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인터뷰에 밝혔듯, 내가 대중음악을 '제대로-이 경우에는 음반을 사서 듣는 것을 의미-' 듣게 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 넥스트 라이브 앨범이 처음이었다. 거기서 계속 가지를 치면서 듣게 된 것이 전람회/김동률, 유재하, 015B(2집 때까지) 등이었고, 지금도 그 취향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단, 비트겐슈타인 이후의 신해철 음악은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신해철이 GMV(지구촌영상음악)라는 잡지에 연재했다는 음악 에세이를 구하기 위해 서울의 많은 헌책방을 전전하면서 과월호를 구하고 스크랩을 하면서 고등학교 생활을 했을 정도였는데, 그 과정에서 다른 음악들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다른 음악들' 중에는 고려인 3세 빅토르 초이(Viktor Tsoy, 1962-1990)가 리더였던 러시아 록 그룹 '키노' 도 있었다. '러시아의 비틀즈' 라고 불러도 부족하다고 할 정도로 후기 소련에서 하나의 신화가 되어 있었던 그룹이라고 한다.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소련에서도 소위 '대중음악인' 에 대한 당과 정부의 '참견' 이 극심했는데, 2차대전 이전에는 기껏해야 붉은 군대 합창단이 노래하는 러시아 민요 정도가 '공인되어' 있었다.
전후 불라트 오쿠자바라는 싱어송라이터가 등장하면서 정말 '대중음악' 이라고 할 수 있는 노래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반체제 인사로 낙인찍혀 한 장의 공식 앨범도 내지 못했던 음유시인 블라디미르 비소츠키가 뒤를 이었다. 특히 비소츠키는 진솔한 감정이 담긴 자작시를 걸쭉하고 격정적인 특유의 음성으로 낭창해서 젊은이들을 사로잡은, 진정한 의미의 첫 번째 '스타' 였다.
키노는 위의 두 대가들이 주로 포크송과 러시안 로망스의 결합이라는 형태로 확립시킨 러시아식 대중음악을 락 영역으로까지 넓힌 음악인들 중 가장 걸출한 그룹이었는데, 보컬이었던 빅토르 초이의 백 밴드라고 해도 될 만큼 그의 영향력이 지대했다고 한다. 키노의 모든 노래는 빅토르 초이가 작사/작곡한 것이고, 밑에도 쓰겠지만 그가 죽은 뒤 그룹도 자동으로 해산되었을 정도였다.
1990년에 빅토르 초이가 자신의 뿌리 중 한 곳인 한국 공연을 몇 달 남겨둔 채 교통사고로 요절한 뒤 국내에서 소설도 나오는 등 한 차례 열풍이 불었는데, 언어 상의 문제와 감성의 차이 등의 이유 때문인지 지금은 그 관심이 가라앉아 있는 것 같다. 물론 윤도현이 '혈액형' 이라는 노래를 번안해 부르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음반 자체를 구하기가 무척 힘든 상황이라서 더욱 문제다.
신해철의 음악 에세이가 들어 있던 GMV는 대부분 90년대 중반에 나온 것들이라 한참 뒷북을 치면서 과월호를 모은 셈이었는데, 키노라는 그룹도 당연히 뒤늦게 호기심이 든지라 앨범을 구하기도 쉽지가 않았다. 그나마 종로에서 구입한 카세트 테이프 두 개가 전부였는데, 그것도 한 쪽 구석에서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채로 방치되어 있던 것이었다. 소리가 전혀 손상되지 않은 것이 그런대로 다행이었다.
하나는 컴필레이션 앨범이었고, 하나는 '이것은 사랑이 아냐' 라는 공식 앨범(1985)이었는데, 둘 중에서 자주 듣는 것은 후자의 것이었다. 그나마 그 '자주' 라는 빈도는 한국 가요 앨범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것이었다. 그들의 음악에 친숙해지기까지는 대단히 오랜 시간이 걸려야 했다.
소위 '선진국' 에 비할 바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나름대로 최신 장비를 써서 음악을 만드는 한국 대중가요를 듣다가 저 그룹의 곡을 들으니 굉장한 괴리감이 우선 느껴졌다. 막말로 '소리가 너무 촌스러웠던' 것이다. 게다가 가사도 키릴 문자-아직도 읽을 수 있는 글자는 몇 개 안된다-여서 노래 내용도 알 수가 없었다. 단지 분위기를 척도로 그 노래의 심상을 넘겨짚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인터넷이라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매우 유용한 사이트를 하나 찾을 수 있었다. 게다가 한국어 사이트였다. 외대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하면서 키노의 음악에 빠졌다는 사람이 만든 것인데, 접할 당시 전부는 아니더라도 상당 수의 노래들이 러시아어 원문과 번역본으로 게재되어 있었고 모든 앨범의 MP3가 제공되고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MP3 파일들은 서버 공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삭제됨)
그 곳에서 비정규반인 '46' 과 라이브 앨범을 제외한 모든 공식 앨범을 들어볼 수 있었고, 또 노래가 대충 어떠한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지도 알 수 있었다. 우리 나라와는 달리 각각의 정규 앨범들에 기존 곡이 섞여 있는 경우가 많았지만, 대부분 새로이 리메이크 되어 실려있어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특히 '마지막 영웅' 이라는 노래는 후기로 갈 수록 소리도 세련되어지고 느낌도 달라지고 있다.
무겁고 난해한 분위기의 후기 앨범들 보다는 위에 쓴 대로 '이것은 사랑이 아냐' 앨범 전후의 곡들을 즐겨듣고 있는데, '혈액형', '마지막 영웅', '봄' 과 '파도의 노래' 네 곡이 대표적인 애청곡들이다. 전자의 두 곡은 군가 풍의 가사를 비롯해 체념 혹은 비장감을 불러 일으키는 곡이고, 후자의 두 곡은 낙천적인 성격의 노래들이다.
가사가 해당 사이트에 번역되어 있으니 특별히 더 뱀다리를 달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떤 가사는 이해하기 힘들거나 이해할 수 없었고, 어떤 가사는 일견 유치해 보이는 젊은이들의 푸념이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그들이 무엇을 노래하고 이야기하고자 하는 지는 대충 파악된다. 처음 접했을 때는 그 질박함이 당혹스러울 정도였지만, 요즘에는 오히려 넘쳐 나는 '히트 송' 들보다도 더 애착이 가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