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라이브 콘서트 시리즈-2.콘드라신 (1967)
장소: 도쿄 문화 회관(Bunka Kaikan)
협연: 다비드 오이스트라흐(David Oistrakh)
관현악: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Moscow Philharmonic Orchestra)
지휘: 키릴 콘드라신(Kirill Kondrashin)
-프로그램-
1부: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작품 77
2부: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1911): 교향곡 제 9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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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Altus ALT-047 (상단. 브람스) & Altus ALT-018 (하단. 말러)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2차대전 후의 분단과 서로 치고 받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골수 반공 국가로서, 그리고 점차 1인 독재국가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바로 옆 나라 일본에서는 '공산주의의 왕고' 격에 속하는 소련의 관현악단이 연주 여행을 하고 있었다.
바로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였는데, 지금이야 러시아 국립 관현악단이나 키로프 관현악단 같은 단체에 많이 밀리고 있지만 당시에는 소련 국립 교향악단(현 러시아 국립 교향악단)이나 모스크바 방송 교향악단(현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관현악단)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모스크바 필의 상임 지휘자는 키릴 콘드라신이었는데, 일본 뿐 아니라 서방에서도 주로 '반주 전문 지휘자' 로 알려져 있던 인물이었다. 이는 1958년에 개최된 제 1회 차이코프스키 국제 음악 콩쿨 때문이었는데, 당시 피아노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한 미국 피아니스트 밴 클라이번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협연하면서 자연스레 미국에도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인공위성 발사 경쟁 등으로 과열된 미-소 냉전 상황에서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는데, 실제로 콘드라신은 콩쿨 후 클라이번과 미국 전역을 돌며 협연 무대에 섰고 RCA에 차이코프스키 1번(RCA 빅터 교향악단)과 라흐마니노프 3번(심포니 오브 디 에어) 협주곡을 함께 취입하기까지 했다.
이를 계기로 콘드라신이 소련 국영 음반사 멜로디아(Melodiya)에서 취입한 음반도 차츰 서방 쪽에 소개되었는데, 그 대부분이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나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 등의 협주곡 반주였기 때문에 꽤 오랫동안 '반쪽짜리 명성' 이 유지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콘드라신은 당시 멜로디아에 말러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들을 비롯한 굵직굵직한 관현악 작품들을 녹음하고 있었고, 특히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4번은 초연자로서의 권위도 지니고 있었던 음반이었다.
이 일본 공연은 콘드라신 자신으로서도 '반주 지휘자' 라는 수식어를 떼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고, 이 때의 프로그램을 보면 차이코프스키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을 메인 프로그램에 포함시켰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말러리안임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는지, 4월 16일 도쿄 연주회 때의 메인 곡은 말러 교향곡 9번으로 결정했다. 1967년 당시 일본에서는 말러 교향곡이 종종 연주되고 있었지만, 이 9번은 아직까지 공연된 적이 없었고 당연히 일본 초연 무대가 되었다.
1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기대한 '반주 지휘자' 로서의 콘드라신을 만끽할 수 있는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이 준비되어 있었다. 독주는 아들 이고르와 함께 방일한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였는데, 당시 일본에서 오이스트라흐는 미국의 아이작 스턴과 함께 유태계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인기 1, 2위를 다투는 인기인이었다.
이미 멜로디아의 LP로 널리 소개된 오이스트라흐의 브람스 연주는 스턴과는 다른 강경하고 도도한 스타일로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내가 처음 들었던 오이스트라흐의 브람스 협주곡은 프란츠 콘비츠니 지휘로 드레스덴 국립 관현악단이 함께 연주한 것(DG)이었다.
콘비츠니와의 연주가 독일 전통에 충실한 악단과의 협연이라는 점에서 곡의 '독일적인' 성격을 강조한 연주였다면, 관현악과 지휘자까지 모두 러시아인으로 이루어진 이 연주에서는 긴장감과 끈끈한 선율미가 전면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슬라브풍' 연주였다.
물론 한 큐에 연주해야 하는 실황의 특성상 오이스트라흐가 가끔 불안한 음정으로 연주하는 대목도 있지만-1악장 초반의 격렬한 솔로 파트 오프닝-, 이내 자신감을 되찾아 거침없고 도도한 연주로 대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한다. 콘드라신도 한껏 불타오르는 모습을 보여 주는데, 특히 1악장 관현악 파트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목인 8:46~9:15 부분은 메뉴힌+푸르트벵글러 콤비의 음반(EMI)과 함께 무척 매력적으로 연주되었다.
