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인터넷의 힘이란. 내가 의도하지도 않았는 데도, 내가 쓴 글이 다음의 어느 블로그에 (엄밀히 말하자면 글쓴이의 양해를 구하지 않고 무단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포털 사이트를 통해 서태지 팬클럽 측에도 퍼진 것 같은데, 물론 그 쪽에서 나를 '대책없는 클래식 덕후새퀴' 라던가 '아는척 열라하는 병맛새퀴' 라고 욕해도 별 상관없다.
하지만 아닌 것은 아니고 의심쩍은 것은 의심쩍은 것이다. 지난 번에 제기한 의혹은, 서태지 심포니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던 프로필 등에 대한 의혹일 뿐 아니라 네이버나 다음 등에 무성의하게 게재된 톨가 카쉬프의 프로필에 대한 의혹이기도 했다.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난 지금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서태지 심포니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다. 누군가 내가 쓴 '뻘글' 을 의식했던 것일까? 톨가 카쉬프에 대한 프로필에 꽤 많은 수정이 가해져 있었다. 학력과 직업, 경력도 덧붙었고, 여러 가지 호평을 받았던 공연에 대한 것도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하지만 톨가 카쉬프에 대한 서태지 심포니 공연 기획사 측의 서술은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물론 '사실 관계에 입각한' 여러 서술을 덧붙여 더욱 화려하게 만들었지만, 그 중에도 여전히 규명되지 않고 있는 의혹은 전혀 풀리지 않고 있다.
자, 그럼 새로 '개정된' 카쉬프 프로필 화면의 캡처를 보자. 내가 꼽아본 '문제의 문장' 은 다음과 같다;
(전략)...런던 시립 교향악단(City of London Sinfonia), 로열 리버풀 필하모닉(Royal Liverpool Philharmonic), 국립 교향악단(The National Symphony Orchestra),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Royal Philharmonic Orchestra) 등과 같은 일류 오케스트라에서 협연 지휘 및 음악감독을 역임했으며,...(후략)
그렇다면, 지난 번 로열 필에 대해서는 이미 살펴봤으니 새로 추가된 오케스트라들과 그 지휘자단에 대해서 또 살펴보기로 한다;
자, 그리고 '국립 교향악단' 이라는 악단. 저 명칭은 특별히 어느 나라를 써놓지 않는 이상, 어느 국가의 국립 교향악단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위키에만 등록되어 있는 '국립 교향악단' 만 해도 덴마크, 에스토니아, 이라크, 레바논, 이란, 볼리비아, 콜롬비아, 코스타리카, 쿠바, 도미니카 공화국, 에콰도르, 가나, 아일랜드 등 10여 개 단체가 나온다.
물론 이것은 서태지 심포니 홈페이지 뿐 아니라, 영어판 위키나 여타 영문판으로 작성된 카쉬프의 프로필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예로 어떤 1류라는 요리사에게 '어디에서 근무하셨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유럽의 호텔에서 근무했습니다' 라는 지극히 광대한 영역의 답변을 듣고 대략 정신이 멍해지는 시츄에이션이다. 대체 어디의 '국립 교향악단' 일까?
(개인적으로는 저 악단이 런던에 본거지를 둔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 가 아닐까 싶다. 내셔널 심포니는 국립 교향악단이 아닌 사설 악단이며, 클래식 보다는 대중음악의 공연을 주로 하는 악단이라고 한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악단의 정체도 불분명한 하나를 빼면 시티 오브 런던 신포니아건 로열 리버풀 필이건 현역 혹은 역대 음악 감독 명단에서 톨가 카쉬프라는 이름은 여전히 찾아볼 수 없다. 이외에도 '~등과 같은' 이 애매한 표기라고 누군가가 비판한 것 때문에 영국에서 활동하는 모든 메이저급 관현악단의 지휘자 정보도 조사해 봤지만, 톨가 카쉬프라는 지휘자가 음악 감독 혹은 상임 지휘자, 수석 지휘자 등의 공식적인 상위권 직책을 가진 일이 없다는 사실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특정 관현악단에서 공식적인 직함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 만으로 카쉬프가 3류니 뭐니 하며 매도할 수는 없다. 빈 교향악단이나 런던 교향악단, BBC 교향악단, 베를린 필 등 유명 악단을 지휘해 녹음도 여럿 남긴 야샤 호렌슈타인도 평생 동안 저런 직함 없이 객원 지휘자로만 활동했지만, 지금도 20세기에 배출된 위대한 지휘자들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영어판 위키 등을 참조해 카쉬프가 음악 감독 혹은 여타 공식 직책에서 활동한 사례를 찾아보았다;
1. 런던 아마데우스 합창단 (London Amadeus Choir) 음악 감독
2. 국립 교향악단 (아마도 런던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 부지휘자 (← '음악 감독' 이 아닌 '부지휘자' 라는 서술에 주목)
3. 대통령 교향악단 (Presidential Symphony Orchestra.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 본거지를 둔 터키 대통령 직속 관현악단. 톨가 카쉬프는 아랍계 영국인이다) 전임 객원 지휘자
나는 예전에 쓴 의혹 제기글을 DC인사이드 클래식 갤러리에 '내 손으로' 올렸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토론을 거쳤고, 서태지 심포니 공연기획사 측에서 '대중음악 영역의 프로듀서(Producer)라는 직책을 음악감독(Music Director)이라고 혼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는 잠정적 결론을 얻었다.
하지만 프로듀서의 경우, 대중음악이건 클래식에서건 관현악단에 대한 통제력이나 구속력은 거의 전무하다. 아예 자신이 직접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라는 관현악단을 창단했던 EMI의 명 프로듀서 월터 레그 정도가 아니라면야, 그런 '권력' 은 어불성설이다.
