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외잡설

글쓰기.

머나먼정글 2004. 3. 14. 02:49
솔직히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책을 '읽는' 것은 좋아했지만, 글쓰는 분야에서는 좀 젬병이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반공' 이라는 개념이 계속 주입되는 시절이었고, 반공에 관한 글짓기를 할 때면 항상 난감했다.

반공이라는 개념에 거부감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솔직히 그 나이에 그런 것을 깨우쳤다면 지금 음악하고 있지는 않았을 듯-, 담임이 내준 어마어마한 원고지 수량을 또 괴상한 패턴의 반복으로 때워야 하는 압박감 때문이었다.

그 때 쓴 원고지들이 지금은 없어져 버렸지만, 있다고 해도 쪽팔려서 절대 내놓지 못할 것 같다. 초등학교 때의 국어 관련 과목들의 점수도 전반적으로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 그리고 중학교 초반 때도 마찬가지였고.

마침 중학교 시절에는 대학 입시 과정에서 '논술' 이 중요하게 취급된다는 보도가 언론을 통해 나돌고 있을 때였다. 그 당시에는 뚜렷하게 음대에 가야겠다는 목표 의식도 없었고, 자연계 과목이 특히 약했던 만큼 언어와 외국어 쪽이라도 보완해야 겠다는 것이 부모님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중학교 2학년 때 따로 '논술' 과외를 받게 되었다. 수많은 과외를 받아온 나였지만, 이 때만큼 선생-제자 간의 상성이 최고조였던 적도 없었다. 과외 선생의 교습은 주로 신문 사설을 읽고 요점을 줄쳐서 제출하기, 단편 소설을 읽고 그 독후감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쓰기의 두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저 방식 덕택에 나는 신문 사설에서 행간을 읽는 방법을 배웠고, 사설의 논조를 모방해서 무거운 주제의 글을 쓰는 기법도 터득할 수 있었다. 또 독후감을 위해 읽은 단편소설 중 특히 최서해의 '탈출기' 와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에 푹 빠지기도 했다. 사실상 이 때부터 소설 읽기에 재미를 붙였다고도 할 수 있다.

논술 과외는 불과 1년 정도로 끝났다. 중학교 말 부터는 아예 논술이 필요 없는 음대 진학을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과외 선생은 마지막 날, 자기가 최근에 감명깊게 읽은 책이라며 선물을 주고 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선물은, 당시 한국의 반일 냄비 근성을 뜨겁게 달구었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라는 소설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선생을 싫어하게 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점 때문에 중학교 때 가장 많이, 그리고 소중하게 배웠던 것은 바로 이 '논술' 이었다고 생각된다. 그 뒤로는 계속 이러한 훈련을 쌓을 시간도, 기회도 없었지만, 인터넷 덕분에 다시금 써갈기고 살 수 있는 것도 또 하나의 행운인 것 같다. 종이에 쓴다면 악필이라서 다른 사람이 읽지도 못할 글이지만, 온라인에서는 오타나 문법 오류 같은 것만 조심하면 되니까. 글로 먹고 살지는 못하더라도, 쓰는 능력을 얻게 된 것 자체로 만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