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하면 떠오르는 것이 인구보다도 많다는 소, 에바 페론-개인적으로는 안좋아함-, 그리고 탕고(탱고)다. 브라질의 삼바와 함께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춤과 춤곡으로 절대 빼놓을 수 없는데, 아르헨티나 이외의 지역에서 그동안 전해져 온 것은 탕고가 아닌, 탱고라고 해도 무방하다.
전통적인 탕고 아르헨티노가 단조 곡이 많고 격렬한 악센트가 가미된 리듬이 돋보이며, 그 리듬을 강조하는 악기로 반도네온이 쓰인다면, 탱고(즉 컨티넨털 탱고)는 풍부한 선율을 중시하며, 리듬을 많이 죽여서 무드 음악으로 변모시켰다고 할 수 있다. 또 반도네온보다 더 밝은 소리의 아코디언을 쓴다는 점도 다르다.
컨티넨털 탱고 덕에 아르헨티나의 대표적인 춤과 춤곡이 전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나치 시절에 정부의 '문화 정책' 으로 장려되었던 소위 '독일식 유사 재즈' 와 비슷하게 '물러터진' 느낌이라 개인적으로는 거의 '혐오하고' 있다. 기껏해야 채플린 영화 '시티 라이트' 에 나온 '라 비올레테라' 한 곡이 듣고 있는 전부다.
물론 '그럼 전통적인 탕고라는 것을 언제 들어봤냐' 는 질문에는 절대로 확답해줄 수는 없겠지만, 그것을 '줄기는 뿌리에서 자란다' 라는, 컨티넨털 탱고와는 다른 방식으로 현대화시킨 대가의 음악은 여러 차례 들어보았다. 바로 아스토르 피아소야(Astor Piazzolla, 1921-1992)다.
탕고가 항상 황금시대를 누린 것은 아니었는데, 2차대전 후 10년 정도 뒤에도 쇠고기와 밀 수출로 선진국 대열에 있던 아르헨티나의 경제가 점차 하락세로 전환하면서 사회가 혼란해지고, 그 틈을 타 한 몫 잡아보려는 군부 세력의 쿠데타 등이 겹치면서 탕고계도 침체되고 있었다. 하지만 1960년대 초반부터 등장한 피아소야는 '새로운 탕고', 즉 탕고 누에보를 표방하면서 전통적인 탕고에 클래식과 재즈의 요소를 추가해 매우 개성적인 곡들을 만들어 냈다.
피아소야는 어렸을 적부터 반도네온을 연주했기 때문에 고전 탕고곡에도 정통했고, 당시 아르헨티나 작곡가로서 가장 유명했던 알베르토 히나스테라와 프랑스 유학 때 만난 나디아 불랑제에게 배운 클래식 기법과 제리 멀리건, 게리 버튼 등 재즈 뮤지션들의 만남이 이러한 활동을 가능케 했다. 물론 전통적인 탕고 음악가들의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자신의 신조를 계속 지켜내면서 오페라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마리아' 에 이르는 대작들에서도 탕고의 어법을 존속시켰다.
피아소야의 음악은 그의 생애 말기가 되는 1980년대부터 급속도로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는데, 요즘에는 그것도 트렌드였던 듯 그 열기가 많이 식어버린 느낌이다. 하지만 1990년대부터 메이저 마이너를 가리지 않고 수없이 쏟아져 나온 탕고 관련 음반들의 홍수는 그 열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증명해 준다. 물론 그 음반들에도 옥석이 섞여 있었는데, 들을 만한 연주들은 주로 마이너 레이블에서 많이 나왔다.
지금 가장 많이 듣고 있는 피아소야 음반은 프랑스 아르모니아 문디에서 나온 것인데, 호셉 퐁스가 지휘하는 바르셀로나의 리우레 극장 실내 관현악단과 아르헨티나의 반도네오니스트 파블로 마이네티가 합작한 것이다. '아콩카구아' 라는 부제가 붙은 반도네온 협주곡(1979)과 '포르테뇨 탕고 풍의 3악장(1968)', 그리고 관현악단 소속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루이스 비달이 반도네온과 실내 관현악을 위해 편곡한 다섯 곡의 탕고-데카리시모(1962), 포르테뇨의 겨울(1969), 안녕, 아버지(1961), 천사의 밀롱가(1968)와 천사의 죽음(1970)-가 수록되어 있다.
앨범의 중간에 수록되어 있는 '포르테뇨(←항구 도시인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일컫는 은어) 탕고 풍의 3악장(Tres movimientos tanguísticos porteños)' 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재미있게 들었던 곡인데, 이 곡에서는 반도네온이 쓰이지 않는다. 플루트, 오보에, 바순, 트롬본이 각 하나씩, 클라리넷, 호른, 트럼펫이 각 두 개씩, 그리고 타악기와 피아노, 하프, 스트링이 전부인 실내 관현악 편성이며, 그나마 이 녹음에서 스트링 주자는 13명(4-3-3-2-1)에 불과하다.
물론 반도네온이 빠졌다고 해서 컨티넨털 탱고 식으로 무른 곡이 된 것은 절대 아니다. 반도네온이 찔러주던 강렬한 리듬들은 금관악기와 타악기가 대신 맡고 있으며, 3악장에서는 피아소야가 즐겨 쓰는 푸가가 전곡을 이끌고 있다. 약간 권태로운 악상이 주가 되는 2악장에서도 중간부는 대단히 활력 넘치는 재즈 풍으로 이끌고 있다.
그리고 제목이 보여주듯, 이 곡의 전체 분위기는 도시 풍의 '쿨' 한 느낌이다. 그리고 도시 중에서도 어두운 뒷골목의 풍경을 그려내는 것 같은데, 필름 누아르 계통의 영화에 써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아소야가 백인들이 주로 창안한 '쿨 재즈' 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도 실증되는 셈이다. (굳이 억지로 대조되는 곡을 찾자면 정감있는 시골 스타일인 베토벤의 교향곡 6번 '전원' 이 될 듯)
피아소야의 여느 작품이 그렇듯, 관현악 편성의 작품이라도 흔히 이야기되는 '심포닉한' 냄새는 별로 없다. '탕고는 탕고 그대로 둬야 제격이다' 라는 피아소야 자신의 말처럼 그 곡이 어떤 편성이나 구성이건 간에 그 음악은 고전 탕고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클래식 어법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바로크식의 규칙적인 대위법을 주로 응용하기 때문에, 커다란 스케일 보다는 오밀조밀한 맛을 내는 것이 피아소야 작품들의 특징이다. 재즈 뮤지션들이 주로 응용하는 클래식 작품이 바흐의 것이라는 사실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2002년 월드컵을 전후해 아르헨티나가 다시 해외 뉴스란에 자주 올라왔는데, 안좋은 소식들이 대부분이었다. 국가 경제가 다시금 파탄의 길로 빠져들면서 가게를 약탈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되었는데, 평소 사람들로 붐비던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탕고 바들 조차도 개점휴업 상태였다. 지금은 그래도 좀 나아졌을 지는 모르겠지만, 피아소야가 타계한 이후 아르헨티나 탕고가 또 다시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