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청곡선 5편에 등장한 아쿠타가와 야스시의 '나의 음악 이야기' 라는 책을 보면, 니키카이 오페라단과 함께 일본 2대 오페라단인 '후지와라 오페라단' 의 창설자이기도 한 테너 가수 후지와라와 열차 식당칸에서 나눈 대화가 수록되어 있다.
"나는 전세계를 돌아다녔는데, 식당차에 자기 나라 요리가 나오지 않는 나라는 거의 없어요. (중략) 맛있는 술과 맛있는 요리가 있는 곳에는 또 반드시 좋은 음악이 있는 법입니다."
이 대화 뒤에 아쿠타가와는 그 동안 일본에서 진행된 '새로운 일본의 음악' 에 대한 접근 방식을 비판했다. 놀랍게도 그 비판 대상으로 꼽은 곡이 바로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 였는데, 선율 자체가 일본의 '가가쿠(아악)' 에서 따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서양인인 프란츠 에케르트가 억지로 붙인 코드를 합주용으로 쓴다는 것이 주된 지적이었다.
물론 선율에서 아예 민족성이라고는 없는 찬송가 풍의 '애국가' 를 줄기차게 부르는 한국이라는 나라와는 아예 비교가 되지도 못한다. 물론 전세계 국가들 중 민족성 없는 서양 스타일의 곡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 나라를 상징하는 노래라고 한다면 그 나라의 음악 재료를 쓰는 것이 당연하다고 본다.
'새로운 한국의 음악' 이 다행스럽게도 80년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그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은 그나마 반가운 소식이다. 예전까지는 성역이었던 '뽕짝', '친일 음악인', 그리고 '애국가의 민족성' 에 대한 논쟁이 수면으로 떠오른 것도 그 때였고, 월북 음악인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도 80년대 후반에 와서 였다.
월북 음악인들 중 작곡가로서 가장 부각된 두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김순남과 이건우였다. 이 둘은 해방 직후부터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 주었고, 각기 두 편의 가곡집을 비롯해 교향곡과 교향시 등의 대규모 작품까지 작곡하는 등 좌익/민족주의 진영의 음악인들 중 가장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하지만 좌익에 대해 소탕 위주의 정책으로 일관한 미군정과, 그 뒤를 이어 등장한 대한민국 정부는 이들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좌익/민족주의 진영의 음악회장에 테러가 횡행했고, 체포령의 발동으로 지하에서 숨어 살던 때가 그 시절이었다. 물론 이러한 정책으로 우익/친일계 음악인들은 단숨에 '민족음악가' 라는 말도 안되는 지위에 올라갔고, 이들은 라이벌들의 역사를 묻어버리기에 바빴다.
김순남과 이건우는 흔히 헝가리의 버르토크와 코다이에 비교되는데, 이건우가 서양 음악의 요소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가락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살리려고 고심한 반면, 김순남은 더욱 근원적인 것에 접근하고 전위적인 경향까지 보인 작곡가였다.
김순남(1917-1983?)은 현재 낙원상가가 자리잡고 있는 서울 종로구 낙원동에서 태어났고, 불과 15세 때인 1932년에 경성사범학교-현 서울대학교 교육대학-에 입학했다. 이 곳에서 그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하고 학교의 취주악단을 지휘하는 등 일찍부터 재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졸업 후 몇 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20세 때인 1937년 일본으로 유학, 시모후사 간이치와 하라 타로 등에게 작곡을 배웠다.
일본 유학 중에 김순남은 조선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일본 현대작곡가 연맹 창립 10주년 기념 연주회' 에서 작품-피아노 소나타 제 1번을 발표하기도 했고, 하라 타로의 영향은 그가 점차 민족적인 것으로 작풍을 바꾸어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1942년에 일본에서 돌아온 뒤, 김순남은 관제 음악 단체인 조선음악협회에 가입하는 한편, 비밀 음악 모임인 '성연회' 를 조직하기도 했다. 해방 직전까지 작곡도 계속 했고, 두 번째 피아노 소나타와 피아노 3중주 제 1번, 결혼식 때 쓰기 위해 작곡했다는 피아노 3중주 '결혼', 민요풍 기악곡과 몇 편의 가곡 등을 썼다.
해방 후 김순남은 조선음악가동맹에 가입해 좌익/민족 계열 음악인으로 입지를 굳혔고, '해방의 노래', '인민항쟁가' 등을 비롯한 해방가요를 작곡하는 한 편, 위에 쓴 것처럼 두 편의 가곡집과 교향곡 제 1번, 피아노 협주곡, 교향곡 '태양없는 땅' 같은 대작을 작곡했다. 또 미군정 당국에서 예외적으로 그에게 호감을 보였던 엘리 하이모비츠라는 피아니스트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좌익 인사들은 모두 체포령의 적용 대상이 되었고, 김순남도 이 해에 결국 북한으로 넘어갔다. 북한에서는 조선음악가동맹 부위원장과 평양음악대학-현 평양음악무용대학-의 작곡 교수 등을 역임하는 한편, 한반도 최초의 본격적 오페라인 '인민유격대' 와 오라토리오 '승리', 서곡 '영웅 김창걸' 등을 작곡해 화제가 되었다.
