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에 집단장을 새로 하면서 DVD 콤보도 마련했는데, 막상 DVD 소프트웨어를 사본 적이 없어서 거의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일반 비디오 테이프와 달리 코드라는 것이 있어서 함부로 샀다가는 낭패를 본다는 것이었다. (물론 코드프리를 쉽게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을 안한다는 가정 하에서)
다행히 전세계 어느 곳에서든 돌릴 수 있는 코드 0의 DVD 소프트들도 있었고, 지난 달에 13일 동안 알바했던 돈으로 첫 DVD 타이틀을 장만할 수 있었다. 뉴타입 부록으로 딸려 나오던 것들을 제외하면 처음으로 산 DVD이기도 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줘봤니돈 조반니' 인데, 예전에 NHK 위성이 나올 때 잠깐 볼 수 있었던 영상물이었다. 1954년 잘츠부르크 음악제 때 녹화/녹음한 것으로, 당시 음악제의 대부 격이었던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만든 유일한 오페라 전곡 영상물이다.
푸르트벵글러는 제 3제국 초반부터 심기를 건드렸던 카라얀과 죽을 때까지 원수 지간으로 지냈는데, 전후 카라얀이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출연하게 되자 푸르트벵글러는 이에 반대하면서 음악제 측과 독점 출연 계약까지 체결하는 등, 카라얀을 들여 보내지 않으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카라얀은 1947년의 몇 회 이후 1954년까지 한 번도 잘츠부르크에 발을 붙이지도 못했고, 푸르트벵글러의 오페라 녹음이 잘츠부르크에서 많이 제작/보존되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독일어판)' 과 베르디의 '오텔로', 베버의 '마탄의 사수' 는 푸르트벵글러가 남긴 유일한 전곡 녹음들이다.
푸르트벵글러의 상성에 가장 알맞은 모차르트 오페라였던 권선징악형 비극 '돈 조반니' 는 이 영상물까지 합하면 모두 네 종류의 전곡 녹음이 존재하고, 모두 잘츠부르크에서 공연된 것들이다. 1954년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후반기에 녹음된-녹화는 아직 아님. 밑 문단 참조-이 영상물에는 여러 에피소드들이 얽혀 있기도 하다.
당시 음악 영상물들은 제작에 많은 애로 사항이 뒤따랐는데, 요즘처럼 영상과 사운드트랙을 동시에 채록하는 방식이 아니라서 더더욱 그랬다. 일단 영상물용 녹음을 먼저 한 뒤, 거기에 연주자나 가수들이 입과 몸짓을 맞추는 '립싱크' 를 덧붙이는 식의 플레이백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클래식 아티스트로는 뮤직 비디오를 가장 많이 만든 카라얀도 이러한 방식으로 대부분의 영상물을 만들었다.
이 영상물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제작되었는데, 8월 23-27일 중 어느 하룻동안 사운드트랙용 특별 녹음이 청중 없는 홀에서 진행되었고, 영상은 10월에 사운드트랙에 맞춰서 별도로 제작되었다. 단, 서곡만은 당시로는 드물게 영상과 녹음이 동시에 수록되었다고 한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고, 후반에 가면 푸르트벵글러의 앞모습이 잡히는 컷의 속도를 인위적으로 조정해 싱크를 맞추는 등 안하무인성 편집까지 나온다. 카메라 워킹도 무척 단순해서 지휘자의 앞과 뒤밖에 찍지 않았고.
하지만 영상 전체를 컬러로 잡은 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이례적이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나 '벤허' 같은 고전 영화들처럼 굉장히 고색창연하고 답답한 톤이기는 해도, 1960년대까지 이러한 영상물이 흑백으로밖에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귀중한 자료인 셈이다. 영상물 감독은 파울 치너가 맡았는데, 2차대전 이전의 독일 영화사에서 '꿈꾸는 입술(1932)' 로 거론되고 있는 인물이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원작을 완전히 재해석해 조반니와 레포렐로 콤비를 폭력배로 둔갑시킨 피터 셀라스의 현대적인 연출과는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제작되었는데, 무대 세팅부터 분장까지 모두 '보수적인 오페라 팬들이 납득할 만한' 방식으로 설정되어 있다.
