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동북공정' 때문에 중국에 대한 시각이 갈수록 안좋아지고 있는데, 심지어 내가 자주 가는 모 사이트에서는 '나는 인종차별주의자다. 중국인들이 밉다. 난 공산당이 싫어요.' 라고 아주 웃기는 글을 당당히 써놓는 사람까지 등장하고 있다.
물론 내가 '죄를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는 말라' 라던가 하는 말을 실천할 정도의 성인 군자도 아니고, 특정 국가에 편견을 가지지 않는 '사랑이 넘치는' 인간도 아닌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싫어하려면 혼자 독백으로 해야지, 저렇게 대놓고 '커밍 아웃' 을 하는 것은 곧 자신이 히틀러 등에 버금가는 존재라는 것을 과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모든 중국인들이 동북공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알고 있다고 해도 그러한 흐름에 100%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나라면 차라리 저렇게 '스테레오타입' 을 시키기 전에, 한국 외교부와 역사학계의 밍기적거리는 자세를 우선 받아칠 것이다.
어쨌든, 이 시기에 하필이면 중국 작곡가의 작품이 이번 시리즈에 걸렸다. 물론 위의 화상처럼 '중국인과 공산당' 에 천부적인 거부감이 있는 분이라면, 지금 당장 '뒤로' 버튼을 클릭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작곡가 김대성씨는 요즘 대세를 차지하고 있는 중국 음악에 대해 '청 왕조 시대에 크게 변질된 것들' 이라고 간단히 정의를 내렸다. 흔히 '경박스럽다 싶을 정도' 의 역동성을 자랑하는 요소는 한족 보다는 만주족의 것이라는 이야기였는데, 중국에서 들어온 '당악' 도 그러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것이라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중국은 현재 한족 외에도 조선족, 몽고족, 짱족(티베트), 후이족, 좡족 등 수십 여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 이며, 이들 음악의 유입과 동화 작용은 거의 필연적인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중국 내부에서도 이러한 전통 음악의 흐름에 무비판적인 것도 아니며, 이미 1950년대부터 민요의 수집과 고악보 연구 등을 국가 차원에서 행하고 있다.
중국의 여러 작곡가들도 중원 외의 지역에서 소재를 찾고 있는데, 딩 샨더는 북서부의 신장웨이우얼(위구르)자치구의 민속 음악에서 힌트를 얻어 '두 곡의 신장 춤곡' 과 '신장 민요 주제에 의한 변주곡' 등의 작품을 발표한 바 있다. 조선족 작곡가인 장천일도 '북방의 삼림' 등의 작품에서 한반도 전통 음악의 소재를 활용하고 있다.
이번에 소개할 왕 시린(王西麟, 1937-)은 중국 남서부의 윈난성에서 수집한 민속 음악을 토대로 교향 모음곡 '윈난의 정경' 을 작곡했다. 왕 시린은 현재 카이펑 태생이라는 것만이 알려져 있는데, 최근에도 중국 국립 교향악단과 중국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상하이 교향악단 등의 연주회에서 작품이 연주되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고명한 원로 작곡가로 활동 중임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중국의 현대 작곡가들은 최근까지도 서양의 낭만파에 이르는 전통적인 어법과 중국 민속 음악의 어법 모두를 '사회주의 사실주의' 라는 사조 아래 묶는 창작 방식을 취했다. 이러한 방식은 중국 내의 인민들에게는 유효했을지 몰라도, 자국의 음악이 단순히 '이국 취미' 라던가 '현대성 부족', '지나친 정치색' 이라는 외부 세계의 비판에는 무력했던 것이 사실이다.
위에 언급한 딩 샨더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을 연상시키는 70여 분의 대규모 교향곡인 '대장정 교향곡' 을 작곡했지만, 이 작품은 서양 비평가들에게 '곡의 내용과 응집력에 비하면 지나치게 규모가 큰 작품' 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또 '백모녀' 와 '홍색낭자군' 등의 '국책 무대작품' 은 소위 '자유 세계' 진영에서 정치색으로 인해 오랫 동안 거부되기도 했다.
