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잡설

3년여 만의 재림.

머나먼정글 2004. 7. 3. 21:42
ⓟ 1999 Wergo/Schott Music & Media GmbH

한국인들에게 '윤이상' 이라는 이름 석 자는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20세기의 위대한 작곡가' 에서부터 '빨갱이' 까지 온갖 긍정과 부정의 의견이 난무하며, 그 와중에 그의 '음악' 은 '파란만장한 일대기' 나 '남북 이념 대결 논쟁' 같은 감정과 대결 의식에 점점 파묻혀가는 것 같다.

남한 사람들에게 윤이상 음악은 어쩌면 그 기법의 난해함 때문에 받아들여지기 힘든 것이 될 지도 모르며, 특히 음악이 위의 에피소드나 논쟁에 점점 더 가려짐에 따라서 더 그럴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 귀중한 음반 한 장이 입수된 것은 2주 전의 일이었다.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남북 모두 윤이상 음악을 본격적으로 수용하게 된 해가 1982년이었다. 이 해에 남한에서는 '대한민국 음악제' 에서 윤이상 작품이 두 번의 콘서트를 통해 공식적으로 소개되었고, 북한에서는 조선 국립 교향악단에 의해 '광주여 영원히!(1981)' 가 연주되었다. 물론 남한에서는 그 이전인 1970년대에도 '낙양' 같은 실내악이 연주되기도 했지만, 매우 간헐적이었고 그나마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도 못했다.

북한이 '광주여 영원히!' 를 첫 곡으로 선택한 것도 분명히 정치적인 속내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무턱대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속내가 어떻든, 북한은 남한의 '통영 국제 음악제' 에 대응되는 '윤이상 음악회' 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이 음악회는 관현악 부문에 조선 국립 교향악단, 실내악 부문에 윤이상 관현악단이 주축이 되어 윤이상 곡 외에도 여러 서양 작품을 곁들여 연주하고 있다.

윤이상 관현악단은 이름에서 보듯, 창단(1990.12) 때부터 윤이상 음악에 주력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다. 다만 국립 교향악단에 대편성 작품을 맡기고, 소편성 작품을 주로 연주시키기 위해 서양의 실내 관현악단 정도로 규모를 작게 꾸몄다. 북한 출신으로서는 유일하게 카라얀 지휘 콩쿨에 입상-1위 없는 2위-한 지휘자 김일진이 창단 때부터 엄격한 오디션을 직접 주관했고, 지금도 간간히 객원으로 지휘하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