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 시대를 돌이켜 보았을 때, 현재 '음악의 아버지' 라는 꽤 부담스러운 칭호를 가지고 있는 이가 바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다. 그보다는 좀 격이 떨어지고 매우 BL틱한(?????) '음악의 어머니' 는 조지 프리데릭 헨델이 꼽히며, 이 두 작곡가의 작품은 지금도 매우 어렵잖게 들을 수 있다.
하지만 바흐와 헨델이 살아있던 시절에는 그 도전과 실험 정신 때문에 작곡가로서 그다지 인정을 못받거나(바흐), 지금은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보논치니 같은 작곡가와 힘겨운 파벌 싸움을 벌이는 등(헨델) 상당히 고단한 역정이었다고 한다. 오히려 당대에 바흐와 헨델을 능가하는 명성의 작곡가들 중 한 사람이 독일의 게오르크 필립 텔레만(Georg Philipp Telemann, 1681-1767)이었다.
텔레만은 바흐와 헨델과는 달리 음악 창작에 있어서 모험을 즐기지 않았으며, 또 파벌 싸움이나 이권 다툼에도 그다지 관여하지 않았던 '안전빵 인생' 을 살았던 사람이었다. 작곡 속도도 무척 빨랐고, 심지어 손이 악상을 따라가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로서는 징하게 오래 살기까지 해서-86세까지 살았으니까, 요즘 관점으로도 대단하다-, 텔레만 작품 전집을 출판하고 있는 독일 출판사가 아직까지도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상태다.
텔레만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곡은 아마 웬만한 트럼펫 주자들이라면 으레 연주하는 트럼펫 협주곡이 있겠고, 그 외에는 전형적인 '접대용 음악' 인 식탁 음악 시리즈라던가 이번에 소개할 모음곡(서곡) '함부르크 조수의 간만(Hamburger Ebbe und Flut)' 등 몇 곡이 고작이다.
'함부르크...' 는 약 111곡(추정치)이나 되는 텔레만의 관현악 모음곡 중 지금도 명맥을 잇고 있는 몇 안되는 작품이다. 바로크에서 초기 고전주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작곡가 답게 각 시대와 국가의 양식이 이리저리 뒤섞여 있는데,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여러 악장으로 된 것이 '서곡(Ouvertüre)' 으로 칭해진 것은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 네 곡과 마찬가지고, 느리고 장중한 인트로와 활달한 주부를 가진 서곡에 이어 사라반드, 부레, 루르, 가보트 등의 고전 춤곡들이 이어지는 것은 바흐의 곡 뿐 아니라 헨델의 '수상 음악' 과 '왕궁의 불꽃놀이' 에서도 쓰인 양식이다.
하지만 서곡을 제외하고 모든 곡에 표제가 붙어있는 것은 쿠프랭 등 프랑스 작곡가들의 영향이고, 서곡 말미에서 다시 느린 인트로의 주제를 끌어와 장중하게 끝맺는 아우트로를 사용한 것은 코렐리 등 이탈리아 작곡가들이 쓴 합주 협주곡(Concerto grosso)에서 차용한 아이디어다. 7악장의 '폭풍우 묘사' 는 몬테베르디 이래 전승되던 유행을 따르고 있다. (뱀다리로, 이 유행이 매듭지어진 곡은 베토벤의 6번 교향곡 '전원' 의 4악장에서였다.)
*2-10악장 독일어 표제의 해석
2악장: Die schlafende Thetis (잠자는 테티스)
3악장: Die erwachende Thetis (잠에서 깬 테티스)
4악장: Der verliebte Neptunus (사랑에 빠진 넵튠)
5악장: Die spielenden Najaden (놀고 있는 나이아드)
6악장: Der scherzende Tritonus (장난치는 트리톤)
7악장: Der stürmende Aeolus (폭풍우를 일으키는 에올루스)
8악장: Der angenehme Zephir (유쾌한 제피로스)
9악장: Ebbe und Flut (조수의 간만 (혹은 밀물과 썰물))
10악장: Die lustigen Bootsleute (유쾌한 뱃사람들)
20여 분의 비교적 소규모인 이 곡의 기본 편성은 스트링과 통주 저음(basso continuo. 흔히 하프시코드가 쓰임)으로 매우 간소하다. 거기에 오보에 한 쌍, 플루트, 바순, 그리고 2, 3, 8악장에서는 리코더 한 쌍 등의 관악기가 곡에 따라 추가로 덧붙여 진다.
