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메리카, 혹은 라틴아메리카는 예로부터 여러 가지 춤곡으로 유명한 나라가 많다. 아르헨티나의 탕고, 브라질의 삼바가 그 대표적인 케이스고, 이러한 춤곡들은 유럽이나 미국으로 건너가 그 쪽 특성에 맞게 변형되거나 여러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예술음악 쪽에서 이들 나라의 영향력은 아직까지 미약한 편이다. 워낙 유럽 음악, 특히 독일-오스트리아 음악의 권위가 지금도 유효한데다가,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작곡가들이 20세기가 되어서야 속속 등장했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는 요 근래에 '탕고 누에보' 라는 흐름의 한 인물이었던 아스토르 피아소야(피아졸라)로 인해 덕을 많이 본 나라다. 하지만 아르헨티나 스승이었던 알베르토 히나스테라(Alberto Ginastera, 1916-1983)가 아니었다면 피아소야는 단순히 반도네온 주자로 남아 있었을지 모른다.
히나스테라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고, 고향 음악원에서 배운 뒤 데뷰한 작곡가였다. 현재 연주되는 대부분의 작품은 이 때부터 40년대 중반 까지의 초기 작품이 많다. 2차대전 후에 히나스테라는 무조와 12음 등 현대 작곡기법을 받아들여 작품을 썼으며, 말년에는 스위스에 머물며 활동을 이어갔다.
히나스테라는 시대의 조류에 대단히 민감한 작곡가였고, 이러한 면모 때문에 그는 종종 카멜레온처럼 자신의 스타일을 바꿔 나간 스트라빈스키와 비교되기도 한다. 엄격한 자기 비판 끝에 살아남아 작품 번호 1b번을 부여받은 1937년작 발레 '파남비(Panambi. 나비)' 와 만년의 작품(1981)인 피아노 소나타 제 2번을 비교하면 다른 사람의 작품으로 혼동될 정도다.
하지만 히나스테라의 전 생애에 걸친 작품들에는 아르헨티나의 전통음악 요소가 항상 녹아 있었고, 현대 기법을 쓰더라도 청중들의 입장을 항상 고려해 '듣기에 편한' 작품을 쓰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작곡 성향은 헝가리의 버르토크, 코다이나 에스파냐의 파야, 로드리고에게도 나타나는 것으로, 이들의 음악은 히나스테라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히나스테라 작품으로 처음 들어본 것은 발레 '에스탄시아(Estancia)' 작품 8이었는데, 현재 대전시향 음악감독인 함신익이 지휘한 KBS 교향악단 연주였다. 당시 연주회에서는 이탈리아의 거장 바이올리니스트인 살바토레 아카르도가 협연한 파가니니 협주곡이 화제가 되었지만, 그보다는 후반 프로그램으로 연주된 이 곡과 레스피기의 '로마의 소나무' 가 더 인상적이었다.
'에스탄시아' 의 연주 전에 지휘자가 약간의 해설을 했는데, 발레곡인 만큼 몸을 흔들며 들을 수 있는 리드미컬한 곡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연주로 증명되었다. 지금 와서 따져보면 템포가 느려서 그렇게 '흥겨운' 것은 아니었지만, 히나스테라라는 작곡가의 초기 작풍을 파악하는데 부족함은 없었다.
관현악 편성은 2관 편성(목관악기인 플루트/오보에/클라리넷/바순이 각 2개 씩 편성됨)의 평균적인 것이었지만, 무대 뒤에 늘어선 일곱 명의 타악기 주자(팀파니 포함)들이 상징하듯 그 리듬의 활력이 대단한 곡이었다.
'에스탄시아' 는 아르헨티나에서 대지주가 소유하는 목장이나 농장을 일컫는 단어인데, 제목에서부터 이 곡이 아르헨티나의 자연과 사람들을 소재로 한 곡임을 알 수 있다. 1941년에 미국의 캐러밴 발레단이 요청해서 작곡된 곡으로, 이후 작곡가가 네 곡의 모음곡으로 추려낸 것이 현재의 형태가 되었다.
에스파냐어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 각 곡의 표제를 해석할 수는 없었지만, 첫 곡부터 대략 아르헨티나 카우보이인 가우초들의 묘사, 갈대의 춤, 로데오, 말람보(아르헨티나 민속 춤곡의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
'에스탄시아' 의 녹음은 멕시코 지휘자인 엔리케 바티스가 지휘한 로열 필하모닉의 연주(ASV)를 비롯해 몇 가지를 구할 수 있는데, 지금 가지고 있는 음반은 프랑스의 나이브(Naïve)에서 나온 데이비드 로버트슨 지휘의 리용 국립 관현악단 연주다.
ⓟ 2000 Naïve
이 야성적이고 리드미컬한 곡을 즐기기에는 녹음 레벨의 낮음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이것은 볼륨을 좀 높여서 들으면 해결될 문제다. 처음 접했던 KBS 교향악단의 연주가 '교향적' 이었다면, 이 연주는 발레의 성격에 더 근접해 말쑥한 소리와 경쾌한 템포를 보여주고 있다.
나이브의 CD에는 그 외에도 위에 언급한 또다른 발레 '파남비' 와 1956년작인 하프 협주곡, 후기에 속하는 1976년작인 'Glosses sobre temes de Pau Casals(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 탄생 100주년 기념작)' 도 들어 있어 이 작곡가의 창작 성향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