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잡설

현악 4중주의 합주용 편곡.

머나먼정글 2004. 5. 16. 15:09
ⓟ 2003 Telarc

클래식을 듣지 않는 사람이라도 살면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악기가 바로 피아노, 그리고 현악기들이다. Locker 무뇌충의 뭐같은 앨범에서도, 유희열이나 김동률 등의 대중적인 발라드 넘버에서도 스트링 편곡은 자주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정규 편성의 서양식 관현악단에서도 숫자가 가장 많은 것이 현악기들이고, 가장 육체적으로 피곤한 것도 현악기 주자들이다. 아예 현악기가 빠지는 곡이라면 몰라도, 대부분 현악기 주자들은 곡이 연주되는 내내 별로 쉴 틈이 없이 계속 활을 켜야 하기 때문.

관현악을 다루는 데 능해서 '관현악법' 이라는 책을 쓰기도 한 림스키-코르사코프도 '많은 작곡 지망생들이 처음에는 타악기, 관악기, 하프 등에 집착하다가 결국 현악기로 돌아간다' 라고 지적한 바 있는데, 그만큼 현악기-특히 바이올린족-들의 표현력에 대한 통찰로 풀이된다.

실내악 분야에서도 가장 대중적인 편성이 피아노 3중주(피아노+바이올린+첼로)와 현악 4중주(바이올린 둘+비올라+첼로)인데, 하이든 시대부터 20세기의 윤이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실내악 작품이 저 편성을 위해 작곡되었다.

특히 현악 4중주의 경우에는 몇몇 작곡가나 편곡자들이 더욱 대규모의 현악 합주용으로 편곡해 놓기도 하는데, 구스타프 말러의 경우 베토벤의 현악 4중주 11번 '세리오소' 와 슈베르트의 현악 4중주 14번 '죽음과 소녀' 를 편곡한 바 있다. 지휘자로 유명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베토벤 현악 4중주 16번과 베르디 현악 4중주), 펠릭스 바인가르트너(베토벤 '대 푸가'),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베토벤 현악 4중주 14번)도 각각 인상적인 편곡을 남기고 있다.

*영화 '플래툰' 에 삽입되어 유명해진 새뮤얼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 도 사실은 현악 4중주의 느린 악장이었고, 이것을 작곡자 자신이 직접 합주판으로 편곡한 것이다. 차이코프스키의 '안단테 칸타빌레' 도 마찬가지.

하지만 4중주의 합주 편곡은 빛과 그림자같은 본질을 지닐 수밖에 없다. 4중주라는 편성 자체가 각 주자들의 개인기를 발휘하기 위한 것이므로, 이것을 집단화시킬 경우 본래의 의도가 훼손된다는 지적은 항상 따라다닌다. 실제로 합주 편곡의 연주는 4중주보다는 아무래도 정확성이 떨어지며, 웬만큼 뛰어난 기교와 표현력을 지닌 솔리스트들이 모인 악단의 연주가 아니면 좋은 평가를 받기 힘들다.

물론 장점도 빼놓을 수는 없다. 바이올린족 악기의 경우 혼자 연주할 때와 합주할 때의 음색이 가장 차이가 많이 나는데, 합주 편곡의 경우 4중주보다도 훨씬 색채가 풍부하고 스케일도 장대해지는 효과를 볼 수 있다. 특히 콘트라베이스가 추가됨으로써 더욱 중후한 표현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 매력적이다.

국내에 들어온 것은 지난해였지만, 워낙 적은 양이 수입된 탓에 좀처럼 구하지 못하다가 압구정 신나라레코드에서 어제 구한 CD 중 하나도 바로 4중주의 합주용 편곡이었다. 위에 쓴 말러 편곡의 슈베르트 4중주와 드보르작 현악 4중주 12번 '아메리카' 를 영국의 대표적인 관현악단 중 하나인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텔락(Telarc)의 CD였다.

저 CD는 슈베르트보다는 드보르작에 끌려서 샀다. '아메리카' 는 현악 4중주에 별 관심이 없을 때에도 꾸준히 들어왔던 곡이었고, 특히 미국 민요와 흑인 영가풍 멜로디가 자주 사용되고 있어 토속적인 분위기를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 즐겨듣고 있다.

드보르작은 편곡자의 이름이 표기되어 있지 않았는데, 아마도 지휘를 맡은 찰스 로즈크랜스의 편곡으로 여겨졌다. 말러 편곡의 슈베르트는 합주 편곡에서 나타나는 약점들을 보완하기 위해 원곡에 상당한 손질을 가한 것이었지만, 드보르작은 대체로 원본 4중주와 별 다른 점이 없었다. 단지 콘트라베이스가 포르테 악구 등을 위주로 첨가된 것일 뿐이었고.

물론 원래 듣던 4중주 버전에서처럼 바이올린 솔로의 간드러지는 맛이나 정밀함은 아무래도 떨어졌지만, 위에 쓴대로 합주의 풍부한 울림이 그것을 가려주고도 남았다. 특히 느린 악장에서는 오히려 4중주보다도 더 편안하게 들을 수 있었다.

4중주의 합주 편곡은 이외에도 레너드 번스타인 지휘의 베토벤의 현악 4중주 14번과 16번(위의 편곡자와 동일), 앙드레 프레빈 지휘의 베토벤 현악 4중주 14번과 베르디 현악 4중주(역시 동일),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 지휘의 베토벤 현악 4중주 11번(마찬가지) 등이 나와 있었는데, 번스타인과 도흐나니의 것은 찾기 힘들고, 그나마 프레빈이 대형 매장에서 간간히 보일 뿐이다. 세 음반 모두 빈 필하모닉이라는 세계 최강 관현악단 중 하나가 연주한 만큼 연주의 질은 분명히 기대할 수 있을텐데, 아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