이 중에 '리코더' 에 대해 뭔가 미심쩍게 생각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텐데, 그래 맞다. 초딩 때 누구나 가지고 다니던 그 플라스틱(원래는 나무 재질임) 피리 말이다. '웬 장난감이 악기 편성에 들어갔나' 고 생각하실 분들도 많겠지만, 당대에 리코더는 플루트를 능가하는 인기와 사용 빈도를 가진 매우 중요한 관악기였다.
독일어로 '플뢰테(Flöte)' 나 이탈리아어로 '플라우토(flauto)' 라고 하면 으레 리코더를 칭하는 단어였고, 플루트라고 하면 '크베어플뢰테(Querflöte)' 나 '플라우토 트라베르소(flauto traverso)' 라고 해야 알아들을 지경이었다.
헨델의 '수상 음악' 세 번째 모음곡과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2번/4번에서도 주축이 되는 관악기가 리코더였던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고, 텔레만 자신도 리코더 독주와 스트링을 위한 모음곡을 여러 곡 썼다. (이 모음곡들은 지금도 일본의 리코더 콩쿨 과제곡으로 쓰이고 있다.)
그나마 정격 연주니 원전 연주니 하는 흐름이 대세가 된 요즘에야 리코더 음악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최근에는 '아즈망가 대왕' (카스가 아유무의 캐릭터 송 '정신차려(싯카리)!' 의 반주) 이나 '영국 사랑 이야기 엠마' (엔딩 테마인 'Menuet for EMMA' 가 리코더 합주단의 연주임) 등 애니메이션 OST에서도 특수 효과나 우아한 표현을 위해 쓰이고 있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인정하는 '고악기' 도 하프시코드와 이 리코더 뿐임)
리코더 외에도 이 곡에서는 특이한 점을 계속 찾아볼 수 있다. '조수의 간만' 이라는 표제가 보여주듯, 이 곡은 '텔레만판 수상음악' 이며 표제들도 해신인 테티스, 넵튠, 트리톤을 비롯해 모두 물이나 바다에 관한 소재를 끌어오고 있다.
6악장에서는 이례적으로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두드러지는 솔로 악구를 맡기도 하고, 이 곡의 메인인 '조수의 간만(9악장)' 에서는 당시에 별로 사용되지 않던 크레센도(crescendo. 점점 세게)와 디미누엔도(diminuendo. 점점 여리게) 등의 점층/점강식 강약법을 사용해 항구 도시 함부르크의 밀물과 썰물을 유쾌하게 그리고 있다.
하지만 이 곡은 비슷한 소재를 가진 (그러나 좀 더 규모가 큰) 헨델의 '수상 음악' 이나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들에 비하면 그 존재가 극히 희미하다. 차라리 여러 곡의 곡집으로 구성된 '식탁 음악' 이 더 유명하다면 유명할까 생각된다. 규모의 크고 작음도 문제겠지만, 무엇보다 이 곡의 조성 변화가 극히 적고-기껏해야 4, 5악장에서 C단조로 잠깐 바뀌는 것을 제외하면 모두 C장조임-, 따라서 변화의 묘미도 감소되기 때문에 폄하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듣는 여흥 음악' 이라고 치면, 이 곡만큼 듣기 편한 곡도 없을 것 같다. 일신서적 문고판 '바로크 명곡 해설' 에서도 '식사 중에 듣기 좋은 곡' 이라고 쓰여 있으니, 면식수햏이던 럭셔리한 디너든 간에 BGM으로 즐겨보심이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