6.25가 아직 끝나지 않았던 1952년에는 러시아에 유학해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에 들어 갔는데, 여기서 당시 소련 3대 작곡가 중 한 사람인 아람 하차투리안에게 배울 수 있었다. 하차투리안은 김순남의 '조선 빨치산의 노래' 를 편곡해 주는 등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는데, 1953년 갑자기 소환 명령을 받고 급히 귀국했다.
귀국한 김순남은 패전의 책임을 떠안은 남로당 인사들과 함께 강도 높은 비판에 노출되었고, 결국 1958년에 창작 권리를 박탈당하고 함경남도 신포로 이주당하게 되었다. 창작 권리를 되찾은 것은 1960년대 중반이었고, 이 때 교성곡 '남녘의 원한을 잊지 말아라' 와 바이올린 독주곡 '이른 봄' 등을 작곡하고 함경남도 일대의 민요들을 비롯한 전통음악을 채보하기도 했다.
하지만 60년대 후반부터 김순남은 지병인 결핵으로 크게 활동이 위축되었고, 평양과 함경남도 일대의 결핵 요양소를 전전하는 비참한 삶을 영위해야 했다. 게다가 70년대부터 김정일의 '음악예술론' 이 적용되면서 김순남의 이름은 모든 '공식적인' 자료와 석상에서 언급되지 않게 되었다. 월북 후 그의 생애는 많은 부분이 모호한데, 그나마 음악학자 노동은이 1990년 범민족통일음악회 참석 차 방북하면서 비공식적이고 단편적이나마 알아낼 수 있었다.
월북 전에 작곡된 김순남의 기악곡 중 유일하게 악보가 남아 있는 것이 바로 1947년 경 작곡된 피아노 협주곡 D조다. 여기서 'D조' 는 전통적인 서양식의 'D장조/D단조' 가 아니고, 단지 D(레)음을 중심으로 한 것을 뜻한다. 그나마 악보는 하이모비츠에게 주기 위해 급히 사보한 1악장-관현악 파트도 피아노로 사보됨-과 2악장의 첫머리 뿐이다. 게다가 미처 다듬지 못한 흔적까지 있다.
사실 미완성 작품의 연주는 항상 '작곡가의 의도를 살리기 보다는 영원한 모호함에 남겨두는 것' 이라는 비판을 받기 마련인데, 김순남의 피아노 협주곡은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 곡은 남북을 통틀어 최초로 작곡이 시도된 협주곡이라는 점에서 대단한 가치가 있다. (마찬가지로 김순남의 교향곡 제 1번도 한반도 최초의 교향곡이지만, 이 곡은 단편적인 악보 조차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곡을 처음 들었던 때가 바로 민족음악연구회의 홈페이지에 접속하면서였는데, 정말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서양식 쓰리코드를 거의 배제하고 2도-예로 도~레-나 4도-예로 도~파-등의 화음을 사용하는 등 '민족 화성' 에 대한 탐구를 비롯해 5음 음계에 얽매이지 않고도 민족성을 살린 가락 등은 최근의 비슷한 유형의 작품들 보다도 한 발 앞서 나간 시도였다.
김순남 자신이 연마된 피아니스트임을 증명하듯, 독주 파트는 꽤 어렵게 쓰여져 있다. 김순남은 심지어 그의 가곡 '바다' 와 '상렬' 에서 일반적인 가곡 반주의 차원을 뛰어넘어 거의 관현악의 경지에 이르는 작법을 보여 주기도 했고, 음이 고정된 탓에 농현이나 시김새 등을 표현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피아노라는 악기로도 얼마든지 민족성을 표출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 완성된 악보가 존재한다면 버르토크 등 서양 작곡가들의 강한 영향과 민족성에 대한 자각이 만들어낸 작품으로 그 가치를 드높일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이것 뿐이다. 최승희나 한설야 등이 복권되는 시점이므로, 그의 최후 거처였던 북한에서 김순남이 복권되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겠지만, 워낙 철저하게 매장된 탓에 복권되더라도 그의 악보나 원고 등이 발견되리라는 예상을 하기도 쉽지가 않다.
ⓟ 1995 Korean Broadcasting System
이 곡은 KBS에서 제작해 온 CD 시리즈 중 '한국의 작곡가' 2집에 첫 곡으로 들어 있는데, 그 CD는 아쉽게도 오래 전에 폐반된 상태다. 그리고 이 곡을 작곡가 이건용이 분석한 것이 민족음악연구회의 두 번째 회지에 실려 있으므로, 더욱 전문적인 정보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열람해 보는 것도 좋을 듯.
*덧붙여, 이 곡의 첫 주제는 애청곡선 15편에 있는 김대성의 '뜰모리' 에도 제 2주제로 쓰인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