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잡설

레어 애청곡선-26.샤브리에

머나먼정글 2004. 4. 23. 01:09
근대 프랑스 음악을 이야기 하려면 드뷔시와 라벨이라는 두 대가를 절대로 빼놓을 수 없다. 멜로디/리듬/하모니라는 서양 음악의 3요소에 '색채' 를 더했다고 평가될 정도로 음악의 분위기 묘사에 탁월했던 드뷔시와, 그의 후배 세대이면서 의고주의자로 바로크 음악이나 고전 음악의 양식을 리바이벌시킨 라벨은 분명히 100년이 더 지나도 중요 인물로 남아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 두 대가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거나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 들어보지도 못한 음악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분명히 그들에게는 가르침을 준 선배들이 있었고, 그 선배들은 다리를 놓아주기도 했던 것이었다.


바로 저 위치에 있었던 작곡가로 에마뉘엘 샤브리에(Emmanuel Chabrier, 1841-1894)를 들어야 한다. 샤브리에는 원래 내무성 관료였고, 작곡은 휴가철이나 휴일, 혹은 와병 중에 틈틈히 했을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화학자/의사였던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보로딘과 함께 '일요 작곡가' 로 불리기도 하는데, 그렇게 '취미삼아' 만든 곡들은 이미 취미 이상의 것이 되어 있었다.

샤브리에는 초기의 드뷔시처럼 바그너의 오페라/악극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트리스탄과 이졸데' 를 벤치마킹한 오페라 '그웬덜린(Gwendoline)' 이 그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하지만 샤브리에의 진가는 주로 피아노곡과 관현악 소품에서 발휘되었는데, 프랑스 음악의 대표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간결하고 명료한 하모니와 리듬에 특유의 색채감을 더한 것이었다.

특히 샤브리에의 이름을 가장 유명하게 한 관현악 소품으로 광시곡 '에스파냐(España)' 가 있는데, 1882년에 에스파냐 여행을 다녀온 뒤 그 인상을 표현한 이 곡으로 일약 작곡가 스타덤에 올랐다. 민속 춤곡 호타(jota)의 뛰어오르는 리듬과 민요에서 따온 듯한 매력적인 선율은 정말 일품이다. 당시 프랑스의 최고 사교음악 작곡가였던 에밀 발트토이펠이 왈츠로 리메이크(1883)하기도 했으며, 카라얀과 앙세르메, 오먼디, 바비롤리를 비롯한 많은 지휘자들이 녹음한 곡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시리즈의 '레어' 라는 호칭 때문에 여기서는 '에스파냐' 대신 다른 작품들을 들고자 한다. '에스파냐' 다음으로 가장 인상깊었던 작품이 바로 '전원 모음곡(Suite pastorale)' 이라는 관현악곡이었는데, '10개의 회화 소곡집(Dix pièces pittoresques)' 이라는 피아노곡에서 네 곡을 골라 관현악 편곡한 작품이었다.

특히 첫 곡인 목가(Idylle)는 대학교 다니면서 솔페주-피아노로 직접 반주하면서 멜로디를 계이름으로 부르는 일종의 시창-시간에 부르기도 했는데, 그 때 원곡이 피아노곡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거기에 이어지는 '마을 사람들의 춤(Danse villageoise)' 도 인상적이었지만, 가장 즐겨 듣는 곡은 세 번째 곡인 '자작나무(Sous bois)' 라는 곡이다. 후반부에서 크레센도되는 것 빼고는 시종일관 부드럽고 톡톡 튀는 느낌으로 진행되는데, 들으면서 어린이 동화에 나오는 요정 세계의 분위기를 연상했을 정도였다.

샤브리에의 작품들은 독일/오스트리아나 북유럽/러시아 음악에서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는 '그늘' 이 거의 없는데, 그렇다고 당대의 많은 '경음악' 이나 '사교음악' 처럼 경박한 것도 아닌 매우 독특한 격조와 품위를 유지하고 있다. 아마 이 점이 그의 이름을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들으면서 정말 '즐거운' 분위기를 만끽하고 싶다면 샤브리에의 음악을 강력히 추천하고 싶다.

ⓟ 1991 Philips Classics Produc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