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에는 유난히 작곡가의 탄생/서거 관련 이벤트가 많은 것 같다. 우선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이고, 슈만 서거 150주년이며 무엇보다 작곡가로서 나의 정신적 지주인 쇼스타코비치 탄생 100주년인 것이다. 세계 각국의 음악잡지들이 특집 기사를 내고, 음악인들은 기념 음악회나 음악제를 열면서 수수께끼같은 작곡가의 생애와 작품에 대해 다시 한번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쇼스타코비치와 관련된 가장 치열하고 (또 해묵은) 논쟁거리가 바로 그의 정치적 입장이다. 솔로몬 볼코프가 구술했다는 '증언' 을 보면 쇼스타코비치가 거의 무슨 민주화 투사인양 묘사되어 있고, 이것이 1980년대부터 쇼스타코비치를 서방에서 다시 보게 된 계기로 작용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두 번의 러시아 혁명을 주제로 한 네 곡의 교향곡-2번 '10월', 3번 '메이데이', 11번 '1905년' 과 12번 '1917년'-을 비롯해 스탈린을 낯뜨겁게 찬양한 오라토리오 '숲의 노래(훗날 스탈린에 관한 구절은 모두 삭제됨)' 등의 소위 '접대용' 작품도 여럿 만들었다.
또 레닌 훈장을 서훈받은 소련 인민예술가이자 작곡가동맹 의장을 역임한 경력도 있었고, 나름대로 애국심이 투철한 공산당원이었다. 게다가 쇼스타코비치와 친분이 두터웠던 영국 작곡가 브리튼도 공산주의자였음을 생각하면, 쇼스타코비치에 대해 그렇게 '우파 작곡가' 로 몰아붙이기만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는 않아 보인다.
쇼스타코비치는 10대 시절부터 고향인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중심으로 활발한 음악 활동을 펼쳤는데, 당시에는 혁명 초기라서 일종의 과도기 성격의 정세였고 예술 분야에서도 자율성이 보장되고 있었다. 스탈린 시절부터 주창되어 오던 것이 '사회주의 사실주의' 였다면, 이 때는 '사회주의 모더니즘' 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요즘 한유행 하는 밴드 프란츠 퍼디난트의 앨범 커버 디자인으로 패러디된 바 있는 알렉산드르 로드첸코의 서적 광고 포스터나, 무모할 정도로 거대한 스케일에 철근과 유리 등의 재질을 적극적으로 사용해 지금도 놀라움을 주는 블라디미르 타틀린의 '제 3인터내셔널 기념탑(일명 타틀린탑)' 프로젝트 등은 그 대표적인 예로 손꼽힌다.
음악 분야에서는 (비록 러시아 내에서는 아니더라도) 스트라빈스키가 발레 3부작인 '불새', '페트루슈카', '봄의 제전' 으로 러시아 전통과 모더니즘을 결합시키는 시도를 한 바 있으며, 모더니즘의 극한을 추구한 알렉산드르 모솔로프는 '철공소' 같은 작품으로 공장 등의 산업체 소음을 음악화 시키면서 기존의 패러다임에 도전하고 있었다.
이러한 여러 흐름들은 혁명의 열정과 맞물려 대단히 선동적인 '정치 예술' 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는데, 쇼스타코비치의 초기 음악도 이러한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 많다. 스트라빈스키나 모솔로프 만큼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작품에 현대적인 어법을 쓰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고, 이를 자신의 독특한 개성과 융합시켜 차별화 시켰다.
예를 들어 2번 교향곡에서는 의도적으로 혁명 전야의 혼돈을 묘사하기 위해, 바이올린 솔로로 시작되는 중간부에서 각각의 파트를 죄다 따로 놀게 만드는 극단적인 '레니에르나야 폴리포니' 기법을 사용했다. 발레 음악인 '황금 시대' 와 '볼트' 에서는 재즈의 영향을 받은 색소폰의 중용과 트롬본의 글리산도 주법, 그리고 극단적으로 시끄러운 불협화음을 간간히 사용해서 서정미와 유머를 얻고 있다. 특히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에서 '유머' 는 빠지지 않는 요소인데, 독특하게 뒤틀린 신랄함은 이미 이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하지만 무자비한 권력욕을 가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이러한 자유로운 예술 활동도 점차 제약을 받게 되었고, 쇼스타코비치의 후원자였던 투하체프스키 원수와 메이에르홀드 등이 처형 또는 암살되는 상황까지 가게 되자 결국 생존을 위해 초기의 날카롭고 전위적인 경향을 포기해 버렸던 것이다. 그 전환점이 된 것이 '혁명' 이라는 (잘못된) 제목으로 유명한 교향곡 5번이었고, 이후 초기의 작품들은 거의 모두가 소위 '반동적 성향' 이 짙다는 이유로 쇼스타코비치가 죽기 직전이었던 1970년대 중반까지 소련 내 공연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대략 작품 번호 40번 중반의 작품 까지가 초기의 작품으로 분류되는데, 이 시기의 쇼스타코비치는 네 곡의 교향곡과 두 곡의 오페라-'코' 와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피아노 소나타 제 1번과 첼로 소나타를 비롯해 여러 편의 영화 음악과 발레 음악, 극음악 등 무대 작품들을 창작했다. 이들 곡 중 이번에 다룰 곡이 바로 모음곡 '햄릿(Hamlet)' 이다.
