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회에 가는 기쁨?...가는 사람들을 보면 '사교의 장' 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연주가들의 제자나 가족, 친척들도 많이 오고, 아니면 그냥 음악 애호가이던 아니건 간에 면식 있는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보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집안에서 외골수인 클래식 음악 매니아이자 전공자로서 나에게 연주회는 그냥 '사교의 장' 은 아니다. 다만 레코드로는 역부족인 생음악의 현장감을 느끼고 싶다던가, 막연히 지휘자의 꿈을 꾸고 있을 나의 자아를 학습시키는 '학습의 장' 으로서 연주회장을 찾는 것이 나의 기쁨이라고 할까.
아, 그리고 빼먹은 것이 '레코드로도 듣지 못한 작품들' 을 처음 듣는 재미도 있다. 어제 열렸던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 제 152회 정기연주회에서도 그러한 재미를 만끽할 수 있었다.
연주회 프로그램의 컨셉은 꽤 독특했다. 1부에서 서곡-협주곡, 2부에서 교향곡으로 이어지는 종래의 프로그램에서 살짝 벗어나 있었다. 림스키-코르사코프(Nikolay Rimsky-Korsakov, 1844-1908)의 '에스파냐 기상곡' 과 랄로(Édouard Lalo, 1823-1892)의 '에스파냐 교향곡(말이 교향곡이지, 실제로는 바이올린 협주곡임)' 이 1부에서 연주되었고, 폴란드 작곡가인 마우에츠키(Maciej Małecki, 1940-)의 '두 대의 하프를 위한 고전 양식의 소협주곡' 과 레스피기(Ottorino Respighi, 1879-1936)의 교향시 '로마의 소나무' 가 2부에서 연주되었다.
'에스파냐 기상곡(Capriccio espagnol)' 은 아마 노다메 칸타빌레에서도 언급된 곡으로 알고 있는데, 관현악법을 배울 때 빠지지 않는 곡이기도 하다. (실제로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직접 '관현악법' 이라는 책을 저술했고, 지금도 쓰이고 있다.) 호른의 뮤트 주법이나 바이올린의 기타풍 피치카토라던가, 대규모 타악기군의 효과적인 사용에 관한 예로서도 자주 나오는 곡이다.
외국 작곡가가 에스퍄냐 민속 음악 요소를 차용한 곡 중 최초의 성공작이라고 프로그램에 쓰여져 있었는데, 실연으로 들었을 때도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진짜 여간내기가 아닌 작곡가였다. 바이올린과 오보에 솔로가 축축한 날씨 때문인지 그렇게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첫 곡으로서 이렇게 에너지가 넘쳐흐르는 연주는 지금까지 거의 듣지 못했다.
네 번째 대목인 '정경과 집시의 노래' 에 나오는 '기타풍 피치카토' 부분에서는 바이올린 주자들이 활을 무릎에 놓고 기타처럼 잡은 채로 현을 퉁기고 있었는데, 이러한 주법은 예전에 EBS에서 해줬던 '번스타인의 청소년 음악회' 에서 드뷔시의 '이베리아' 를 연주할 때 본 적이 있어서 친숙했다.
두 번째 연주곡이었던 랄로의 '에스파냐 교향곡(Symphonie espagnole)'. 림스키-코르사코프 곡과 마찬가지로 에스파냐 컨셉의 곡이었지만, 솔직히 저 곡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레퍼토리였다. 파가니니와 마찬가지로 깊이는 없이 너무 '이국 취미' 에만 기대는 곡이라는 생각인데, 프로그램에도 '깊이는 없고, 다만 외향적인 효과에 치중한 곡' 이라고 설명되어 있었다.
솔로를 맡은 로베르트 프랑크(Robert Frank)는 바그너 악극 상연으로 유명한 바이로이트 음악제의 관현악단 악장을 맡고 있는 독일 바이올리니스트였는데, 게르만계 연주가로서 라틴풍 곡을 어떻게 연주할 지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물론 본 공연에서도 연주는 상당히 깔끔했고 군더더기도 별로 없었지만, 곡 자체가 그다지 어필하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옛 관례대로 3악장의 '간주곡' 을 빼고 4악장제로 연주했으면 어땠을지.
2부의 첫 곡으로는 그 동안 음반으로도 듣지 못한 곡-아마 한국 초연이 아닐지 모르겠다-이 선곡되었다. 마치에이 마우에츠키(프로그램에는 '말레키' 라고 표기됨)라는, 정말 듣도보도 못한 폴란드 작곡가의 1988년 작품이었는데, '고전 양식' 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어서 그래도 이상한(???) 곡은 아니겠지 하는 심정이었다.
하프 두 대와 스트링을 위한 작은 규모의 곡이었는데, 바로크 시대의 합주 협주곡(Concerto grosso)을 벤치마킹한 아주 재미있는 곡이었다. 물론 그냥 '바로크 짝퉁' 은 아니었고, 조성 취급이 대담한데다 2악장에 가서는 스트링에 기묘한 플라지올렛(flageolet. 활에 힘을 약간만 주어 휘파람소리 비슷한 음색을 내는 주법)을 요구하는 등 나름대로 당돌한 면모도 보여주는 곡이었다. 로드리고의 '세레나데 협주곡' 과 비슷했지만, 로드리고 곡과 비교하면 이 곡이 좀 더 '진지하게' 고전풍이었다. 아무튼 음반을 꼭 구하고 싶은 곡이다.