2악장을 시작하는 오보에 솔로는 러시아의 관악 파트 연주자들이 으레 그러듯 비브라토나 살짝살짝 꺾는 음정 등의 첨가로 꽤 달콤하게 연주됐는데, 그렇다고 너무 심하게 간드러지지도 않는 인상적인 소리였다. (노다메 칸타빌레에서도 소개되어 있듯이, 오보에는 주자에 따라 리드 깎는 법도 다르기 때문에 소리 편차가 꽤 큰 편이다.)
오이스트라흐도 질질 흘리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감정선을 적절히 통제하면서 나름대로의 칸타빌레 미학을 선보였다. 다만 바이올린 솔로의 대선율 역할을 하는 관악부의 움직임이 좀 해이해지는 경향이 보였는데, 악보 상의 실수는 아니지만 뭔가 유기적으로 얽히는 맛이 좀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빡빡한 일정 때문에 지친건 아닌지)
3악장에서는 콘비츠니 음반을 훨씬 능가하는 엄청난 기백을 선보였는데, 독주와 관현악의 조화 보다는 경합의 묘미를 즐기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연주였다. 콘드라신도 몇몇 대목에서 개성적인 면모를 드러냈는데, 바이올린 악구를 호른이 받는 부분에서 통상 연주보다 호른 소리를 더 키워서 대위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이 인상적이었다(2:02~2:07). 전체적으로는 중후함 보다는 야성미를 추구한 연주로 여겨졌는데, 호불호는 갈리지만 음악에 있어서 감정선을 중요시하는 나로서는 꽤 멋진 브람스로 생각되었다.
2부의 말러 9번. 이 연주는 알투스에서 CD로 발매할 때부터 엄청난 화제를 모은 것이었다. 지휘자마다 이 곡의 연주 태도가 천차만별인데, 번스타인과 암스테르담 콘서트허바우 관현악단의 실황 앨범(DG)이 1악장과 4악장만 합쳐도 1시간이나 될 정도로 질척함을 과시했는가 하면, 발터가 나치를 피해 프랑스로 이주하기 직전 빈 필과 만든 실황 앨범(EMI)은 오히려 다급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빠른 연주 시간으로 당시 상황의 절박함을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콘드라신의 경우에는 (그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전집에서도 느껴지는 것이지만) 대체로 템포가 상당히 빠르고 즉물적인 말러 연주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고, 더군다나 실황 연주라는 점 때문이었는지 그가 1964년에 녹음한 스튜디오 음반(멜로디아)보다도 훨씬 빠른 연주를 선보였다. 그 때문에 이 음반은 헤르만 셰르헨과 빈 교향악단의 녹음(1950) 다음으로 연주 시간이 빠른 음반으로 순위 변동을 일으켰다.
물론 연주 시간이 빠르다는 것이 그렇게 큰 장점 (혹은 단점)은 아니지만, 말러 음악의 격심한 감정 변화를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는 루바토(템포를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것) 외에도 다른 해결책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콘드라신의 말러 연주는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 콘드라신은 루바토 보다는 비교적 일관된 템포 설정으로 조급하다는 인상을 최대한 주지 않으려고 했고, 셈여림을 극단적으로 취급해 서구의 말러 연주와는 다른 류의 맛을 냈다.
1악장 같은 경우에는 팀파니 볼륨이 상당히 크게 설정되어 있었는데, 특히 트롬본들이 탐탐의 강한 일격과 함께 위협적인 악구를 내뱉은 직후 때려대는 팀파니 소리(15:45~15:49)는 내가 지금까지 들었던 말러 9번 녹음 중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이었다. 비교적 빠른 템포 속에서도 스트링은 허겁지겁 지나가지 않고 한 음 한 음을 공들여 켜고 있고, 덕분에 음들이 흐드러지는 현상을 최대한 피한 타이트한 연주를 선보일 수 있었다.
콘드라신의 말러 관은 쇼스타코비치의 그것과 유사한 대목도 많은데, 특히 2악장의 렌틀러와 3악장의 부를레스케는 그 신랄함이 유난히 강조되어 있어서 쇼스타코비치 음악을 듣는 것 같은 엄청난 의외성을 안겨주고 있다. (사실 쇼스타코비치 자신도 말러 음악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5번의 2악장만 들어 봐도 알 수 있다.) 특히 그 신랄함은 목관과 금관이 아주 멋지게 표현하고 있는데, 2악장에서 유난히 강조된 호른의 트릴이나 빠른 도약의 상승 악구가 그렇다. 아마 가장 뒤틀린 즐거움을 준 연주가 이 대목이 아니었을지.
