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외잡설
파리의 여인.
머나먼정글
2004. 7. 12. 23:08

찰리 채플린 하면 많은 사람들은 그를 그냥 '희극배우' 혹은 '희극영화 감독' 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실제로 그가 제작한 작품의 절대 다수가 그렇다. 뮤추얼 영화사에서 제작한 단편 '이민' 을 본 이래 지금껏 채플린 영화에 대한 호감은 전혀 떨어지지 않고 있으며, 최근에는 퍼스트 내셔널 영화사에서 제작한 중편 '개의 생활', '어깨총' 과 '순례자' 를 재편집한 '채플린 레뷰' 가 오랜만에 폭소를 자아내 주었다.
채플린 레뷰를 빼고 국내에 소개된 작품들 중 비디오로 나와있던 것은 꽤 많았다. 하지만 그 대부분이 채플린의 허가 없이 멋대로 작품을 편집하거나-대표적으로 '모던 타임즈'-, 아니면 외국 비디오를 몇 번이고 복사해서 화질이 굉장히 많이 떨어지는 것들이 대다수였다. 그나마 DVD 시대가 되면서 원작 그대로-그리고 셔플로 들어가 있는 삭제 장면 등을 포함해-볼 수 있게된 것이 다행이다.
조악한 국산 비디오나마 보게 된 채플린의 작품 중 가장 '비상식적인' 것이 바로 '파리의 여인' 이라는 영화였다. 채플린이 메리 픽퍼드,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 등과 함께 설립한 유나이티드 아티스츠 영화사에서 만든 첫 작품이었는데, 채플린의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비극이었다. (물론 '라임라이트' 나 블랙 코미디 '살인광 시대' 를 예외로 쳐준다면)
에사네이-뮤추얼-퍼스트 내셔널로 이어지는 채플린의 영화들을 본 사람이라면 그 단/중편 영화에 등장하는 히로인이 거의 예외없이 같은 여배우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에드나 퍼비언스. 채플린도 그녀와 잠시 연인으로 지낸 바 있었는데, 퍼스트 내셔널 시절부터 그 애정은 식어버리고 사무적인 관계만이 유지되었다고 한다. 그나마 채플린이 유나이티드 아티스츠로 이적할 즈음에는 알콜 중독 등의 개인적인 문제로 인해 거의 은퇴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채플린은 에드나를 다시 배우로 성공할 수 있게끔 하는 의미에서 그녀를 히로인으로 재기용했고, 유럽을 여행하면서 상류 사회에서 접한 여러 경험과 감상을 바탕으로 제작에 착수했다. 토키를 도입한 '위대한 독재자' 이전까지 채플린은 시나리오를 가지고 작업하는 일이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도전한 이 비극 작품의 뼈대는 간단명료한 것이어서 큰 흠은 없었다.
성공을 바라고 도시로 올라온 여자, 그녀와 함께 지내고 결혼까지 약속했던 가난한 남자, 그리고 그녀를 사교계의 스타로 키운 부호이자 난봉꾼 남자 셋이 벌이는 삼각관계는 요즘에도 통속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플롯이다. 하지만 청중이나 관객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큰 소리로 말싸움을 하거나 싸다구를 날리는 등의 '오바' 는 이 작품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다. 말싸움 장면이 있다고 해도, 무성 영화이므로 그다지 큰 임팩트를 주지는 못한다.
채플린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카메라가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된다' 라는 말로 자신의 영화관을 설명했는데, 실제로 이 작품에서 카메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대상을 관찰할 뿐이다. 이렇게 철저한 객관화를 이룬 덕에 스캔들 기사 등으로 흔들리는 여자의 마음 등을 특별히 과장하지 않고도 잘 전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당시 채플린 작품 중 최악의 흥행 기록을 세우면서 주저앉아 버렸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이 영화가 진지한 비극이라는 것부터 실망했으며, 게다가 채플린이 영화에 등장하는 것은 시골 역에서 잠깐 나오는 짐꾼 역할일 뿐이라는 것도 마이너스 요인이었다.
채플린은 이 영화에 미련이 많이 남아서였는지, 죽기 1년 전이었던 1976년에 직접 영화 음악을 작곡해 붙여 재상영을 시도했다. 이것이 채플린의 마지막 영화 관련 작업이었다. 하지만 재상영 때도 마찬가지로 실패했는데, 그 때는 이미 시기가 시기인 만큼 '신파극' 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솔직히 나도 '채플린=희극인' 이라는 등식의 중독자라서 이 영화를 제대로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 객관적인 제작 방식은 지금 넘쳐나는 각종 드라마나 영화의 그것보다도 우월하다고 단언할 수는 있다. 게다가 안마사나 웨이터 등의 단역들 조차도-대사 한 마디 안나오는 것까지 감안하고-매우 자연스러운 연기력을 보여주는데, 마임 연기의 신봉자 채플린이 영화 전체를 확실히 장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요즘 텔레비전을 거의 보지 않는 것은 바로 '식상함' 때문이다. 채플린 자신도 희극이건 비극이건 똑같은 패턴을 창의력 없이 반복하는 것은 곧 작품의 실패로 이어진다고 강조한 바 있었다. 불륜 스토리가 사회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소위 건전 단체들의 어이없는 비난 따위는 제쳐둔다고 해도, 그 뻔한 구도조차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질질 끄는 드라마들을 보느니 차라리 이 영화를 몇 번이고 더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