최근에 중국 출신으로 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브라이트 솅이라던가 천 치강, 탄 둔 같은 작곡가들에 의해 현대적인 기법에 의한 창작이 호평을 받기 시작하고 있고, 중국 내에서도 주 지안얼, 류 유안, 안 청비, 리 원핑, 친 원천 등의 신세대 작곡가들이 현대 기법을 사용한 작품을 발표하는 등 개방의 바람이 불고 있다.
왕 시린은 이러한 흐름에 있어서 중간 시기에 해당하는 작곡가로 볼 수 있다. 비록 선배들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더라도, 그 진전을 이어 나가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라는 것이 '윈난의 정경' 에서도 드러난다. 이 작품은 1963년에 작곡되었지만, 몇 년 후 시작된 문화대혁명 때문에 초연이 15년 가까이 미루어진 바 있다. 이 곡으로 왕 시린은 1981년 중국 교향악작품 현상모집(콩쿨)에서 1등상을 받기도 했다.
'윈난의 정경' 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색채의 확대인데, 선배 격인 딩 샨더가 도입한 불협화음도 일부 사용되고 있다. 목가적인 1악장 '차밭의 봄비' 에서는 거의 드뷔시 스타일의 섬세한 기법이 돋보이며, 목관 등이 뚜렷한 민속 색채가 나는 선율을 연주할 때 스트링이 받쳐주는 부분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물론 림스키-코르사코프 등 러시아 음악의 영향력도 느껴지며, 마지막 4악장인 '횃불 축제' 의 코다 직전에는 1악장의 주제 선율이 다시금 등장하면서 전체를 묶는 포석도 계산되어 있다.
이 곡의 음반은 현재 이탈리아 음반사 '누오바 에라(Nuova Era)' 에서 제작한 것이 세계적으로 유통되는 것으로는 유일한데, 팡 위안 지휘의 베이징 방송 교향악단의 연주로 1988년 녹음된 것이다. 중국 관현악단으로서는 첫 유럽 투어를 가지게 된 것을 기념해, 항공사 루프트한자와 자동차 회사 이베코가 스폰서를 맡아 제작된 음반이다.
ⓟ 1992 Nuova Era Records
문제는 녹음 상태. 내가 들어본 음반 중 1980년대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는 최악의 퀄리티다. 물론 '중국 기술진의 경험 부족과 장비 노후' 따위의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같은 해 김홍재가 지휘한 연주회의 실황 녹음 테이프보다도 떨어지는 소리는 분명 제작자들의 책임이다. 제작자, 즉 프로듀서는 알레산드로 나바와 다닐로 프레푸모로 되어 있다.
알레산드로 나바, 바로 이 인간이 범인이다. 악명높은 해적판 제작자로 유명하며, 그 중 '그라모포노 2000' 은 국내의 유명 평론가 이 모씨가 맹목적으로 칭찬한 덕택에 많은 사람들-나도 포함-이 피해를 입기도 한 바 있다. 나바는 원본 테이프나 마스터가 아닌, 이미 다른 업계에서 만든 복각판의 소리를 적당히 뭉개서 음반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며, 최근에는 '우라니아', '알레그로' 등의 레이블로 한국에까지 팔아 치우고 있다.
이러한 짓을 하는 사람이니, 하물며 새롭게 녹음하는 음반의 소리가 제대로일 리가 없다. 탁하다 못해 존재감을 상실한 고음, 흐리멍텅해서 무슨 음인지도 분간하기 힘든 저음-아마 이 때문에 곡의 '색채' 가 안개처럼 신비한 느낌을 자아냈을 지도 모르겠다-은 그의 프로듀서 역량이 어떤 것인지를 증명한다. 차라리 낙소스나 마르코 폴로에서 만들어도 이것 보다는 훨씬 선명한 소리였을 것이다.
그 외에도 악단의 기량이 좀 부족한 탓에 곡이 요구하는 다이내믹이나 색채를 잘 살리지 못하고 있는 것도 안타까운데, 마르코 폴로의 중국 음악 시리즈를 비롯한 다른 계획이 있기를 바랄 수밖에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