3악장 같은 경우에는 날카로운 금관과 고음역에서 날아다니듯이 맴도는 피콜로나 E플랫 소클라리넷 등의 목관 파트 때문에 그 전투적인 성격이 더욱 강조되어 있는데, 템포 자체는 발터의 EMI 음반 보다는 약간 느리지만 느낌은 오히려 훨씬 빠르게 들린다. 하지만 교향곡 3번의 포스트호른 악구 인용부 등에서는 한숨 돌리고 지나가도 될 듯한데, 여기서도 콘드라신은 긴장의 고삐를 계속 조이고 있다.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그 긴장감에 도취되어 별 의미없이 지나갈 수도 있겠지만, 이 부분에 이르면 좀 듣기가 피곤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4악장에서는 바비롤리나 번스타인 만큼 절박하지는 않아도 스트링의 소위 '한숨 오프닝' 이 꽤 공들여서 표현되고 있는데, 활을 누르는 힘이나 비브라토가 적절히 안배되어 있어서 너무 절절해지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호른이 그 오프닝 악구를 받아 솔로로 나올 때가 인상적이었는데(1:59~2:13), 이 부분에서는 '호른이 오히려 감정 과잉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마치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 2악장의 유명한 호른 솔로를 듣는 느낌이었는데, 호른 솔로는 이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비브라토를 건 풍부한 연주를 종종 들려준다.
하지만 이 말러 연주에서 가장 큰 아킬레스 건으로 남는 대목도 이 4악장에 들어 있다. 중간부의 클라이맥스(12:12~12:55)는 많이 약하다는 인상이었고, 특히 트럼펫이 튀어나오기까지의 개연성이 많이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그 직후 스트링이 절박한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부분도 그렇게 인상적이지 않았는데, 이 부분은 아마도 콘드라신 자신의 책임이 아닌가 싶다. 적어도 그 해석에 있어서 일관성은 유지가 되었어야 했다.
이 대목만 빼면 4악장도 1악장과 마찬가지로 곡의 염세성을 살리되 너무 질퍽하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원칙이 그대로 지켜졌고, 마지막의 '죽는 듯이 고요하게 끝나는' 느낌은 조금 희생시키더라도 체념 보다는 의지를 강조한 연주로 여겨진다. 사회주의 사실주의에서 드러나는 '한없는 낙관성' 이 해석에 반영된 것인지, 아니면 콘드라신의 개인적인 해석관이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서방의 낭만적 말러관 보다는 훨씬 건강한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바로 이 녹음의 질이다. 모스크바 필의 도쿄 연주회 실황은 모두 NHK의 중계로 방송/녹음되었는데, 모두 스테레오 녹음이라는 점이 상당히 놀랍다. 당시 서방의 방송국들은 모노 녹음을 하고 있는 곳이 거의 대부분이었고, 스테레오 녹음기는 1967년 후반이나 1968년 초반에야 방송국에서 쓰이기 시작했다. (물론 영국의 BBC가 1959년에 야샤 호렌슈타인이 지휘한 말러 교향곡 8번을 스테레오로 중계/녹음한 사례가 있지만, 단발성으로 그쳤고 이후 다른 유럽 방송국들과 마찬가지로 모노 녹음 체계로 돌아가 버렸다)
다만 기술이 미흡했는지 아니면 기계나 테이프가 좀 상태가 안좋았는지, 곳곳에서 채널 정위가 맞지 않아 소리가 왼쪽이고 오른쪽이고 막 왔다갔다 하는 대목도 있다-예로 말러 9번 1악장 초반부-. 소리도 좀 탁한 감이 있는데, 음향 팀이 사전에 좀 꼼꼼히 체크했더라면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렇게 조기에 스테레오 방식을 채택한 덕분에 일본의 녹음 기술은 점점 서방을 무섭게 추격하기 시작했고, 결국 세계 최초의 디지털 녹음까지 하게 되는 성과도 거두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녹음은 음악적인 측면 외에도 이렇게 녹음 역사의 측면에서 나름대로 이정표를 세운 기록도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