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잡설
서울 지역 레코드점 개인평.
머나먼정글
2004. 5. 11. 20:37

방 한 켠을 채우고 있는 수백 장의 CD. 그것들 중 80% 이상이 클래식인 상황이다. 고급 식당에도 거의 가지 않고, 비싼 옷도 몇 벌 없는 현재 상황에서 유일하게 '사치' 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음반 수집인데, 미식가들이 맛집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도는 정도로 몰입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서울 시내의 웬만한 대형 음반점들은 거의 '정복했을' 정도이니.
클래식계 전반이 침체기인 상황인 만큼, 음반을 구하기도 점점 힘들어지는 실정이다. 일본에서는 활성화된 국내 제작 라이센스반이 한국에서는 거의 소멸한 상황이라 비싼 수입반에 의지해야 하고, 그나마 신보들은 물량이 비교적 적은 편이라는 것, 그리고 국내 배급사들이 수익상 불리하다는 음반의 수입을 꺼리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더욱 '레코드 미식가' 인 내 호기심과 스트레스를 동시에 불러 일으키는 것은 절판 혹은 폐반된 음반을 사냥하는 일이다. 물론 야구에 있어서 슬러거가 홈런/삼진 비율이 거의 비등하듯, 내 경우에도 목표했던 희귀반을 손에 넣고야만 것은 계획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한 현실과는 별도로, 전 장르가 통합된 음반 매장의 경우 조용한 분위기에서 음반을 고를 환경이 마땅치 않은 것도 나름대로 불만이다. 매장 전체에 가요를-그것도 내가 '흐름만 최신곡' 이라고 비아냥대는, 그나물에 그밥 발라드와 댄스곡-있는대로 크게 틀어놓는 핫트럭스(가칭???)가 대표적인 예. 웹상에서는 거의 유일한 쇼핑 경로지만, 오프라인 상에서는 그 때문인지 한 번도 음반을 사본 적이 없다.
개인적으로는 클래식/재즈/가요가 분리된 코엑스몰의 애반레코드가 가장 이상적인 환경이라고 여겨지는데, 이 곳도 단일 매장으로서는 한국에서 10위권 안에 들 만한 규모지만 막상 갖춰놓은 음반은 그렇게 다양하지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가격도 좀 센 것 같고.
종로 시사영어사 지하의 뮤직랜드도 분리가 되어 있고 규모도 마찬가지로 큰 편이지만, 애반레코드와 마찬가지의 아쉬움이 남는 곳이기도 하다. 물론 뮤직랜드는 국내에 몇몇 마이너 레이블을 직배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에서 이 곳 아니면 살 수 없는 음반들도 있다. 하지만 나같은 '오래된 것' 을 좋아하는 빈티지 애호가들 외에는 그다지 어필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현재 가장 많이 찾아다니는 체인인 신나라레코드도 마찬가지로 클래식 코너를 가요나 재즈 등 다른 음악과 분리시켜 운영하고 있는 업체다. 나같은 미식가들 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추천하고 싶은 체인인데, 전문화/세분화되어 있는 만큼 음반을 문의하면 성의있게 답해주는 자세가 마음에 든다.
하지만 중/소규모 레코드점들 중에서도 희귀반을 구할 수 있는 곳이 여러 군데 있다. 용산 전자랜드 1층에 있는 예인사는 1980년대 말에 들어왔다가 망각 속에 묻혀버린 도시바 EMI의 일본 작곡가 작품 CD들을 발견한 곳이었고, 명동에 있는 부루의 뜨락은 턴테이블을 아직 돌리고 있던 90년대 후반까지 여러 수입 중고 LP를 사모은 곳이기도 했다.
역시 라이센스반이 그래도 활성화되었던 90년대에는 세운상가 근처의 레코드점들도 자주 찾았다. 그곳들에서는 클래식 음반은 물론이고 지금은 구하기조차 힘든 이동규 1집-넥스트 1기의 드러머-이나 러시아 록그룹 키노의 카세트 테이프, 그리고 인디 계통의 여러 희귀 자료를 입수할 수도 있었다.
이들 레코드점들은 요즘 재정난 때문에 아이쇼핑에 그치거나, 알바를 뛴 돈으로 몰아서 사는 것으로 쇼핑 행태의 정돈 상태가 이루어지는 것 같다. 그리고 21세기 들어서는 월간지 '객석' 에 오페라 관련 글을 기고하는 한 의사가 차렸다는 풍월당이 추가되었다.
풍월당은 클래식 전문점이라는 것이 특이한데, 이러한 형태의 음반 점포는 국내 유일로 알고 있다. 물론 그 특화된 성격 때문에 크로스오버 같은 장르를 덜 취급한다는 점에서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지만, 적어도 돈을 들고 들어가면 뭔가 하나 사들고 나올만한 분위기를 충분히 조성해 준다는 점에서 베스트로 꼽고 싶은 가게다.
전문점 답게 규모는 위의 레코드점들과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작지만, 웬만한 클래식 음반이나 DVD를 골고루 갖추고 있기 때문에 결코 열세에 놓을 수 없는 가게다. 게다가 이 곳에서는 아이쇼핑만 한다고 해도 음료나 과자가 무료로 제공된다-어버이날 갔을 때도 아이스티와 새우깡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나무 위주로 된 내부 인테리어도 운치있고, 점원들도 친절하고 음반 구색에 관해 해박하다.
물론 옥의 티도 있는데, 음반에 가격표가 붙어있지 않아서 계산할 때 낭패를 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교통편이나 가는 길에 있어서 처음 찾는 사람이 버벅댈 소지도 있다. 분당선 연장 구간인 왕십리-선릉이 개통된다면 찾기가 한결 수월하겠지만, 군대 갔다와서도 개통 가능성이 없는 만큼 당분간은 압구정역에서 갤러리아 방향으로 걸어다니는 것을 감수해야 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