프로듀서는 기껏해야 음반 녹음 때 지휘자나 독주자, 악단 수석급 주자들과 대등하게 녹음 작업에 대해 논의할 정도이고, 음악 감독은 재임 기간 동안 해당 악단에 대한 예술적인 결정권 뿐 아니라 독주자나 객원 연주자 섭외 문제에까지도 관여할 수 있는, 클래식 지휘자의 최상위 직책인 것이다.
'서태지 심포니' 는 공연 발표 때부터 대중음악과 클래식의 크로스오버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클래식 영역의 단어에 대한 고찰도 홍보 전에 충분히 그리고 세심하게 거쳤어야 했다. 더군다나 신정아 사건 등으로 학력위조에 대한 비판의 바람이 거셌던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이 톨가 카쉬프 프로필 건에 대해서는 이상할 정도로 관대한 것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두 번째로 제기했던 '로열 필하모닉인가 그렇지 않은가' 에 대한 의혹. 이것은 아예 고쳐지지도 않은 채로 그대로 홈페이지건 길가에 붙은 포스터에서건 계속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라고 홍보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에도,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홈페이지에 있는 공연 일정에서는 '서태지 심포니' 의 '서' 자도 찾아볼 수 없는 상태다.
로열 필이건 로열 필 콘서트이건 별 상관없지 않냐는 의견도 많이 들어봤지만,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면 이렇게 소송까지 가져간 이들은 시덥잖은 일에 열폭하는 소인배들일 뿐일까? 게다가 저 소송 건은 이번 '서태지 심포니' 와 비슷한 '대중음악과 관현악의 만남' 이라는 성격의 크로스오버 공연을 둘러싸고 벌어진 것이었다.
위 사건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적자면, 2006년 5월 22~29일 동안 내한했던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가 일정 중인 5월 27일에 런던 근교 크로이던의 페어필드 홀에서도 연주했다는 말도 안되는 중복이 발생한 것이었다. 저 내한 공연은 신해철이 이끄는 밴드 넥스트와 서울, 부산, 대구 세 개 도시에서 협연하는 것으로 기획된 것이었는데, 시작부터 부산 공연이 급히 취소되는 등 난항을 겪었다고 보도되었다.
결국 이 사건은 로열 필 측이 공개한 페어필드 홀 연주회의 단원 명부와, 한국에서 연주했다는 로열 필의 단원 명부가 공개되면서 어이없는 결말로 끝나고 말았다. 한국을 방문한 74명의 단원들 모두 페어필드 홀의 연주회 명부에도 그대로 이름이 올라가 있었는데, 한국 방문 연주자 명단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한국을 방문해 공연했던 오케스트라는 로열 필하모닉이 아닌 로열 필하모닉 콘서트 오케스트라였다. 해당 오케스트라는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가 페어필드 홀에서 공연하던 날 울버햄튼에서 호세 카레라스의 공연에 출연하기로 되어 있었다가 공연 1주 전에 돌연 일정을 취소한 것으로 파악되었다고 했다.
이 사건이 실수였던 고의였건, 공연 기획사의 명예 뿐 아니라 로열 필과 로열 필 콘서트의 명예에도 상당한 흠집을 냈기 때문에 법정 소송까지 간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이는 클래식이고 대중음악이고를 떠나서, '한국은 유명 연주 단체 이름을 비슷하게 속여서 들어가도 별로 문제될 것이 없는 나라' 라는 얕잡아 보임을 당하게 된다는 좀 더 심각한 국제적 신뢰도 문제에까지 맥이 닿아 있다.
그래서 나는 이 기회를 빌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싶다;
1. 서태지 심포니 홈페이지건, 네이버나 다음 등 국내 유명 포털 사이트에서건 톨가 카쉬프에 대한 과장된 프로필을 수정할 것. 그리고 여타 음악인들 뿐 아니라 프로필이 올라와 있는 모든 인물에 대한 경력 사항을 면밀히 재검토할 것.
2. 서태지 심포니 공연 기획사는 내한 예정인 관현악단이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인지, 아니면 로열 필하모닉 콘서트 오케스트라인지를 확실히 할 것. 로열 필이라면 영국 로열 필 홈페이지의 공연 기록에 '서태지 심포니' 공연 일정도 포함시킬 것을 요구해야 하며, 로열 필 콘서트라면 악단 명칭을 수정하고 대중 매체를 통한 사과 후 홍보에 사용할 것.
뱀다리: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이번 공연의 성격이나 톨가 카쉬프와 서태지의 음악성에 대해 내가 '까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솔직히 말하자면 두 인물에 대해 좋고 싫음도 판가름할 수 없는 '그다지 큰 관심 없음' 의 영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번 건에 대해서는 '음악인들의 음악 수준 문제가 아닌, 그들에 대한 홍보 자료의 정확성에 대한 의혹 제기' 라는 관점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어차피 여기까지 진행해온 대규모 공연인 이상, 지휘자나 관현악단에 대한 수준 문제로 옮겨가서 공연 자체에 흠집이 나게 된다면 그것 자체만으로도 큰 타격이 올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적했던 두 가지만 수정되거나 첨삭된다면야 '서태지 심포니' 라는 공연과 서태지, 톨가 카쉬프, 내한할 관현악단에게 태클을 걸 아무 이유도 없을 것이고. 그리고 카쉬프의 전작 '퀸 심포니' 처럼 음반도 발매된다면, 국내 대중음악 역사상 보기 드문 '크로스오버' 의 전례로도 남을 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