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의 시벨리우스와 노르웨이의 그리그는 그 나라에서 배출한 작곡가들 중 가장 이름높은 인물들인데, 이들 때문에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의 음악이 세계로 진출할 수 있었다고까지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비슷한 예로 스웨덴의 경우에는 베르발트가 있겠지만, 좀 마이너한 면이 강하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독일 사이에 빠끔히 튀어나와 있는 나라로 덴마크가 있다. 우리에게는 세계 유수의 낙농업 국가이자, 인어 동상으로 열심히 낚시질을 하고 있는 관광 국가로 알려져 있는 나라다. 그리고 음악 쪽에서는 칼 닐센(Carl Nielsen, 1865-1931)이 이 나라에서 배출한 가장 유명한 작곡가로 이름을 남기고 있다.
(덴마크 화폐에도 등장하는 칼 닐센 초상. 100크로네 앞면)
닐센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시골 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와 군악대의 트럼페터 등을 전전하며 음악을 익힌, 소위 입지전 스타일의 인물이었다. 작곡도 비교적 늦게 시작했고, 남긴 작품도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여섯 곡의 교향곡과 바이올린 협주곡, 클라리넷 협주곡 등의 중요한 작품을 남겼는데, 이 중 이번에 소개할 곡이 흔히 '멸할 수 없는 것(Det uudslukkelige)' 이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져 있는 교향곡 4번이다.
교향곡 4번은 1914~16년의 3년 동안 작곡되었는데, 1차대전이 한창이었던 때였다. 바로 밑에 자리잡고 있던 독일이 덴마크의 중립 정책을 수시로 위협하고 있었고, 심지어 덴마크 영해 주변에 연합국 선박의 항행을 방해하는 기뢰를 설치하라고 협박까지 하던 상황이었다. 영국과의 무역이 국가 재정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던 덴마크로서는 이것이 상당히 큰 타격이었다.
닐센이 얼마나 사회참여적이고 애국적인 작곡가였는지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이 기간동안 상당히 드라마틱한 교향곡을 작곡하고 손수 '멸할 수 없는 것' 이라는 제목을 붙였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흔히 이 곡의 제목을 '불멸' 이라고 짧게 번역하고 있지만, 닐센의 의지를 반영하기에는 좀 부족하지 않은가 싶다.
음악적인 측면에서도 이 곡은 닐센의 작품 중 전환점을 이루는 곡인데, 3번 까지의 교향곡에서는 조성감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고전적인 양식이었지만 이 곡부터는 제목에서 조성이 삭제되어 있다. (그래서 정식 제목도 "교향곡 제 4번 '멸할 수 없는 것'" 으로 표기되어 있음) 그리고 슈만 교향곡 4번이나 지난 번 소개한 슈미트 교향곡 4번에서처럼, 전통 교향곡의 4악장 형식을 지키면서도 단악장으로 쉼없이 연주하도록 하고 있다.
덴마크의 주요 무역 상대국이었던 영국에서 닐센 음악이 소개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인데, 2차대전 후 작곡가 윌리엄 월튼이 덴마크 여행을 갔다가 닐센의 작품 연주를 듣고 이를 적극적으로 홍보했으며, 1950년에는 덴마크 국립 방송 교향악단이 에든버러 음악제에 초대되어 교향곡 5번을 연주했다.
그리고 1959년에 존 바비롤리 지휘의 할레 관현악단이 교향곡 4번의 첫 스테레오 음반을 파이(Pye)에서 출반했다. 바비롤리는 이 곡의 녹음을 지난 번 소개했던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과 병행해서 진행시켰는데, 아마도 두 곡 다 팀파니 두 세트가 필요한 곡이기 때문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바비롤리는 모국인 영국의 음악과 함께 말러와 시벨리우스 음악의 전문가로 알려져 있기도 한데, 특히 시벨리우스의 경우에는 번호 붙은 교향곡 전곡(7곡. 번호 없는 '쿨레르보 교향곡' 제외)을 비롯해 다수의 관현악 작품을 EMI에 녹음한 바 있다.
시벨리우스에서 엿보이는 거칠어 보일 정도의 야성미와 그슬린 듯한 어두운 음색이 닐센 교향곡의 연주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더군다나 1950년대 후반의 바비롤리가 보여주던 예민하고 날카로운 모습이 더해져서 상당히 긴장감이 넘치는 연주가 되었다.
