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선곡은 어쩌면 '레어' 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주위에서 찾아볼 수 있는 소위 '명곡해설집' 에서 저 작곡가의 이름을 찾기는 그리 쉽지가 않다. 물론 클래식 기타 동호회 같은 단체의 회원이라면 분명 저 작곡가의 이름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알베니스=기타음악 작곡가' 라고 오해를 받기도 하는데, 알베니스는 굉장한 솜씨의 피아니스트였으며 기타를 위한 작품은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같은 에스파냐 작곡가인 호아킨 로드리고도 기타를 칠 줄 몰랐으면서도 '아란후에스 협주곡' 같은 훌륭한 기타 작품을 남긴 바 있어서 종종 기타리스트로 혼동되기도 한다.
알베니스(Isaac Albéniz. 1860-1909)는 에스파냐 북동부의 캄프로돈에서 태어났는데, 불과 네살 때 바르셀로나에서 피아니스트로 데뷰했다고 한다. 여덟살 때는 처음으로 작곡을 시도했고, 열다섯살 때는 바다 건너 푸에르토리코와 쿠바 등지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피아니스트였던 작곡가들이 수많은 피아노곡을 남긴 것처럼, 알베니스도 평생 동안 수백여 편의 피아노 음악을 작곡했다. 물론 20대 중반부터 10여 년 동안 에스파냐 민속 오페라인 사르수엘라(Zarzuela)를 몇 편 작곡하기도 했지만, 그의 본색은 피아노 음악에서 최대한 발휘되었다.
불행히도 알베니스는 50세를 못넘기고 신장병 때문에 프랑스 남서부의 캉보르뱅에서 타계했는데, 죽기 직전 쇠약해진 몸을 추스려 마지막으로 완성한 걸작 피아노곡이 바로 '이베리아(Iberia)' 다. 각 세 곡씩 모두 네 권으로 나뉘어진 대규모 작품인데, 프랑스에서 죽어가던 작곡가가 고국인 에스파냐-특히 안달루시아 지방-에 바치는 마지막 인사였던 셈이다.
이 곡이 아직까지도 평가가 많이 유보된 이유는 바로 '연주하기가 엄청나게 어려워서' 다. 물론 '샤인' 에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이 거론된 적이 있지만, 이 곡은 독주곡인 데다가 피아노를 어느 정도 치는 사람이라도 악보를 읽는 것부터 짜증이 밀려온다고 할 정도다.
권당 세 곡씩 모두 12곡인 전곡을 한 무대에서 연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도 나올 정도고, 실제로 내가 아는 바 한번도 없었다. 악보는 태림출판사의 것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데, 때로는 2단 악보도 모자라 3단으로 펼쳐지는 엄청난 음표의 홍수를 보면 아마 경악할 것이다.
이 곡집은 프랑스 작곡가들, 특히 드뷔시와 메시앙의 극찬을 받은 바 있었다. 드뷔시의 경우 3권의 첫 곡인 '엘 알바이신' 을 독자적인 경지에 오른 보기 드문 걸작이라고 평했고, 4권의 마지막 곡인 '에리타냐' 도 그 다채로운 색채의 음이 굉장히 매력적이라고 한 바 있었다.
알베니스의 작품은 위에 쓴 대로 기타곡으로 자주 편곡되곤 하는데, 알베니스도 생전에 이러한 말을 듣고 좋아했다고 한다. '이베리아' 의 전곡에는 확실히 플라멩코 등의 열정적인 기타 연주를 연상시키는 대목이 상당히 많으며, 음악 자체로도 에스파냐 색이 물씬 풍기므로 나름대로 효과적이다.
하지만 역시 원곡을 들어봐야 한다. 피아노의 넓은 음역과 페달 지속음을 이용한 스케일은 기타의 그것으로도 모방할 수 없다. 물론 이 곡을 무대에서 듣기란 쉽지가 않을 것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발췌라도 몇 곡을 들어 본다면 이 곡이 왜 지금까지도 그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는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계속 소개하고 있는 '낙소스' 의 홈페이지에도 이 곡의 음원이 있기는 하지만, 별로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차라리 돈을 좀 들여서 에스파냐 출신의 거장 알리시아 데 라로차(Alicia de Larrocha)의 음반을 사기를 권한다. 라로차는 이스파복스(EMI 에스파냐 지사)에서 한 번, 데카에서 두 번씩 모두 세 번의 전곡 녹음을 남겼고, 그만큼 이 곡집에 관해 확고한 주관을 가지고 있는 피아니스트다.
ⓟ 1998 Decca Record Company Limited
지금 가지고 있는 CD는 두 번째 전곡 녹음으로, 데카에서 무시카 에스파뇰라(Música Española)라는 2 for 1(두 장을 한 장 가격으로 판매) 시리즈로 나오고 있다. 알베니스가 이베리아의 후속편으로 구상했다가 미완성으로 끝나 후배인 데오다 드 세브락이 완성한 '나바라' 도 들어 있고, 그 외에 말라게냐나 탱고 같은 소품들과 파야(Manuel de Falla. 1876-1946)의 '네 개의 에스파냐 소품' 도 들을 수 있다.
저 세트는 값도 비교적 저렴하므로 추천할 수 있지만, 2권의 두 번째 곡인 '알메리아' 의 중간에 원본 테이프의 결함으로 보이는 저음부 잡음이 있는 것이 옥의 티다. 데카에 남긴 두 번째 전곡 녹음은 좀 비싸긴 해도 디지털 녹음인데다가, '나바라' 와 '에스파냐 모음곡' 을 같이 담고 있어서 나름대로 장점이 있을 것이다.
라로차가 이스파복스에 남긴 첫 전곡 녹음은 EMI에서 새로이 나오고 있다고 하는데, 정열적인 면으로 따지면 데카의 두 녹음을 상회한다고 한다. 그 외에 도이체 그라모폰 등에도 이베리아의 전곡 음반이 있다고 하는데, 리뷰 등을 찾지 못해 권하기가 좀 그렇다.
이베리아는 또 그 다양한 색채 때문에 관현악 편곡도 되어 있는데, 에스파냐 지휘자인 엔리케 아르보스의 편곡이 가장 유명하지만 열두 곡 중 아홉 곡과 나바라 뿐이다. 아르보스판은 앙세르메(Ernest Ansermet)의 지휘로 된 것 외에 여러 음반이 나와 있다고 한다.
이베리아 전곡의 관현악 편곡은 슬로바키아의 작곡가/피아니스트/지휘자인 페터 브라이너(Peter Breiner)가 완성했고, 낙소스의 CD(8.553023)로 들을 수 있다. 색소폰, 기타, 카우벨(소방울) 등 다양한 악기를 첨가해 독특한 색감을 느낄 수 있다. 단, 저 CD는 악명높은 모스크바 교향악단의 연주인데다 녹음 레벨도 너무 낮아서 듣기가 좀 버겁다. 브라이너판으로 좀 더 좋은 연주가 나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