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유수의 클래식 기획사인 IMG 아티스츠가 EMI를 통해 발매하던 '20세기의 위대한 지휘자(Great Conductors of the 20th Century)' 의 마지막 기획분 CD들이 마침내 발매되었다. 그리고 그 CD들 중에는 푸르트벵글러의 것도 있었다. 그 동안 미발표/희귀 음원들을 몇 개 끼워넣어 발매하는 시리즈였기 때문에 내심 기대를 많이 했었다.
어제 사온 CD에는 베토벤 교향곡 3, 5, 9번 세 곡이 들어 있었는데, 그 중 3번과 5번은 모두 예전에 해적판으로도 발매된 적이 없는 미발표 음원이라고 했다. 올해가 푸르트벵글러의 50주기가 되기 때문에, 푸르트벵글러 팬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값진 선물인 셈이다.
하지만 푸르트벵글러에 대한 IMG와 EMI의 기획은 딱 절반의 성공이었다. 아니, 그 비중을 따져 보면 절반이 아닐 지도 모르겠다.
우선 3번 '영웅'. 1953년 9월 4일의 실황인데, 이것은 정말로 미발표 음원이 확실한 것 같다. 음반 해설지와 뒷면에 특별히 테이프의 소유주인 바이에른 방송국(Bayerischer Rundfunk)의 직인이 찍혀 있고, 같은 날 1부에서 연주된 베토벤의 극음악 '에그몬트' 서곡과 교향곡 4번의 음질과도 거의 비슷했다. 다만, 이번 CD의 경우 폴 베일리라는 1급 복각 전문가가 손을 댔기 때문에 소리 자체는 훨씬 선명했다.
물론 연주도 후기의 것 치고는 꽤 괜찮았다. 몇몇 부분에서 팀파니가 실수를 하고, 갑자기 리듬이 무너지는 등의 민폐는 있지만 병들어 가던 지휘자의 연주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소리도 꽉 차 있고 드라마틱한 연주였다. 하지만 마지막 박수만은 의구심이 들었다. 박수 소리가 그 시대 치고는 너무 선명해서, 혹시 다른 것을 이어붙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연주 장소를 뮌헨의 독일 박물관 회의장이 아니라 헤르쿨레스잘로 잘못 표기한 것도 문제였다.
9번의 경우에는 예전에도 도시바 EMI, Music & Arts(미국의 복각 전문 마이너 레이블) 등에서 발매된 바 있었다. 1937년 5월 1일 런던의 퀸즈 홀에서 가진 실황인데, 온전하게 남아있는 푸르트벵글러의 9번 전곡 녹음 중 최초의 것이다. 녹음 연도가 연도인 만큼 소리는 탁한 편이었는데, 게다가 당시 실황 녹음 기술도 그다지 좋지 않았던 만큼 이번 시리즈에서 기대를 많이 했었다.
물론 소리 자체는 꽤 나아진 것 같았다. 하지만 두 장의 CD에 교향곡 세 곡을 담기 위해 2악장의 반복구를 잘라냈다는 속지의 기록을 보면서 실망하고 말았다. 이는 가장 의혹이 되고 있는 교향곡 5번의 커플링-자세한 것은 밑에-과 더불어 이 음반의 마이너스 요인이었다.
게다가 합창단 표기도 또 틀렸는데, 베를린 필하모닉 합창단(Philharmonischer Chor Berlin)이 연주했다고 써버린 것이었다. Music & Arts가 합창단을 브루노 키텔 합창단(Bruno-Kittel-Chor)으로 오기한 것에 이은 두 번째 실수였다. 실제로 그 날 합창을 맡은 단체는 런던 필하모닉 합창단(London Philharmonic Choir)이었다. 그 동안 권위를 자랑해온 시리즈의 속지 치고는 너무도 실수가 자주 있어서 실망스러웠다.
그리고 이 CD에서 최악의 기획인 5번. 첫 발매 고지 때는 2-4악장만이 발매된다고 한 바 있었다. 그렇다면 9번의 2악장에서 짤린 반복구도 그대로 넣을 수 있었을 것이지만, 막상 사온 CD에는 5번의 전악장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5번의 경우에도 3번과 마찬가지로 '미발표 녹음' 이라고 해서 많은 관심을 끌었던 것이었다. 패전으로 치닫던 때인 1944년 2월 7일 베를린 국립 오페라극장 실황인데, 헨델의 합주협주곡 작품 6-10과 모차르트 교향곡 39번이 같이 연주되었고, 두 레퍼토리는 이미 음반화 되어 있다. 하지만 2부에서 연주된 베토벤 5번은 그 동안 녹음되지 않았거나, 테이프가 분실되었다는 추측만이 나돌았을 뿐이었다. 그것이 사후 50년만에 발매된다는 것은 충분히 센세이션이었다.
하지만 듣고 나니 1943년 6월 27일의 방송녹음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리고 일본의 푸르트벵글러 관련 홈페이지들을 찾아보고 나서 43년의 것을 잘못 사용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워낙 해적판과 수상쩍은 자료들이 많은 푸르트벵글러의 녹음인지라, 신뢰할 수 있는 메이저 음반사의 이번 발매를 기다려온 사람들에게 큰 실망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위의 사소한 오기는 그렇다 쳐도, 이것은 정말 용납이 되지 않을 실수였다.
게다가 3번과 9번의 경우에는 저작권자를 확실히 표기하면서도 5번에는 단지 '2004' 라는 연도만 달랑 씌여 있는 것도 의혹을 부채질하고 있다. 정말 정당한 경로로 입수한 원본 테이프라면 분명히 자유 베를린 방송(Sender Freies Berlin)이라던가 독일 라디오(Deutschlandradio)같은 방송국명을 달아야 했다.
웬만한 녹음들이 이미 발매가 되어 있던 푸르트벵글러의 경우에는 확실히 기획에 큰 난점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그럴 수록 더욱 신중했어야 했다. 수상쩍은 테이프를 쓰는 대신, 스트라빈스키의 '3악장의 교향곡' 같은 구하기 힘든 희귀 음원을 추가시켰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9번 2악장의 반복구 커트를 애교로 봐준다고 해도, 5번의 치명적인 실수 때문에 이번 푸르트벵글러편은 절반의 성공으로밖에 평가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