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서곡들이다. 베토벤의 서곡 중 널리 알려져 있는 것들이라면 아마 극음악 '에그몬트' 의 서곡, '코리올란' 서곡, 오페라 '피델리오' 를 위해 작곡했던 레오노레 서곡 제 3번과 피델리오 서곡은 절대 빠지지 않을 것이다.
베토벤의 발레와 오페라 작품은 각각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 과 '피델리오' 각 한 편씩 뿐이지만, 전자의 경우 서곡만이 완전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고 후자는 무려 세 차례나 대수술한 뒤에야 성공을 맛보았다. 특히 '피델리오' 는 그 세 번의 대규모 개작 때마다 서곡이 한 편씩 쓰여졌을 정도였다.
'피델리오' 를 위한 서곡은 우선 '레오노레' 라는 이름으로 공개되었을 때 작곡한 것이 세 개, 그리고 현재의 이름으로 최종 수정됐을 때 쓰여진 것 한 개를 포함해 네 곡이 만들어졌다. 레오노레 서곡은 1-3번으로 번호별 정리가 되어 있고, 최종 수정본의 서곡은 오페라의 제목과 동일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번호 순으로 정리된 레오노레 서곡의 경우, 번호가 틀리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사후에 출판돼 138번이라는 맨 뒷쪽 작품번호를 가지게 된 레오노레 서곡 제 1번(Ouvertüre Leonore I)은 사실 제일 마지막인 세 번째로 쓰였고, 2번으로 불리는 것이 맨 처음 쓰여졌다고 밝혀졌다(즉 2-3-1번 순서). 하지만 번호 순으로 작품이 성숙했다고 생각하는 통념 때문인지 1번의 경우에는 연주가 뜸한 편이다.
세 편의 레오노레 서곡은 모두 2막 첫 부분에 나오는 남주인공 플로레스탄의 아리아 '인생의 봄날에(In des Frühlingstagen)' 첫머리가 중간에 삽입되었는데, 3번의 경우 너무 규모가 방대하고 줄거리가 고도로 응축된 탓에 '서곡이 오페라를 압도한다' 라는 지적이 있었다. 그래서 이 1번은 오페라 본편의 소재를 플로레스탄 아리아만으로 한정시켜서 작곡했으며, 최종판인 '피델리오 서곡' 에서는 아예 오페라의 소재와는 무관한 짧은 곡으로 완성하게 되었다.
나머지 '알려지지 않은 서곡들' 의 경우에는 거의 '접대용' 혹은 '생계유지용' 이라는 이유로 종종 폄하되는 경향이 있다. 1809년과 11년 사이에 베토벤은 세 편의 극음악을 썼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첫 작품인 '에그몬트' 다. 하지만 나머지 두 작품인 '아테네의 폐허' 와 '슈테판 왕' 은 현재 거의 연주되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단, 서곡만은 종종 연주된다.
'아테네의 폐허(Die Ruinen von Athen)' 와 '슈테판 왕(König Stephan)' 은 각각 '계몽군주 만세' 와 '이민족 설득용' 이라는 목적으로 쓰여진, 속이 뻔히 들여다 보이는 연극이 원작이었다. 그리스가 이슬람 민족의 지배 등으로 황폐해진 것을 슬퍼하던 아테네 여신이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의 보살핌으로 그리스 정신이 다시 부활한 부다페스트를 칭송한다는 전자와, 헝가리에서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한 슈테판 왕을 찬양하며 헝가리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한 후자의 두 희곡은 당연히 현대에는 공연도 되지 않고 있다.
베토벤은 저 두 편의 희곡에 붙일 음악들을 매우 가벼운 마음으로 썼고, 그 중 '아테네의 폐허' 에서 나오는 '터키 행진곡' 은 모차르트의 것과 함께 피아노 독주용으로 편곡되어 '피아노명곡집' 등의 대중적인 교재에 자주 나오는 소품이 되었다. '슈테판 왕' 의 경우에는 베토벤이 특별히 헝가리 민속 음악을 의식했는지 느리고 빠른 부분이 급작스럽게 교대되거나, 집시 음악의 필수 악기인 침발롬(cimbalom. 양금과 비슷한 타현악기)을 연상시키는 대목이 인상적으로 쓰이고 있다.
1809년에 초안이 작성됐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변경/지연된 끝에 1815년에 완성된 '명명축일(Zur Namensfeier)' 서곡은 제목 그대로 '오스트리아 황제의 명명일을 축하하는' 의미로 쓰여졌다. 하지만 의도와는 달리 평범한 서곡으로 자선 연주회에서 초연되었는데, 출판 때의 제목은 첫 의도대로 붙었다. 베토벤의 서곡들 중 '코리올란 서곡' 과 함께 연주회용으로 작곡된 드문 곡이지만, 그 명성은 '코리올란' 에 한참 못미치는 실정이다.
예술이 특별히 고도의 높은 경지에 오른 것이 아니면 쓸모가 없다는 사고방식이야말로 '엘리트 주의' 를 부추기는 편견이며, 창작자와 향유자를 분리시키는 요인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 게다가 그러한 생각이 '고전-낭만주의 사이에 위치했던', 그리고 '어용 작곡가에서 독립 작곡가로 거듭나고자 한' 과도기의 작곡가 베토벤에게는 특히나 엄격히 적용되는 것 같다.
지난 번에도 이야기한 바 있었지만, '베토벤의 진정한 걸작=무거운 내용 혹은 고심한 흔적이 엿보이는 대작' 이라는 공식은 오히려 '음악의 즐거움' 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되레 베토벤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도 작용하고 있다. 베토벤이 설령 돈이 딸렸다거나, 아니면 후원자들에게 아부하기 위한 작품을 썼다고 해도 그것이 '베토벤의 작품' 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저 곡들을 음반으로 들으려면 교향곡 전집의 빈 칸을 채우기 위해 필업되어 있거나, 아니면 서곡 전집으로 특별히 만들어진 세트를 살 수밖에 없다. 그나마 경제적인 것이 필립스 듀오 CD(2 for 1. 위 사진)인데, 독일 지휘계의 원로인 쿠르트 마주어가 지휘한 서곡 전집이다. 위의 음원도 모두 전집에서 딴 것으로 부담없이 추천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