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잡설

과거를 돌아본다는 것.

머나먼정글 2004. 5. 17. 15:24
한국. 그리고 한반도. 이 나라와 이 땅은 (어느 나라가 그렇듯) 내게 희망과 절망을, 기쁨과 슬픔을, 즐거움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게 해 주는 땅이다. 물론 요즘 느낌으로는 위의 개념에서 후자 쪽에 기울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현재 활동중인 모 커뮤니티는 등록된 회원만도 수천 명이 있는, 규모만 따져 보면 꽤 거대한 사이트다. 하지만 그 규모에 대해 등록된 회원들의 질을 따져 보라면, 나는 결코 희망적으로만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강간, 불장난, 야동 공유 등을 마치 자랑스럽다는 듯이 떠벌이고 다닌다거나, 나는 이 사람의 작품을 좋아하니까 다른 사람들 것은 인정할 수 없다면서 좌충우돌하는 흑백논리 트러블 메이커, 인터넷 시스템의 헛점을 이용해 마음껏 활개치고 다니면서 '다음엔 안걸리면 되지' 라는 리플을 당당히 달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고 내가 어떤 칭찬의 말을 해줄 수 있을까?

하지만 문제는, 저런 단편적이고 때로는 얼치기 장난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저런 행위들에 대해 당사자 대부분이 '그 때는 어쩔 수 없었다' 라는 발언으로 일관하거나, 심지어 '왜 다굴치느냐, 난 억울할 뿐이다' 라고까지 당당히 강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과거를 잊어달라고 하지만, 과거라는 것이 과연 잊혀질만한 성질의 것일까?

불행히도 저 문제는 해당 커뮤니티의 문제일 뿐 아니라, 한반도 전체-그리고 나아가 지구 전체-에 해당하는 문제다.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는다' 라는 징벌 개념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이 해왔던 여러 업적 (또는 짓거리)에 대해 돌아본다는 능력이 모자라거나, 아예 없거나, 있다고 해도 전혀 쓸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항상 있어왔고,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1980년대 중반, 로베르트 바흐만이라는 스위스 출신 작가가 독일의 한 출판사에서 약간 두꺼운 '전기' 를 출판했다. 전기의 주인공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세계적인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었다. 하지만 바흐만의 전기는 그 동안 나왔던 카라얀 관련 전기들의 내용을 상당 부분 뒤집고, 묻혀있던 부분을 폭로하는 등의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위의 책 2장에 해당하는 '출세' 에는 지휘자 카라얀이 아닌, '인간 카라얀' 을 둘러 싸고 그 동안 가장 논란이 되어 온 나치 입당 문제가 특히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었다. 2차대전 후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비나치화(Denazification) 심리와 재판 기록에서 카라얀은 '유태인의 피가 1/4 섞인 여자와 재혼하면서 탈당 처리가 되었다' 는 주장을 폈지만, 이는 바흐만이 집요하리만치 파헤친 자료들에 의해 간단히 뒤집혔다.

카라얀의 당원증, 그리고 초기의 활동 무대였던 울름과 아헨 등지의 나치 대관구 문서와 편지 등을 예로 들어 '재혼 사실은 맞지만, 괴벨스 등 최고위 관료들이 눈감아준 덕택에 탈당 처리가 되지는 않았다' 라고 밝히고 있다. 물론 이 사실을 밝혀낸 것 만으로 저 전기는 그만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저 책을 보면서 내가 가장 경악했던 것은 카라얀의 태도였다.

"그것은 나의 음악성과는 아무 관계 없습니다."

저 말은 카라얀 뿐 아니라, 한국의 음악계를 주름잡아 왔던 중진들 중 친일 경력이 있던 사람들도 자주 써먹던 수법이었다. 게다가 주류 언론들의 가식적인 인터뷰와 기사 등으로 인해 그 동안 카라얀의 나치 입당은 '그저 출세를 위한 고육책이었을 뿐이었고, 정치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였다.

