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루스 피플' 에 선정되었을 때 나는 이상형을 '아즈망가 대왕' 의 사카키라고 밝힌 바 있다. 물론 사카키가 슈퍼모델급 몸매라는 것도 중요한 포인트지만, 무엇보다 겉은 쿨하면서 속은 팬시나 애완동물 등 귀여운 것을 보면 사죽을 못쓰는 그 '2중성' 에 있었다.
같은 기준으로 '쪽보다 푸른' 의 카구라자키 미야비도 마찬가지로 이상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미야비의 경우에는 그 깐깐한 성격 덕분에 2순위로 밀려났지만.
이러한 까닭에 가끔은 나 자신의 다양하고 대립되는 면모를 거장 작곡가들의 성격 혹은 특질과 연관짓곤 한다. 쉽게 흥분하는 성격은 베토벤을, 소박한 의식주 생활은 브루크너를, 본심을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내성적인 면모는 브람스를, 그리고 기차를 좋아하는 기호는 드보르작과 힌데미트를 생각하곤 한다.
솔직히 Fireegg Friend 여 모군도 힘들다고 한 번 하고 그만둔 새마을호나 KTX 월간지 교체 알바를 (매달은 아니라도) 몇 번씩이고 계속 하는 것도 단순히 '돈' 때문만은 아니다. 그리고 돈이라면야 다른 '좀 더 쉽고 돈도 많이 주는' 알바도 부지런히 뒤져보면 찾을 수 있다.
물론 돈이 부족할 때는 버스 여행을 하지만, 기차만큼 운치있는 여행 수단은 없다고 단언하고 있으며 수도권 전철 전 구간 주파라는 기록이라던가 교외선 등 적자 노선의 폐지를 안타까워 할 정도면 확실히 '기차' 라는 것에 뭔가 깊은 연관을 지을 만도 하다.
독일 작곡가인 힌데미트(Paul Hindemith, 1895-1963)는 위에 쓴 대로 기차를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같은 '철도광' 이었던 드보르작이 단순히 증기기관차나 기차역의 모습을 광적으로 좋아했다면, 힌데미트는 아예 집에 철도 미니어처 모형을 만들어 놓고 조종하거나 타고 다니면서 즐겼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베를린 사람들도 이를 빗대어 베를린 필의 홈그라운드였던 필하모니(Philharmonie)를 '힌데미트 역(Bahnhof Hindemith)' 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참고로 2차대전 말기에 폭격으로 전소된 필하모니를 1963년에 현대식으로 재건했을 때는 카라얀 서커스(Zirkus Karajani)라고 불렀다.)
힌데미트는 어렸을 적부터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배웠고, 겨우 20세의 나이에 오페라극장 관현악단의 수석을 맡았을 정도로 재주가 좋았다. 연주자 생활을 시작한 뒤에 작곡을 배운 케이스인데, 그 때문인지 힌데미트는 평생 동안 '즐겁게 연주할 수 있는 음악' 을 목표로 창작에 임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도 유일하게 쳐본 20세기 피아노 작품이 힌데미트의 '1926' 이라는 피아노 모음곡 중 두 번째 곡인 시미(shimmy. 흑인들의 선정적인 춤 또는 춤곡)였는데, 베토벤 소나타 같은 것들은 번거롭고 힘들어 했던 나였지만 저 곡만큼 재미있게 쳐본 피아노곡은 없었다. (물론 '잘 쳤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물론 저 곡의 유별나게 음란하고 광포한-특히 마지막-면이 내 뒤틀린 성격에 맞았을 수도 있지만.
물론 그 음악이 청중들에게는 얼마나 즐거움을 주었을 지는 모르지만-쇼스타코비치 같은 작곡가들은 힌데미트의 작품이 지나치게 논리로 어필하기 때문에 친해지기 힘들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이 꾸준히 음반으로 나오는 것은 아마 그 목표를 어느 정도 증명할 수 있지 않을까.
힌데미트는 위에 든 '1926' 같은 경우에 거의 야만성에까지 이를 정도로 전위적인 경향을 보였지만, 1930년대를 전후해 정돈 상태를 만들기 시작했다. 선배들의 작품들을 되돌아보고 고찰했으며, 그 결과 교향곡 '화가 마티스(Mathis der Maler)',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을 현대적으로 벤치마킹한 피아노곡 묶음 '음의 유희(Ludus tonalis)' 같은 보편적인 명작의 작곡으로 이어졌다.
유태인 아내를 두고 유태인 음악가들과 연주했다는 이유로 나치 정권으로부터 계속 욕을 먹던 힌데미트는 결국 터키와 스위스를 거쳐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미국에서는 학생들을 지도하고 이론서를 출판하면서 미국 음악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쓰기도 했다.
특히 이 미국 시기의 이색적인 작품으로 '교향 변용(Symphonische Metamorphosen)' 이라는 관현악곡이 있다. 1943년에 힌데미트의 한참 선배인 칼 마리아 폰 베버-초기 왈츠의 대표작인 '무도회의 권유' 와 오페라 '마탄의 사수' 로 유명한 작곡가-의 작품들에서 주제를 빌어 작곡한 곡이다. 물론 선배 작곡가의 주제를 차용했다는 점에서 이 곡을 단순히 '오마주' 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들을 때는 또 느낌이 다르다. 물론 주제 자체는 베버의 것이지만, '변용' 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자신의 입김을 불어 넣었고, 거기에 블루스와 재즈의 영향까지 집어넣고 있다. 특히 '깨는' 것이 2악장으로, 베버로서는 드문 동양풍의 5음계 주제-'투란도트' 라는 서곡에서 따왔다고 함-를 플루트가 연주하면서 시작한다. 힌데미트는 5음계의 이국적인 특성을 결코 놓치지 않았고, 이것은 중간부에서 시작되는 금관악기들의 스윙 스타일 솔로들로 이어지면서 노골적인 미국색을 띄게 된다.
물론 2악장의 의외성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다른 악장들에서도 베버를 현대화한 힌데미트의 기지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피아노 연탄곡집 '8개의 소품' 의 네 번째 곡과 일곱 번째 곡을 주제로 한 1악장과 4악장, 역시 피아노 연탄곡집인 '6개의 소품' 의 두 번째 곡을 주제로 한 3악장들이 그것들.
음반으로는 가장 싼 낙소스부터 최근에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오리지널 마스터즈(Original Masters)' 시리즈로 출반된, 힌데미트 자신의 지휘로 베를린 필이 연주한 것까지 다양하다. 개인적으로는 1947년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지휘의 베를린 필이 연주한 방송 녹음을 즐겨듣고 있다.
작곡자가 지휘한 것보다 억양도 더 강하고 2악장의 스윙도 강조되었지만, 녹음 상태가 비교적 나쁜 탓에 일반적으로 추천하기는 좀 그렇다. 그래서 부득이 힌데미트 지휘의 것을 골랐다. 작품을 가장 잘 아는 작곡자 자신이 독일 1급 악단을 지휘한 것인 만큼, 이 연주도 충분히 믿음직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