기사장(Commendatore)이 초반에 조반니의 칼에 절명한 뒤 3막에서 석상으로 나오는 것도 원 설정과 똑같고-셀라스의 연출에서는 석상 대신 좀비로 대체됨-, 여성 가수들은 노래하기도 답답할 것 같은 코르셋 차림-물론 개미 허리마냥 꽉 조인 것은 아니지만-으로 연기한다. 주인공 조반니도 쫄바지 차림으로 무대를 돌아다니며 여성 캐릭터들에게 페로몬을 뿌리고 다닌다.
당시 빈 오페라계는 요즘처럼 '노래는 잘하지만 못생기고 뚱뚱해서 출연을 보류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돈 오타비오 역을 맡은 안톤 데르모타가 '매일 기름기도 없는 건조 야채를 수프로 끓여먹었다' 고 증언했듯, 전후의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았던 탓에 남녀 가수들이 대부분 '가수답지 않은 체격' 이었다. 특히 여가수들의 미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이 영상물에서는 좀 살이 붙어서 나오지만, 돈나 엘비라 역의 리사 델라 카사는 이후 오페라 무대에서 스타로 발돋움했다. 심지어 제작 당시 50세였던 체를리나 역의 에르나 베르거-푸르트벵글러가 가장 선호했던 소프라노-도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활달한 시골 처녀를 훌륭히 연기하고 있다. 주인공 돈 조반니 역의 체사레 시에피도 날씬한 몸매와 약간 각진 얼굴로 호색한다운 배역을 소화했다.
*사실 돈나 엘비라 역에는 영상물 제작 전인 8월 3일 공연에서도 노래했던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를 그대로 기용하려고 했지만, 단지 녹음 제작 초반에만 참여했을 뿐이라고 한다. 푸르트벵글러 디스코그래피 전문 연구가인 존 헌트는 이 때 제작된 사운드트랙 일부가 남아 있다고 하며, EMI에서 그것으로 추정되는 녹음이 '미발표 레코딩' 으로 나오기도 했다.
물론 50년 전의 녹화/녹음인 만큼, 요즘 관점으로 보면 너무 '오버 액션' 풍의 연기나 노래도 종종 나온다. 여자 가수들은 대체로 절제된 노래를 들려 주지만, 남자 가수들이 좀 구태의연한 노래를 종종 선보인다. 당시 모차르트 전문 테너로 유명했던 데르모타의 아리아도 요즘 관점에서는 '버터도령' 으로 치부될 수도 있고, 가장 긴박한 장면인 조반니와 기사장의 싸움은 오히려 웃음이 나올 정도로 인위적이다. (어떻게 칼에 찔렸는데도 피 한방울 안난다는 말인가 'w'a;;;)
이렇게 '시대의 흐름' 에 휩쓸려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 DVD를 국내에서 구하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신나라레코드 체인, 뮤직랜드, 풍월당, 핫트랙스 등 거의 모든 대형 매장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단지 용산 전자랜드 1층의 예인사에 딱 하나 꽂혀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내가 사왔으니 거기도 재고가 없을 듯)
5.1채널 포맷이 기본인 판에 모노 사운드와 어두침침한 초기 컬러 화상으로 3시간 가까이나 되는 오페라 전곡을 보기에 요즘 사람들의 귀와 눈이 너무 고급화가 된건지, 아니면 내가 구태의연한 감식안 소유자라 그런지는 모르겠다. 약간 느끼하고 우스꽝스럽더라도 '옛 거장들의 예술혼' 을 느낄 것인가, 아니면 최신의 연주와 연출이 담긴 다른 타이틀을 구입할 것인지는 감상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