흠, 글쎄? 정당에 입당하는 것 자체가 정치에 대한 관심의 차원을 넘어 거기에 참여한다는 행위 아닌가? 어쨌든 저 바흐만의 비판적인 전기가 출판된 후에도 카라얀은 그러한 과거에 대해 계속 애매한 태도만을 취해 오다가 1989년 타계했다. 살아 생전에 반성까지는 아니더라도, 과거를 돌아볼 기회를 영원히 잃어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저 나치에 관한 문제는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라는, 20세기의 걸출한 소프라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슈바르츠코프는 나치가 전쟁이라는 폭력 수단을 통한 유럽 정복과 유태인 등 '저질 인종' 에 대한 말살을 한창 진행하던 1940년에 입당했다. 하지만 그녀도 카라얀과 마찬가지로 과거를 은폐하고, 혹은 과거를 묻는 사람이 있을 경우 침묵하거나 말을 돌리고, 아니면 아예 만나주지 않는 방법으로 자신의 길을 계속 걸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저 바흐만과 마찬가지로 영국 작가인 앨런 제퍼슨이 슈바르츠코프의 전기를 출판하자, 유럽 음악계는 또 다시 떠들썩해졌다. 반대파는 '왜 지난 일을 가지고 다구리를 치느냐', '그럼 그녀의 음악적인 성공은 대체 뭐냐' 라는 등의 논리로 소일했다. 국내의 유력 예술잡지 '객석' 의 유형종이라는 사람도 '나는 이 책의 내용에 많은 과장이 포함되었기를 희망한다' 라는 말로 거기에 끼어들었다.

유형종 같은 사람을 나는 그 동안 수도 없이 많이 봐왔다. 자신의 우상, 또는 좋아하는 사람의 단점이 굳이 밝혀질 필요가 있냐는 듯이 반문하는 사람들. 그들은 우상이라는 대단한 가치 속에서 지상 낙원을 발견하고, 거기서 진실을 찾으려 하지 않거나 혹은 찾는다 해도 적당히 다른 '업적' 으로 얼버무리면서 반대 여론을 잠재우려 한다.

내 입장은 단호하다. '신화는 없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를 비롯한 여러 업적이, 김구와 이승만의 독립을 위한 여러 애국적인 활동이, 박정희의 경제 발전을 위한 과감하고 직선적이었던 정책이 여성 편력이나 순탄치 않았던 인간 관계, 심지어 친일 행적 등의 그림자 때문에 평가절하될 일은 없다. 마찬가지로 카라얀이나 슈바르츠코프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음악이 '나치 당원이었던 녀석들의 것' 이라는 이유로 욕먹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과거에 대해 솔직하게 받아들일, 혹은 받아들이지 못하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항상 소외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소위 '주류' 와 '열광적인 찬동자' 들로부터 '시덥잖은 폭로전이나 한다' 는 투의 비아냥을 받고, 공식적이건 비공식적이건 여러 악의적인 행동들로 방해를 받으며, 심지어는 개무시나 언론 플레이 등의 극단적인 공격을 받고 좌초하는 것이다.

어차피 인간이라는 동물로 이 땅에 태어난 이상,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 실수는 바지에 오줌을 지리는 류의 것에서부터 세계를 전쟁의 구렁텅이에 몰아넣는 대박까지 다양하다. 문제는 그러한 실수에 대해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문제만으로도 대단히 슬프고 안타까운 것이며, 그 사람이 공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주위의 인물들까지도 어떤 식으로든 연관된다는 것이다.

위의 커뮤니티에서 나는 항상 '과거를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고 역설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적어도 내가 조사해 본 사람들은 과거를 깨달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그냥 '탈퇴' 를 클릭하거나, 아니면 아예 무시하고 제 갈 길을 가버리는 것이었다. 사과하는 경우는 매우 적고, 한다 해도 '잘못한 건 인정한다. 근데 너무하다' 는 식으로 해서 또 이러쿵 저러쿵하게 되는 것이다.

과거가 찬란했던, 혹은 개판이었던 간에 그것은 모두 마찬가지의 '역사' 로 남게 된다. 역사를 지워버릴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었던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흑역사에 대해 '사과' 까지는 아니더라도, '개인적인 회고' 라는 행위는 꼭 필요하다. 설령 그 행위가 자신에게는 부끄럽고 짜증나는 것일지라도, 결코 그 사람에게 해가 갈 염려는 없다. 오히려 그러한 실수 등에서 배워 나가는 것이 정말로 자기 발전에 유익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