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8월에 남북 분단 이후 최초로 북한의 독립 예술 단체 하나가 남한 땅을 밟았다. 물론 1985년부터 시작된 예술 교류에서 북한의 여러 예술인들이 남한 공연을 가졌지만, 모두 각지의 예술단에서 가려 뽑아 만든 '평양예술단' 같은 임시 조직이었다.
하지만 이 때 답방한 단체는 바로 북한의 유일한 서양식 대편성 관현악단인 조선 국립 교향악단-북한에서는 단순히 '국립교향악단' 혹은 '평양 국립 교향악단' 으로 부름-이었다. 조선 국립 교향악단은 두 차례씩의 단독 공연과 합동 공연을 가졌는데, 이들 공연에서는 '남측' 음악인들인 장한나와 조수미가 북한의 관현악단과 협연하는 등의 '기록' 이 연출되기도 했다.
그 보다 더 의의있었던 것은, 남한 사람들이 최초로 북한 관현악 작품을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예전에도 한민족아리랑연합회 등이 주축이 되어 개최한 음악회에서 북한 관현악 작품이 종종 연주되었지만, 북한에서 개량한 전통 악기와 연주자를 구할 길이 없어서 그냥 서양악기로만 연주되었다.
조선 국립 교향악단의 서울 공연에서 연주된 곡들은 상당히 세심하게 가려 뽑은 것들로, 가능한한 정치색이 적게 묻어나도록 구성되었다. 북한 창작곡으로는 민요 혹은 민요에 기반을 둔 작품들이 선정되었는데, 남북 사람들이 모두 공유할 수 있다는 이유였을 것이다.
분단 후 북한에서도 수많은 관현악 작품이 쏟아져 나왔다. 해방 후에는 황학근의 '바다의 전설' 이나 김옥성의 '농촌의 몸' 같은 작품들이, 전쟁 중에는 리정언의 '승리를 향하여' 나 조길석의 '조국을 위하여' 같은 작품들, 60년대에는 김윤붕의 '경축 서곡', 문경옥의 교향곡 등이 작곡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에 김정일이 예술 분야의 지도자로 부각되기 시작하면서 소위 '영화예술론', '음악예술론', '건축예술론' 등의 책이 나오기 시작했고, 기악 작품의 경우에는 '인민대중들이 잘 아는 기존의 노래로 창작할 것' 을 주문했다. 그 지도 이론에 따라 나온 관현악 작품들이 김린욱의 '내 고향의 정든 집', 김윤붕의 '그네뛰는 처녀', 김영규의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 였다. (이 세 곡은 모두 2000년 남한 공연에서 연주되었다.)
위의 작품들 중 김윤붕과 김영규의 두 곡은 꽹과리, 징, 새납(태평소)이 서양 관현악에 편입되어 있었고, 특히 김영규 작품의 후반부에 나오는 새납의 농악풍 솔로는 서양 관현악에 어떻게 민족성을 '알기 쉽게' 도입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에 하나의 돌파구를 마련했다고 한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위의 악기들 외에 고음저대, 중음저대, 저대 같은 대금속 개량악기들과 고음단소, 단소 같은 단소속 개량악기들이 정식으로 국립교향악단에 편입되었다. 따라서 이들 민족 관악기들과 서양악기를 섞은 '부분 배합관현악' 의 편제가 정식으로 인정되었고, 민족적인 소재로 작곡된 곡들에는 이 편성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 되었다.
저대와 단소류 악기를 배합한 관현악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곡은 바로 최성환(1936-1981)의 '아리랑' 이다. 이 곡은 한민족의 피를 이은 사람이면 절대 다수가 아는 민요 선율로 쓰였기 때문에, 일본이나 미국 등지에서도 자주 연주되고 있다. 특히 중간부를 비통한 단조로 하고 이어지는 '아리랑' 선율의 템포를 빠르게 해서 밀고 나가는 전개는 대중들의 소박한 감성에 쉽게 호소할 수 있는 것이었다.
1980년대에는 그 동안 피바다가극단, 영화 및 방송음악단 등에서 중복 활동하던 국립교향악단이 정식으로 독립했는데, 이 시기에도 관현악의 창작은 계속되었다. 피바다가극단 소속 작곡가였던 강기창(1934-)의 '도라지' 는 개인적으로 1980년대 민요 선율에 의한 관현악 작품 중 가장 인상적이라고 생각되는 곡이다.
이 곡의 경우에는 '아리랑' 과 달리 어두운 면이 없으며, 중간부도 원 선율을 약간 변화시키고 경쾌하게 가져가고 있다. '아리랑' 이 일제 시대 나운규의 영화가 상징하듯 '민족의 비원을 간직한 노래' 인데 반해, '도라지' 는 북한에서도 낙천성을 강조한 민요로 취급되는 듯 하다.
한편 80년대는 주체사상이 북한의 유일한 통치 이념으로 부각되면서, 북한 예술계가 도식적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하는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시기라고도 할 수 있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잇따른 붕괴와 전향은 북한을 점점 '쇄국' 으로 몰아갔고, 민족주의와 지도자에 대한 칭송을 소재로 한 예술작품이 계속 요구되었다.
90년대에는 국립교향악단의 전속 작곡가로 강수기, 한광언, 김정희 등이 새로 배속되었는데, 이들의 작품도 도식을 면치 못하는 작품들이 많기는 하다. 그 대표적인 예로 김연규+강수기가 합작한 두 곡의 교향곡인 '수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와 '경례를 받으시라' 가 있는데, 각각 김일성과 김정일의 '업적' 을 찬양하는 노래로 쓰여진 곡들이다. 철저히 북한 내의 수요에 맞추어진 이들 작품이 대세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민요 소재에 의한 곡들이 열세에 있는 것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하지만 강수기(1953-)의 경우 (역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90년대의 대표적인 민요 주제의 관현악 작품인 '룡강기나리' 를 남기고 있다. 서도 민요의 대표곡을 주제로 만든 작품인데, 구성 자체는 '도라지' 와 유사하며, 민요 자체의 우미함 때문에 그 흥취는 덜하지만 대체로 '그늘' 이 없는 낙천성을 유지시키고 있다.
그 대신, 이 곡에도 나름대로의 발전 양상과 차별성이 존재한다. 위의 '아리랑' 과 '도라지' 가 민요 선율에 서양 화성을 거의 그대로 집어넣어 만든 '버터 바른 쌀밥' 이었다면, 이 곡에서는 화성도 민요 음계를 반영해 2도나 4도씩 쌓아 구성하는 '민족화성' 이론을 도입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위의 두 곡보다 더 현대적인 음향으로 구성되고 있다.
이 세 곡은 앞으로도 남북 간의 문화예술 교류에서 그 매개물 역할을 계속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의 체제 자체가 유연해지지 않는 이상, 이들 작품처럼 계속 시대의 흐름을 이어받을 수 있는 작품이 나오지는 못할 것이다. 문화는 서로 교류하고 공유해야 진정한 의미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물론 이는 북한만이 거듭나야 한다는 문제는 아니다. 그 동안 쉴새 없이 대결 구도를 유지해온 남한에 이들 작품이 소개되어야 나름대로의 '공정한' 비판 의식과 교류 의식이 확산될 것이며, 그런 점에서 관련 정부 기관들의 유연한 자세 또한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