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잡설

레어 애청곡선-2.글라주노프

머나먼정글 2004. 1. 18. 17:00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Alexander Glazunov, 1865-1936)는 아마 러시아 음악사 사상 최고의 신동일 것이다. 겨우 열여섯살 때 리스트의 눈에 들어 바이마르에서 교향곡 제 1번을 초연했는데, 이 러시아 최연소 교향곡 작곡 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글라주노프는 작곡가로서 기억되는 일이 별로 없다. 기껏해야 바이올린 협주곡이라던가, 교향시 '스텐카 라진' 같은 곡들이 거론될 뿐이다. 이는 그의 창작 성향 때문이기도 한데, 그는 감정을 중시하는 러시아 악파들과 달리 탄탄한 이론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썼기 때문이었다.

평론가 카라티긴과 작곡가 미야스코프스키는 글라주노프의 작품에 '탄탄한 구조를 넘어서는 정신적인 감동이 부족하다' 라고 평했고, 이 평가는 지금도 유효할 수밖에 없다. 소련 3대 작곡가 중 한 사람으로서 그의 제자였던 쇼스타코비치도 '글라주노프의 작품은 클라이맥스가 현저히 떨어진다' 고 이야기하고 있다.

글라주노프는 오히려 교육자로서의 업적이 더 높이 평가되곤 한다. 그는 대부분 아마추어로 시작한 러시아 작곡가들 중에서 림스키-코르사코프와 함께 러시아 음악의 체계적인 교수법을 끊임없이 연구/실천했으며, 그가 원장으로 있었던 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 음악원에서 수많은 학생들을 키워냈다.

비록 그가 스트라빈스키, 프로코피에프, 쇼스타코비치 등 제자들의 현대음악-심지어 그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드뷔시도 포함됨-을 경계심으로 바라보았다고 해도, 글라주노프는 결코 그들의 창작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장인 정신' 은 지금도 러시아 작곡가들의 전통으로 남아 있다.

글라주노프는 생전에 모두 아홉 곡의 교향곡을 썼는데, 베토벤 이래로 계속되어 오던 '9번 교향곡' 의 징크스는 그도 깨지 못했다. 게다가 마지막 9번은 브루크너처럼 미완성으로 남았는데, 글라주노프의 교향곡이 러시아에 있을 때 비교적 단기간에(16세 때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쓰여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안타까운 일이다. 이 9번 교향곡은 1악장 만이 가브릴 유딘의 관현악 편곡으로 출판되었다.

개인적으로 글라주노프의 교향곡들도 마찬가지로 위에 쓴 러시아 평론가/작곡가들의 평이 적용된다고 생각하지만, 작품에 힘을 불어 넣어주는 연주가들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방대한 러시아 관현악 작품의 음반을 자랑하는 지휘자 예프게니 스베틀라노프, 전설로 남아 있는 예프게니 므라빈스키의 음반이 최근 들어 국내에도 소개되면서 이 곡들도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글라주노프 교향곡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4번과 5번 두 곡이다. 후기의 작품인 7-9번은 너무 학구적인 듯 해서 재미를 붙이지 못했으며, 러시아 전통음악의 요소를 나름대로 다듬고 서구의 교향곡 형식에 붙여서 성공한 것은 중기의 4-6번이 아닌가 싶다.

이 중 4번은 1악장의 서글픈 코랑글레(흔히 잉글리시 호른이라고 함) 선율이 인상적인데, 여러 해 동안 키웠던 강아지를 떠나 보내고 방에 틀어박혀 눈물을 흘리면서 들었던 개인적인 경험이 있는 곡이다. 5번은 빈약한 음반으로 들었다가 실제 공연에서 거의 압도적인 느낌을 받아 애청곡 대열에 진입했다.

두 곡 모두 한국 초연을 러시아 유학파 지휘자인 박태영씨가 했는데, 4번의 경우 2002년 교향악축제 실황이 전주시향 자체 제작 CD에 담겨 있고 5번은 내가 KBS 1FM의 2003년 교향악축제 실황 방송을 자주 제작으로 만든 CD에 담아 듣고 있다. 이들 실황은 지방 악단의 기술적인 문제가 여전히 마음에 걸려도, 연주 자체는 밑에 씹을(?) 음반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열정적이다.

글라주노프 교향곡 전곡 음반은 지난 회에도 거론한 낙소스에 알렉산드르 아니시모프 지휘의 모스크바 교향악단 연주로 있지만, 이들 CD는 러시아 악단 치고는 굉장히 밋밋한데다가 녹음 레벨도 너무 낮아서 듣기에 답답할 정도다. 물론 '이런 곡이 있구나' 라고 참고용으로 듣기에는 그리 나쁘지 않다.

4번의 경우 위에 예를 든 박태영 지휘 전주시향 비매품 CD-이것은 전주시향에 직접 문의하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를, 5번은 므라빈스키 지휘의 연주-일본 레이블인 알투스(Altus)의 CD가 있음-가 나을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