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잡설
한국 음반사의 가능성.
머나먼정글
2004. 6. 6.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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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권 국가의 음악이라고 하면, 전통 집권 때까지 국내에 음반 유통은 물론이고 청취 사실이 들키면 모처에 불려가 몽둥이 찜질과 물 세례를 받아야 했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지금도 그 노선에서 탈피하려면 꽤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물론 이제는 쇼스타코비치가 러시아 공산 혁명을 주제로 쓴 교향곡 12번 '1917년' 을 듣는다 해도 뭐라 할 사람 없고, 마오쩌둥을 찬양하는 가사 일색인 '둥펑홍(東方紅)' 이 클라이맥스에서 장렬히 울려 퍼지는 피아노 협주곡 '황허(黃河)' 를 한국 피아니스트도 연주하는 세상이다.
물론 저런 음악의 보급도 자체는 아직도 서구의 그것에 뒤떨어지는 형편이지만, 놀랄 만한 이벤트도 있었던 것이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의 방송국 자료실에서 잠자고 있던 40만개 이상이나 되는 실황 녹음 테이프의 아시아 지역 음반 제작권/판매권은 어디에서 따갔을까? 김경호 같은 가수들의 음반을 내는 것으로 유명한 예당 엔터테인먼트다. 지금은 이러저러한 사정 때문에 발매가 중단된 듯 하지만, 어쨌든 많은 수의 CD가 국내 뿐 아니라 일본 등지로 팔려 나갔다.
그리고 구 소련의 국영 음반사인 멜로디아(Melodiya)의 녹음을 한국에 라이센싱하는 계약을 아울로스(Aulos)라는 국내 업체가 따낸 바 있었는데, 저 회사는 이미 예프게니 키신(피아노), 미하일 플레트뇨프(피아노), 다닐 샤프란(첼로) 등 구 소련 출신의 유망주 혹은 대가들의 명반으로 인기 몰이를 하고 있다.
하지만 아울로스의 경우에는 한 번 더 놀랄 만한 '꺼리' 가 있다. 아울로스에서 최근 발매한 음반 중 가장 화제가 된 것이 바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전집(총 15곡/10장 세트)이다. 모스크바 필이 당시 상임 지휘자였던 키릴 콘드라신의 지휘로 1961년(8번. 아울로스반에서는 1967년으로 오기됨)부터 1975년(7번)까지 14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녹음했다.
세계 최초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전집이라는 역사적 의의도 있는 세트인데, 예전에 베텔스만 뮤직 그룹(BMG)이 멜로디아의 판권을 잠시 따냈던 90년대 후반, 중간 가격인 미드 프라이스(MID) 세트로 나왔을 때에도 충분한 화제 거리였다. 하지만 저 세트는 BMG가 채산성이 맞지 않는다며 멜로디아 판권을 포기하면서 동시에 폐반되어 버렸다.
아무리 미드라고 해도, 10만원 이상의 가격은 당시 내게 확실히 부담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낱장으로 모으던 중 폐반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면서 힘이 쭉 빠져 버렸고, 다른 회사가 멜로디아의 판권을 넘겨받아 재발매를 할 때까지 막연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아울로스가 저 전집을 MID보다도 더 낮은 버짓 프라이스(BUDGET)로 발매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핫트랙스에 음반이 뜨자 마자 주문해 버렸다. 모으고 있었던 BMG판 CD와의 중뷁 따위는 우려도 되지 않았을 정도였으니, 저 전집에 건 기대는 엄청난 것이었다.
게다가 음반의 사운드도 BMG의 것보다 더 좋았다. 물론 소련의 녹음 기술과 장비가 서구의 그것에 비해 떨어지는 것이라, 종종 관현악 총주(tutti)나 타악기의 난타 같은 대목에서 소리가 뭉개지는 것까지는 보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매우 안정된 소리라는 것이 중평이었고, 더군다나 그 CD 복각을 한국 기술진들의 힘만으로 했다는 점에서 대서 특필 되었다.
저 전집은 한국 뿐 아니라, 놀랍게도 '까다로운 빈티지 애호가가 즐비한' 일본에까지 팔려 나갔다. 위에 쓴 것처럼 예당의 CD들도 일본에 팔려나갔지만, 커버 디자인이 가끔씩 깨는 데다가 몇몇 음반은 복각이 완전 꽝으로 된 것도 있었다-대표적으로 피아니스트 에밀 길렐스가 연주한 모차르트/멘델스존/카발레프스키 협주곡집-. 일본 HMV를 검색해 보다가 저 전집을 보고는 놀랐는데, 그 애호가들 마저도 저 음반의 '신선한 소리' 를 칭찬하고 나선 것이었다.
*HMV의 상품 소개와 평. 물론 아마추어들의 평이지만, 일본 아마추어들은 절대 얕볼 무리들이 아니다.
http://www.hmv.co.jp/Product/Detail.asp?sku=1904348
아직도 방송국의 실황 중계 같은 음향 기술과 장비에 관해 말이 많은 한국이지만, 옛날 녹음의 복각이라는 상당히 까다로운 과제에 도전해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은 것을 보면 아직 희망은 있는 것 같다. 물론 다른 나라의 녹음 보다는 자국 아티스트를 활용해 녹음을 할 정도의 수준은 되어야 정말 '진보했다' 고 말할 수 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