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잡설
레어 애청곡선-1.볼프-페라리
머나먼정글
2004. 1. 17. 03:30

에르만노 볼프-페라리(Ermanno Wolf-Ferrari, 1876-1948)는 특이한 성씨에서 알 수 있듯이 독일인 화가 아버지와 이탈리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상반되는 두 특성을 함께 타고난 터라 그의 작품은 종종 '이탈리아 음악과 독일 음악의 짬뽕일 뿐, 개성이 결여되어 있다' 라는 평을 듣는다.
실제로 이 두 혈통을 모두 지닌 탓에 볼프-페라리의 삶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창작 면에서도 이탈리아 오페라와 독일적인 기악곡을 오가며 끊임없는 방황을 해야 했고, 양차 세계대전은 그에게 육체적/정신적 타격을 안겨 주었다.
게다가 볼프-페라리는 사후에 찬밥 신세가 된 여러 작곡가들의 운명 또한 지니고 있는데, 국내에서 그의 이름은 오페라 '성모의 보석' 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것도 오페라 전곡이 아닌, 두 개의 관현악 간주곡만이 '명곡' 으로 소개될 뿐이다.
하지만 그가 기악 분야에서 보여준 작품성은 선대 작곡가들인 멘델스존이나 슈만, 브람스 같은 독일 작곡가들의 구축력에 이탈리아 혈통의 낙천성과 선율성이 뒤섞인 것이라고 해도, 충분히 개성적이다. 특히 그의 실내악 작품 중 내가 가장 즐겨 듣는 것이 바로 실내 교향곡(Sinfonia da camera) 작품 8이다.
실내 교향곡은 목관 5중주(플루트+오보에+클라리넷+호른+바순)와 현악 5중주(바이올린 2/비올라/첼로/콘트라베이스), 그리고 피아노까지 11명의 연주자를 위해 쓰여진 곡으로, 작품 번호에서 알 수 있듯이 초기의 작품이다.
1악장 첫머리에서 피아노의 반주에 실리는 클라리넷 멜로디는 이탈리아 혈통으로서 뛰어난 선율 감각을 예상하게 하는데, 오히려 주제를 엮어 나가는 솜씨나 동기 발전에 관해서는 슈만 등 독일 낭만파 작곡가들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이러한 상반된 요소가 서로 충돌하기 보다는 오히려 굉장히 독특한 매력을 풍긴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하지만 이러한 개인적인 평가와 달리, 이 곡 역시 다른 볼프-페라리의 기악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연주가 뜸하고 음반도 적은 편이다.
그나마 들을 수 있는 것은 낙소스의 산하 레이블인 마르코 폴로(Marco Polo)에서 나온 CD로, 노르웨이의 실내악 그룹인 MiNensemblet의 것이 있다. 하지만 마르코 폴로는 연주가 뜸한 곡들을 전문으로 발매하는 레이블이고, 채산성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국내에는 몇 년 전부터 거의 수입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p.s.: 그리고 2월에 프라임 필이 베를린 필 수석 오보이스트인 알브레히트 마이어를 초청해 정기연주회를 가진다는데, 마지막 프로그램이 이 작곡가의 오보에 협주곡으로 국내 초연이라고 한다. 돈이 되면 가 볼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