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ängler, 1886-1954)는 음악 관련 문헌을 찾아보면 20세기 중반까지 토스카니니와 쌍벽을 이루던 대지휘자라고 소개되어 있다. 하지만 정작 그가 세 곡의 교향곡을 비롯해 많은 작품을 남긴 작곡가라는 사실은 누락되어 있기 일쑤다.
지휘자는 기본적으로 작곡과 피아노를 전문적으로 훈련받기 때문에, 작곡가나 피아니스트를 겸업으로 하는 사람이 어렵잖게 발견된다. 국내 지휘자들 중에서도 임헌정이나 박태영 같은 지휘자들은 앵콜 피스 등을 직접 편곡해 무대에 올리기도 하며, 이러한 지식은 악보 연구 등에도 도움이 된다.
사실 푸르트벵글러가 처음 목표했던 것은 작곡가였고, 1893년부터 피아노 소품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2년 후에는 이미 피아노 소나타 등의 대곡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10대 후반에는 교향곡의 창작까지 시도했다.
푸르트벵글러는 불과 20세 때 뮌헨의 카임 관현악단(현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지휘자로 데뷰했는데, 그 때 프로그램은 베토벤의 서곡 '헌당식', 자작의 '관현악을 위한 아다지오(교향곡으로 착상했다가 1악장만으로 끝난 작품)', 그리고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 9번이었다. 당시 거의 연주되지 않던 브루크너가 메인인 것도 놀랍지만, 자작곡을 당당히 데뷰 무대에 올린 뱃심도 놀랍다.
그러나 작곡을 하게 되면서 얻은 심한 불면증은 푸르트벵글러의 청소년기에 가장 큰 문제였고, 고고학자로 유명한 아버지 아돌프가 일찍 타계하는 바람에 생계 활동을 위해 지휘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었다. 게다가 브레슬라우(현 폴란드 브로츠와프)에서 초연한 '테 데움(1902-09)' 같은 자작곡들이 연이어 좋지 않은 평가를 받은 것도 그 이유였을 것이다.
이후 푸르트벵글러는 베를린 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 빈 필에 이르는 세계적인 관현악단의 상임지휘자로 성장했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을 '지휘하는 작곡가' 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작곡에 대한 미련은 중단 후 13년만인 1932년에 그 해결점을 찾게 되었다.
1935년에 완성된 피아노 5중주로 푸르트벵글러는 다시 작곡가로서의 자신을 시험하기 시작했고, 두 곡의 바이올린 소나타(1935-37/1938-40)와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교향 협주곡(1920경-1937)' 같은 스케일 큰 기악곡이 계속 발표되었다. 그 중 바이올린 소나타 제 1번은 1994년에 강동석이 녹음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나치의 집권과 2차대전의 참상은 독일인 푸르트벵글러에게도 예외가 아니었고, 그는 독일에 남아서 활동하는 길을 선택해 전후 연합국으로부터 '전범' 이라는 주홍글씨를 달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푸르트벵글러는 짬을 내어 계속 작곡을 했는데, 결국 10대 시절의 숙원이었던 교향곡 제 1번(1938-41)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푸르트벵글러는 스스로 작품 자체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어둡고 장대한 저 교향곡의 리허설을 취소했고, 결국 1번은 생전에 초연되지 못했다. 대전 말기인 1944년에 착수한 교향곡 제 2번은 대전 후 연합군의 비나치화 심리 때문에 공적 활동이 중지된 시기에 대부분이 작곡되었다.
2번은 그리하여 유일하게 푸르트벵글러 생전에 연주된 교향곡이자, 대중적으로 가장 성공한 작품이 되었다. 푸르트벵글러는 이 곡을 빈 필, 베를린 필, 프랑크푸르트 방송 교향악단 등을 지휘해 유럽 각지에 소개했으며, 1951년에는 베를린 필과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녹음까지 했다. (현재 The Originals 시리즈로 슈만 교향곡 4번과 함께 2CD로 발매중)
그러나 세 곡의 교향곡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마지막 곡인 3번이다. 1952년부터 작곡이 시작되었지만, 날로 악화되는 건강과 전작인 '교향 협주곡', 교향곡 2번의 개정 작업은 이 곡의 완성에 큰 걸림돌이었다. 타계하던 해였던 1954년에 가까스로 완성했지만, 마지막 4악장을 계속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개작이나 재창작을 심각하게 고려했다고 한다.
교향곡 제 3번은 전작인 1번과 2번에 비해 길이가 많이 짧으며, 그 때문에 내용은 가장 무겁지만 형식이 가장 간결하게 정리되어 있는 곡이다. 그가 평생에 걸쳐 연구하고 본보기로 따랐던 베토벤, 브람스, 브루크너 세 작곡가의 영향도 엿볼 수 있으며, 리듬의 창의성이 부족한 대신 끝없이 계속되는 듯한 선율과, 조성을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변화무쌍한 화음 진행은 후기 낭만파의 사고를 가지고 있던 작곡가가 다다른 가장 극단적인 경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번의 3악장판은 카일베르트(Joseph Keilberth) 지휘의 베를린 필에 의해 1956년 1월 28일에 초연되었다. 그러나 푸르트벵글러 탄생 100주년이었던 1986년에 푸르트벵글러 만년의 맹우였던 유디 메뉴인(Yehudi Menuhin)이 푸르트벵글러의 미망인 엘리자베트에게 승인받은 4악장까지 포함한 전곡판을 베를린에서 초연했다.
이 때문에 교향곡 제 3번은 3악장판과 4악장판 두 가지 악보 중 택일해 연주되고 있다. 전자는 카일베르트와 마젤, 자발리슈(Wolfgang Sawallisch)가, 후자는 발터(Alfred Walter)와 알브레히트(George Alexander Albrecht)가 채택한 바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곡이 결코 미완성이 아니기 때문에, 4악장판 연주가 훨씬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3번의 음반은 자발리슈 지휘/바이에른 국립 관현악단의 미완성판(1980.1.7 뮌헨 실황. Orfeo)과 알브레히트 지휘/바이마르 국립 관현악단의 보필 완성판(1998.11.28-29 바이마르. Arte Nova) 두 가지다. 이 중 알브레히트의 음반은 5000-6000원의 염가반으로 나와 있다.
작곡가의 의도를 존중한다면 물론 자발리슈의 음반에 손을 들어주겠지만, 4악장을 추가한 알브레히트의 것도 물론 무시하기에는 아깝다. 하지만 실황 특유의 생생함과 해석에 있어서는 자발리슈의 것이 우세하며, 알브레히트의 녹음은 음량과 스케일이 작은 것이 사실이다. 보필판의 좋은 연주가 나오기를 기대할 수밖에.
참고로 4악장판의 녹음은 위의 알프레드 발터가 지휘한 벨기에 방송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인 마르코 폴로의 CD가 하나 더 있는데, 앞에 소개한 곡들과 마찬가지로 마르코 폴로의 수입이 막힌 현재 추천하기가 버거운 앨범이 되었다. 게다가 낙소스 홈페이지의 카탈로그에서도 사라졌는데, 낙소스 레이블로 재발매를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