가장 기대했던 마지막 곡인 레스피기의 '로마의 소나무(Pini di Roma)'. 제목 그대로 로마에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곳의 소나무를 테마로 한 서사시풍의 작품인데, 이 곡 역시 관현악법 책에 꼭 나오는 곡이다. 무대 밖에서 연주하는 트럼펫 솔로, 오르간의 페달, 관현악에 있어서 피아노의 활용, 새소리 같은 의음 효과, 금관 부스터, 콘트라베이스의 스코르다투라(변칙 조율) 등 작곡학도로서 배울 것이 엄청나게 많은 곡이다.
물론 배울 것도 많지만, 무엇보다 이 곡이 대규모 관현악을 다루면서 가장 효과적으로 소리를 조합한 곡이기 때문에 아직까지 그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평론가가 이 곡의 마지막 대목인 '아피아 가도의 소나무' 에서 '벤허' 류의 영화음악 같은 웅대한 스케일을 연상케 한다고 적은 것을 봤는데, 그러한 느낌을 기대하고 들었다.
1부인 '보르게제 별장의 소나무' 는 레스피기가 일부러 저음부를 배제한 대목인데, 그만큼 가볍고 발랄한 곡이다. (마지막에 가서는 상당히 시끄러운 시장바닥 필을 풍기게 만들었다.) 동요에서나 나올 법한 멜로디들이 주를 이루는데, 작곡가 자신은 별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묘사했다고 한다. 이 부분은 충분히 가볍고 동화적으로 연출되었고, 특히 마지막에 아첼레란도까지 걸면서 질주하다가 갑자기 끝내는 것도 신선했다.
떠들썩함이 갑작스레 사라지고 난 뒤 침묵하던 콘트라베이스 등의 저음 악기가 조용히 시작하는 2부인 '카타콤베의 소나무' 는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의 납골당이라는 제목 대로 상당히 가라앉은 고대 풍의 곡인데, 트럼펫 주자 한 사람이 무대 밖으로 나가 그레고리안 성가 풍의 솔로를 연주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어 음악이 서서히 부풀면서 오르간의 묵직한 페달 연주와 함께 아주 두툼한 클라이맥스를 만드는데, 이 대목에서는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 오르간이 없는 관계로 이동식 오르간(positive organ)에 스피커를 달아 연주해야 했다. 물론 음량 면에서는 전혀 불만이 없었지만, 그래도 세종문화회관처럼 진짜 파이프 오르간으로 연주해야 제맛인 대목일 것 같다.
피아노의 조용한 아르페지오로 시작하는 3부 '자니콜로의 소나무' 는 어둡고 무거웠던 2부의 분위기를 일색하는 대목인데, 클라리넷을 비롯한 목관의 솔로가 주가 되는 부분이다. 물론 중간부에서 스트링 주자들의 실내악 스타일 표현도 인상적인데, 여전히 목관의 음량이 좀 작은 것이 불만이기는 했어도 야릇한 과거 회상 분위기의 묘사는 확실했다. 그리고 마지막 대목에 나오는 새소리는 두 명의 타악기 주자가 리드 비슷한 것을 물고 불어서 냈는데, 빈 신년음악회 중계 때 요제프 슈트라우스의 왈츠 '오스트리아의 마을 제비' 연주에서 나온 것과 같은 종류의 의음 악기인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인 4부 '아피아 가도의 소나무'. 이 부분은 금관 부스터를 비롯한 전 관현악이 엄청난 음량으로 쏟아붓는 클라이맥스인데, 예의 콘트라베이스와 첼로 스코르다투라는 첫머리에서 들을 수 있었다. (주자 8명 중 네 명이 다섯 줄 짜리 콘트라베이스를 쓰는데, 가장 낮은 현인 C현을 단 2도 더 낮춰서 B현으로 조율해 연주함. 첼로도 마찬가지로 가장 낮은 C현을 B현으로 낮춰 조율) 로마제국 군대의 행진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었는데, 진짜 '벤허' 같은 스펙터클 대작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합창석에 자리한 금관 부스터(트럼펫 4, 트롬본 2)와 오르간 페달까지 가세하면서 소리가 엄청나게 커져 바닥을 울릴 지경이었는데, 음반으로는 SACD라도 이만한 음량을 감당할 수 없다. 이러한 곡은 역시 생음악으로 들어야 제맛인 것이다. 듣는 내가 닭살이 돋고 얼굴이 빨개질 정도였는데, 그 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확 날아가는 것 같았다.
앵콜 곡으로 연주된 것은 지휘자 박태영씨가 지난 10월 28일 서울시 청소년 교향악단 연주회에서 다루었던 시체드린(Rodion Shchedrin, 1932-)의 '카르멘 모음곡(비제의 오페라 '카르멘' 을 발레 모음곡으로 만든 곡)' 중 아다지오였다. 오페라에서는 돈 호세가 카르멘에게 자신의 사랑을 담아 부르는 '꽃노래' 인데, '들뜬 마음 가라앉히고' 효과를 노린 것이었을까?
오랜만에 후련하게 들었던 연주회였다. 연주회가 끝나고 박태영씨를 만났는데, 12월에 있을 청소년 교향악단 연주회에서는 생상의 교향곡 3번 '오르간' 을 연주한다고 했다.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의 '진짜' 파이프 오르간을 사용한다고 하니, 이것도 필청 공연이 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