒤에 추가되어 있는데, 작곡 당시에는 없었고 나중에 더해진 것 같다.
*전곡의 순서는 입당송(Zum Einzug), 대영광송(Zum Gloria), 복음과 신앙고백(Zum Evangelium und Credo), 봉헌송(Zum Offertorium), 거룩하시도다(Zum Sanctus), 성체성사(Nach der Wandlung), 하느님의 어린 양(Zum Agnus Dei), 마침성가(Schlussgesang), 그리고 주기도문까지 포함하면 총 아홉 개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이야 각국의 천주교 성당과 교회에서 미사를 집전할 때 자국어로 하고 있지만, 몇 세기 전까지 미사 집전때 쓴 언어는 단 하나, 바로 원문인 라틴어였다. 모차르트의 종교곡도 절대 다수가 이 라틴어 텍스트로 쓰여졌고, 베토벤도 전례용이 아닌 오라토리오 '감람산의 그리스도' 를 빼면 이 원칙을 따랐다. (물론 '장엄미사' 의 경우에는 개신교 공동체에서도 쓸 수 있도록 독일어판을 따로 만들기도 했다.)
천주교 미사는 직접 보지 못해서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주교 등 성직자의 말씀에 회중 또는 성가대가 답하는 식의 응답송 형식이 많은 것 같다. 그 때문인지 대부분의 종교음악 명작들은 성악 파트가 독창자와 합창 파트로 나뉘어져 있다.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 도 전곡은 아니지만, 군데군데 바리톤과 소프라노 독창을 필요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 '독일 미사' 는 독창자도 없고, 초판본은 그냥 혼성 4부 합창과 오르간이 전부였다. 여기에 15명의 관악 합주(오보에 2, 클라리넷 2, 바순 2, 호른 2, 트럼펫 2, 트롬본 3, 팀파니, 콘트라베이스)를 덧붙인 것이 2판인데, 여기 소개하는 연주는 이 2판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이 곡은 슈베르트의 형이었던 페르디난트에 의해 3성부 어린이 합창+오르간을 위한 판본과 무반주 4성부 남성 합창용 판본으로도 편곡되었다.
간소한 편성과 단순한 유절 형식으로 유추해 보건대, 이 곡은 소규모 공동체의 종교 행사를 위해 작곡된 것 같다. 모차르트의 곡처럼 오페라 분위기도 없고, 베토벤처럼 대위법의 극치를 보여주는 복잡한 성부 취급도 없다. 다만 소박하고 차분한 성가곡의 느낌 그대로인데, 그렇다고는 해도 이 곡에서도 슈베르트는 가사와 음악의 유기적인 결합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아마 이러한 점 때문인지, 이 미사곡은 한국 천주교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성가집에도 번역되어 실려 있다. 군대에 있을 때 심심해서 성가집을 뒤져보다가 발견해서 꽤 놀란 적이 있었는데, 329~336번이 바로 이 '독일 미사' 다. (다만, 마지막 곡인 '주기도문' 은 예식에 불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는지 빠져 있다.)
관악 합주를 더한 판본이라고 해도 요즘 사람들이 듣거나 노래하기에는 너무 '심심한' 스타일의 곡이라서 그런지, 성당에서도 공연장에서도 이 곡을 연주하는 일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음반도 많지 않은데,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EMI의 독일 지사인 EMI 엘렉트롤라에서 1988년에 제작한 CD다. (아직도 팔리고 있는 지는 잘 모르겠다.)
ⓟ 1988 EMI Electrola GmbH
녹음이 1959년 것이라 조금 오래되기는 했어도 스테레오인데, 베를린의 장크트 헤드비히 성당 합창단(Chor der St.Hedwigs-Kathedrale, Berlin)과 오르가니스트 볼프강 마이어(Wolfgang Meyer), 그리고 (서)베를린 교향악단(Berliner Symphoniker) 단원들이 연주했다. 지휘는 합창단의 음악 감독이었던 칼 포르스터(Karl Forster)가 맡았는데, 종교음악 위주로 활동했지만 바흐의 '커피 칸타타' 와 '농민 칸타타' 같은 세속곡도 지휘/녹음한 바 있다.
소위 '낭만주의 해석' 의 잔재가 없지 않아 좀 구티나게 들리기도 하지만, 원곡이 워낙 단순소박해서 별로 티가 나지 않는다. 솔직히 이 곡은 음반으로 듣기 보다는, 성당에서 전례를 곁들여 들어보는 편이 훨씬 감동적일 것 같다. (물론 '무교인' 인 내가 그러한 자리에 참석할 수 있는지, 또는 해도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니면 이 곡을 직접 불러 보는 것도 괜찮을 지도 모르겠다. (대학교 합창 시간에 '감람산의 그리스도' 와 '메시아', '대관식 미사' 등의 종교곡 일부를 가지고 수업을 했는데, 이러한 기회에 할 수 있을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