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말하는 발라드는 가요 발라드가 아니라, 서사적인 내용의 가사로 된 일종의 가곡임.
관현악을 주로 듣는 나로서는 실내악이나 독주곡, 가곡 분야에서 미답의 경지가 상당히 많다. 클래식을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했을 때부터 관현악 위주로 청취하던 버릇 때문일까? 아니면 크고 빵빵한 것을 좋아하는 '거대증(grandiosomania)' 환자라서 그런 걸까? 어쨌든 위의 것들을 듣기 시작한 지는 채 4년도 안되었고, 그나마 애청하는 레퍼토리의 숫자도 매우 적다.
가곡 분야를 따지자면 슈베르트의 3대 연가곡집 중 '아름다운 물레방앗간의 아가씨' 와 '겨울나그네', 슈만의 '여인의 사랑과 생애' 와 '시인의 사랑' 정도가 그나마 유명한 곡들 축에서 종종 듣는 정도다. 하지만 개중에는 정말 전공자만 알거나, 심지어 전공자들도 잘 모르는 레퍼토리가 위의 곡들보다 더 자주 오디오를 타고 나올 때가 많다.
뢰베(Carl Loewe, 1796-1869)의 발라드 같은 경우도 그러한데, 학교 다닐 때 성악과 학생 한 명이 '피츠너(Hans Pfitzner)나 뢰베의 곡도 많이 불려지지 않을 뿐이지 꽤 괜찮다' 고 말하는 것을 듣고 호기심에 음반을 구하러 다녀 보았다. 하지만 그 학생의 말대로 많이 불려지지 않아서 그런지 음반도 찾기가 힘들었다.
그러다가 회현 지하상가에서 EMI CD들을 떨이로 팔던 곳을 찾아가 보니 한 장이 나왔다. 그래서 피츠너의 가곡 CD와 함께 구입해 왔다. (여담으로 피츠너 CD는 그 며칠 뒤 다른 성악과 학생이 음반이 없다고 빌려달라고 해서 빌려주기도 했다.) 피츠너의 경우에는 이미 전설이 되어 있는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가 불러서 구입할 때 별 망설임이 없었지만, 뢰베의 CD는 그 당시로서는 정말 생소한 인물이 노래를 하고 있었다.
ⓟ 1989 EMI Electrola GmbH
바로 토마스 크바스토프(Thomas Quasthoff)였는데, 한참 뒤에 그가 RCA와 도이체 그라모폰 등에 음반을 내면서 주목받기 시작했을 때 해표상지증-영어로는 탈리도마이드 베이비-의 희생자임을 알고 꽤 놀랐었다. 물론 음반 속지에 그의 이력이 나와 있기는 했지만, 그까이꺼 그냥 대~충 읽고 넘겼을 뿐이었다. 앨범 커버에 찍힌 사진도 소위 '바스트 샷' 으로만 되어 있어서 그 충격이 배가 된 것 같다.
구입한 앨범은 크바스토프가 1989년, 그러니까 30세라는 젊은 나이에 메이저 음반사에서 처음으로 취입한 솔로 앨범이었다. 크바스토프는 그 전년도였던 1988년에 독일 방송 협회 주최로 뮌헨에서 열린 성악 콩쿨에서 심사위원 전원의 만장일치로 1등을 거머쥐었는데, 그것이 기회가 되어 녹음한 것이었다.
물론 크바스토프는 녹음 당시 완전 초짜 성악가는 아니었다.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 와 바흐와 모차르트의 종교 음악으로 독일 뿐 아니라 유럽 각지에서 연주회를 열고 있었고, 라이만 같은 현대 작곡가들이 그를 위해 곡을 써줄 정도였다. 독일 음악 평론계의 대부인 요아힘 카이저도 1988년에 뮌헨에서 크바스토프가 '겨울나그네' 로 연 리사이틀에 참석한 뒤 호평을 해준 바 있었다.
요즘 나오는 앨범들 만큼은 아니겠지만, 아직 풋풋한 시절의 크바스토프가 보여주는 표현력도 장난이 아니었다. 독일어에 거의 젬병인 나이기는 해도, '마왕' 같은 작품-슈베르트의 명곡과 마찬가지로 괴테의 시에 곡을 붙인 것임-에서 화자를 다르게 하기 위해 목소리의 톤 컬러를 종횡무진 바꿔 나가거나 '뇌크' 에서 보여준 소박한 서정미, '오딘의 바다 기행' 후반부에서 보여지는 강인한 면모는 그가 휘슈-호터-디스카우로 이어지는 독일 가곡의 명연주가 대열에 일찌감치 끼고도 남을 거라는 생각까지 들게 했었다.
크바스토프를 서포트해준 반주자는 미국 출신의 노먼 셔틀러(Norman Shetler)였다. 빈 음악원을 졸업하고 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물인데, 그 또한 훌륭한 반주자임을 증명해 보였다. '슈베르트보다는 독창성이 떨어지는 작곡가' 로 항상 2등 신세였던 뢰베의 작품을 이 정도로 듣기 좋게 만든 두 콤비에게 박수를.
저 CD는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카탈로그에 살아 있었는데, 지금은 애석하게도 폐반된 상태다. 독일 현지에서도 아직 재발매 계획은 없는 듯하고, 저렇게 발로 뛰며 찾는 수밖에 없을 듯. 크바스토프라는 성악가를 아는 데 중요한 앨범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하루 속히 염가판으로라도 재발매 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