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소개할 라차리(Sylvio Lazzari, 1857-1944)는 1회에 다룬 볼프-페라리보다도 더 애매한 정체성의 소유자다. 당시 오스트리아 땅이었던 보첸-지금은 이탈리아 땅이 되어 있고, 볼차노라고 부름-에서 이탈리아인 아버지와 오스트리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1892년에 프랑스 시민권을 얻어 파리 근교의 쉬르센에서 타계한 작곡가라면 아마 어느 정도 이해가 될 듯 하다.
라차리는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음악가의 길을 걸었던 입지전의 인물이었는데, 바이올린을 인스브루크와 뮌헨, 빈에서 배운 것 외에 작곡 수업을 파리 음악원에서 에르네스트 기로(비제의 동료 작곡가)와 세자르 프랑크에게 받았다. 아마 이 프랑스 수업이 그의 일생을 좌우했던 것 같으며, 실제로 스승 프랑크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1894년에는 그의 바이올린 소나타가 당대 유명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외젠느 이자이의 연주로 초연되기도 했고, 이후 계속 프랑스를 무대로 다섯 편의 오페라를 비롯한 작품들을 계속 작곡했다. 하지만 오페라의 경우에는 대본의 미숙함, 오페라 극장장들의 오해와 거절 등으로 인해 지금까지도 제대로 상연을 보지 못하고 있다.
라차리는 프랑스가 독일군 점령 아래 있을 때도 계속 파리 근교에 머물렀는데, 작곡가로서는 이례적으로 87세까지 장수했다. 하지만 만년에 그는 시력 저하로 인해 크게 고통받았고, 폐 색전증으로 타계한 이후에는 몇몇 음악 사전들에서도 누락될 정도로 까마득하게 잊혀졌다. 드뷔시와 라벨이 프랑스 근대 음악의 거장으로 인정받는 추세에 있어, 라차리의 보수 성향-물론 그 당시 기준이다-이 이러한 평가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리고 만년의 라디오 인터뷰 등에서 그는 독일 음악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라디오 인터뷰 등에서 피력한 바 있는데, 이러한 발언은 독일 점령군에게 아부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독일-오스트리아 혈통의 소유자로서 독일 음악에 대한 친화력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르며, 실제로 그의 오페라에서는 바그너의 영향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라차리의 작품은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을 비롯한 유명 출판사들에서 악보가 간행되었다고 하지만, 이들 악보를 구하기는 힘들다. 따라서 연주나 녹음도 뜸할 수밖에 없으며, 국내에서 그의 작품이 연주되었다는 소식은 아직도 듣지 못했다.
지난번 부터 계속 예를 들고 있는 낙소스의 홈페이지에서 그의 교향곡 E플랫장조(1907)와 관현악 모음곡 '바다 풍경(1920)' 이 들어 있는 CD가 마르코 폴로 레이블로 출반되었다는 것을 보았는데, 이것이 처음으로 들어본 라차리 작품이었다. 하지만 이 CD는 처음 출반된지 불과 5년도 채 못되어 카탈로그에서 사라져 버렸다.
무슨 이유인지는 나도 궁금한데, 마르코 폴로가 채산성의 이유로 낙소스 본사에서까지 점차 버림받는 듯한 냄새가 풍긴다-물론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마르코 폴로의 CD 여러 장이 카탈로그에서 사라져 버린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 1996 HNH International Ltd.
마르코 폴로에서 나온 CD 중에서 가장 즐겨 듣는 것은 교향곡이다. 같이 커플링된 '바다 풍경' 은 이미 드뷔시의 '바다' 에 길들여져서 그런지, 표제음악임에도 그다지 연상 작용이 되지 않아서 별로 듣고 있지 않고 있다. 게다가 세 번째 곡의 표제인 '황야의 양치기' 는 이 연곡의 제목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 어리둥절하기까지 하다.
작곡가가 프랑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교향곡이 증명해 주는데, 우선 프랑크의 유일한 교향곡과 마찬가지로 3악장 구조로 되어 있다. 1악장은 느린 서주가 붙으며, 2악장이 중간에 스케르찬도(scherzando)라고 명시된 부분이 첨가된 3부 형식인 것도 프랑크의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마지막 3악장에서도 선행 악장들의 주제가 도입되는 '순환 형식' 을 역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 곡에도 분명한 약점이 존재한다. 무려 50분에 가까운 연주 시간이 요구되는 대곡이지만, 그가 모델로 삼았던 프랑크나 쇼송의 교향곡과 비교해 보면 내용 면에서 떨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의 독일적 성향이 부정적으로 작용했는지는 몰라도, 프랑스 풍의 간결한 주제를 너무 독일 낭만파 식으로 길게 늘이려 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약점을 가지고 이 곡을 무시하기에는 아직 먼 것 같다. 볼프-페라리의 실내 교향곡과 마찬가지로 이 곡에서도 프랑스의 낙천성과 간결함, 이탈리아의 노래에 어울리는 부드러운 선율, 그리고 독일 식의 구조가 가지는 장점을 인정할 수 있다. 이것이 연주를 통해 생명력을 다시금 얻게 된다면, 그 결과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마르코 폴로 CD는 아드리아노 지휘의 모스크바 교향악단 연주인데, 글라주노프에서 미운 털이 박힌 지라 이 연주가 좀 약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실제로 2악장 중간부의 바이올린 반주 음형을 비롯해 여러 군데에서 흐트러진 연주가 나오고 있고, 이러한 헛점이 곡의 약점을 더욱 부각시키는 것 같다.
그러나 현 상황에서 이 곡을 CD로 들으려면 이것 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으며, 마르코 폴로를 비롯해 스웨덴의 슈테를링(Sterling)에서 계속 잊혀진 관현악 작품을 녹음하고 있는 아드리아노의 용기를 높이 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조금 더 과감하고 열정적인 연주가 담긴 음반이 발매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