고전 교향곡 형식의 1악장에 해당되는 알레그로 첫머리부터 트롬본 등의 금관을 앞세워 쿡 찌르듯이 시작되는데, 카라얀이 이 부분을 세련되고 날렵하게 다듬었다면 바비롤리는 오히려 '날것' 에 가까운 느낌이다. 통상 제 2주제로 보는 클라리넷 듀엣의 멜로디(1:36~2:14)는 감미롭지는 않아도 이 주제의 중요성은 충분히 부각되어 있다. (이 주제가 곡 말미에서 금관으로 전이되어 클라이맥스를 이룸)
비올라가 튀어나오면서 첫 클라이맥스로 이끌어가는 대목(3:13~4:06)에서는 다시 금관의 강렬한 연주가 주축이 되고 있는데, 트럼펫과 트롬본은 쭉 뻗어나가는 느낌이 충분하지만 호른의 연주가 좀 시원치 않다. 말러 교향곡 1번의 녹음에서도 보이는 약점인데, 이 녹음의 옥의 티가 아닐까 싶다.
2악장에 해당하는 포코 알레그레토(Poco allegretto. 11:38~16:21)는 전원풍의 조용한 대목인데, 카라얀은 이 부분에서 템포를 좀 더 느리게 잡아 안락함을 강조했다. 하지만 바비롤리는 속도 표시를 지키면서 조금 더 리드미컬하게 만들었는데, 멀리서 들리는 시골 춤곡 분위기같다.
느린 악장 격인 포코 아다지오 콰지 안단테(Poco adagio quasi andante. 16:21~26:09)는 오페라의 극적인 레치타티보(recitativo)를 연상케 하는 대목인데, 닐센 자신은 이 부분의 바이올린 도입부를 '바람을 타고 나는 독수리' 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바비롤리가 스트링을 다루는 솜씨가 가장 잘 발휘된 대목인데, 조금 신파 분위기가 나지만 뜨겁게 감정을 넣어 긴 호흡으로 노래하는 바이올린과 비올라 파트가 상당히 인상적이다.
이 대목의 클라이맥스(23:40~24:07)도 인상적이지만, 왠지 일부러 힘을 아낀 듯한 모습이다. 바비롤리가 언젠가 말러 교향곡을 논하면서 '클라이맥스는 많지만, 진짜 클라이맥스는 단 한 곳 뿐이다' 라고 이야기했던 것을 들었는데, 이 곡에서도 마찬가지 관점을 취한 것 같다.
스트링의 날렵한 악구와 팀파니 두 대의 강한 연타 두 방 뒤 시작되는 마지막 단락(26:09~)은 이 교향곡의 진정한 대단원이자, 이 곡의 제목인 '멸할 수 없는 것' 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주는 부분이다. 팀파니 두 세트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상당히 거친 악구들을 종종 연주하는데(27:26~27:42, 28:06~28:14, 32:18~33:01), 여기서도 힘조절을 노렸는지 그다지 심하게 퉁탕거리지는 않는다.
첫머리의 클라리넷 듀엣이 연주하던 서정적인 멜로디가 격한 경과구를 거치면서 장대한 '진짜 클라이맥스' 로 바뀌는 부분이 아마 바비롤리가 노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33:27~). 팀파니 두 대의 강한 악센트를 곁들여 트럼펫과 트롬본을 비롯한 금관이 앞장서서 불어제끼는 이 부분은 정말로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불러 일으키는 대목이다. (물론 호른의 취약함이 여전히 아쉽긴 하다.)
물론 이 녹음의 질이 그다지 좋지는 않고, 앙상블도 베를린 필 같은 초특급 악단들에 비하면 종종 헛점을 노출하는 것도 사실이다. 바비롤리가 '진짜 클라이맥스' 를 위해 희생시킨 다른 인상적인 악구들에 대해서 불만을 가질 법도 하다.
하지만 이 녹음은 동곡의 첫 스테레오 녹음이라는 의미 외에도, 닐센이 구현하고자 했던 바를 덴마크인이 아닌 영국인과 관현악단이 거의 완벽하게 표출해냈다는 의미로도 상당히 귀중한 녹음이다. 이보다 더 기능적으로 뛰어난 연주야 많지만, 음악의 몰입도를 생각하면 이 녹음을 뛰어넘는 것은 지금도 거의 없다.
ⓟ 1990 EMI Records Ltd.
EMI에서 염가 시리즈인 'Phoenixa' 로 1990년대 초반에 재발매한 뒤로는 사실상 폐반 상태인데, 바비롤리 에디션을 계속 내고 있는 듀턴(Dutton)에서 꼭 새롭게 복각해 발매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더불어 바비롤리가 종종 지휘했다는 후속작인 교향곡 5번도 음원이 발굴되었으면 한다. 1960년에 말러 교향곡 7번을 처음 지휘할 때 프로그램에 나란히 올라와 있었다는데, 말러가 BBC 레전드에서 발매되었으니 가능성은 아직 있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