쇼스타코비치가 친분을 맺고 있던 예술인들 중에는 당시 러시아 연극계에서 거의 '이단아' 취급을 받았던 연출가였던 니콜라이 아키모프(Nikolai Akimov)가 있었는데, 그는 신작 희곡 뿐 아니라 유명한 고전 작품까지 파격적으로 각색해서 무대에 올려 항상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1932년에 모스크바의 바흐탄고프 극장에서 제작한 연출가 데뷰작 '햄릿' 도 그러했는데,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라면서 고뇌하기는 커녕 선왕의 유령을 속임수로 만들어 내는 지독한 주정꾼 햄릿을 본 관객들은 열광적으로 웃어제끼던지, 아니면 화를 내며 야유를 퍼붓든지 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극에서 가장 정숙한 여성 캐릭터인 오필리아까지도 알콜 중독자로 묘사되었고-물론 술에 취한 채로 발을 헛디뎌 익사하는 것으로 각색되었음-, 한술 더 떠 극중 제일 애매한 캐릭터인 폴로니어스 역은 당대의 유명한 연극인인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어리석은 면을 패러디해 재구성하는 등 거침없는 모습이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희곡에 사용하기 위해 부수음악(작품 32)을 작곡했고, 이어 13곡으로 이루어진 모음곡(작품 32-1)을 추려냈다. 이 모음곡은 1960년에야 출판되었는데, 그나마 쇼스타코비치의 초기 작품 중에는 비교적 빠르게 복권된 곡이었다.
비극 분위기가 거의 거세된 작품에 쓰기 위해 만든 만큼 전곡에 쇼스타코비치 특유의 아이러니와 풍자가 가득한데, 특히 '오필리아의 노래(9)' 나 '포틴브라스의 행진곡(13)' 같은 대목에서 두드러진다. 전자는 구시대의 오페라 아리아 스타일을 패러디했는데, 모음곡판에서는 클라리넷이 노래를 대신해서 조금 경박하게 불도록 했다. 후자는 행진곡 특유의 위엄은 간신히 유지하고 있지만 뭔가 이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을 주기 위해 생경스러운 코드 진행을 사용했는데, 이 코드 진행법은 훗날 교향곡 5번을 비롯한 많은 작품의 코다로 응용되었다.
그리고 쇼스타코비치가 특히 좋아했던 서커스풍 음악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는데, 같은 소재를 공유하고 있는 '배우들의 무언극(5)' 과 '연회(8)' 에서는 오펜바흐의 캉캉을 연상시킬 정도로 활기차다. 그나마 비극적인 대목은 '장송 행진곡(2)' 과 '레퀴엠(11)' 이 전부인데, 후자의 경우에는 베를리오즈나 생상 등이 그랬듯이 그레고리오 성가의 '분노의 날(Dies irae)' 을 초반부에 인용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뱀다리로, 쇼스타코비치는 1964년에 그리고리 코진체프가 감독한 영화인 또다른 '햄릿' 을 위해 새로운 부수음악(작품 116)을 작곡했다. 아키모프에 비해 코진체프는 전통을 존중하는 보수적인 타입이었고, 쇼스타코비치도 그에 맞게 비극적인 색채가 짙은 음악들을 붙였다. 하지만 1932년의 음악도 몇 곡 차용했는데, 모음곡에서는 '서주와 야경꾼(1)' 과 '장송 행진곡' 이 그 예이다.
하지만 아키모프의 연출작도, 그리고 쇼스타코비치의 음악도 다른 전위 예술이 마찬가지였듯 당의 호된 비판을 받아야 했고 훗날 소련 연극사와 음악사에서 의도적으로 삭제되거나 축소되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1960년의 모음곡도 그냥 '여흥 음악' 정도로만 평가되었으며 (물론 그렇게 평가받도록 당에서 손을 썼다) 그 배경에 관해서는 작곡가와 연출가를 제외하면 아무도 언급하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탓인지 지금도 이 모음곡은 쇼스타코비치 작품 중 연주 횟수가 뜸한 케이스인데, 온전한 모음곡 전곡을 담은 음반은 불과 네 종류가 전부다. 그 중 그나마 구하기 쉬운 것은 두 종류인데,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네메 예르비가 지휘한 예테보리 교향악단의 연주(도이체 그라모폰)다. 신랄함이 다소 부족하다는 느낌은 들지만, 소련 출신 지휘자답게 곡의 성격을 잘 파악한 연주다.
ⓟ 1998 Deutsche Grammophon GmbH
쇼스타코비치에게 극음악과 영화 음악, 발레, 오페라 등의 무대 음악은 영광과 굴욕을 동시에 가져다 준 장르였는데, 대체로 굴욕이 많았음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 '굴욕' 은 작품성이 떨어져서가 아니며, 그가 관여한 극 작품들이 전위적인 색채가 짙은 것이어서 일종의 '문제작' 취급을 받았기 때문일 뿐이다. 오히려 이들 작품에서는 쇼스타코비치의 뛰어난 처세와 보신술-특히 영화 음악의 경우가 그러하다-을 엿볼 수 있고, 중기와 후기 작품에서는 보기 힘든 경쾌하고 발랄한 면모가 듬뿍 배어 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쇼스타코비치 연구자들과 매니아들에게 매우 중요한 자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