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살면서도 '삼청동' 이라는 동네와는 그다지 인연이 없었다. 그저 2003년도 쯤 삼청각에 전통예술공연 한 번 보러간 것이 내가 아는 한 처음이었는데, 몇 주 전에 재일교포 친구가 오랜만에 한국을 찾았을 때 '한옥들이 밀집된 곳을 가고 싶다' 고 해서 같이 찾아간 것이 좀 제대로 구석구석 돌아본 것이었고.
물론 그 때 접한 한옥들이 정말 100% 한옥 자체의 미를 살렸다고 하기는 힘들었지만, 개인적으로는 한옥이라는 존재의 고증 자체 보다는 그런 집들이 고지대에 다닥다닥 붙어 있으면서 멀리 보이는 빌딩숲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는 점 때문에 나름대로 인상적인 풍경이었다. 이런 이색적인 풍경도 해석하기 나름인지, 둘이서 갔을 때도 유달리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외국인과 많이 맞닥뜨리기도 했었다. 그들은 그 곳들을 찍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쨌든 이번에는 한옥 탐방 그런게 아니라, 순전히 입속과 뱃속을 즐겁게 하기 위한 방문이었다. 삼청동을 훑고 다니는 유일한 노선인 종로11번 마을버스를 타고 가본 것도 처음이었는데, 예상 외로 그렇게 언덕을 마구 올라가고 하지는 않았다.
대충 두 곳을 꼭 들러야 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가장 처음 가본 곳은 마을버스의 종점에서 머지 않은 '눈나무집'. 한자로는 '雪木軒(설목헌)' 이었는데, 김치말이국수/밥으로 유명해진 곳이라는 소문은 익히 들어온 곳이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가게가 2차선 도로를 경계로 아래와 같이 나뉘어 있었다.
삼청동 방면을 기준으로 오른쪽에 있는 집은 2층에, 왼쪽에 있는 집은 지하에 자리잡고 있는 것 같았다. 상호가 완전히 똑같았기 때문에 어느 집이 진퉁이고 짝퉁이고 하는 문제는 아닌 것 같았고, 아마 장사가 잘 돼서 가게를 확장하려니 부지가 없었는지 따로 건물을 잡아 또다른 가게를 만든 것 같았다.
조금 고민하다가 결국 왼쪽에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그럼 난 '좌글루스 좌빨' ???) 평일이고, 점심 때도 조금 지나서였는지 꽤 한산한 분위기였다. 들어갔을 때는 커플부대원으로 보이는 한 쌍이 김치말이와 떡갈비를 놓고 먹으면서 잡담을 하고 있었고. 어쨌든 우중충한 안여돼 솔로부대 대령은 문가 쪽에 자리를 잡고 김치말이국수(4500\)를 시켰다.
곧 있으면 솔로부대 준장(진)이 머지 않아서인지 어쨌는지, 아니면 오기 전에 지휘봉을 하도 미친듯이 휘둘러서 그랬는지-지금 H대 아마추어 관현악 동아리 지휘자로 일하고 있음-폰카로 한 컷을 찍는데도 손떨림크리의 연속. 그래서 저 메뉴판도 참 볍신같이 나와버렸다. 그래도 알아볼 수 있겠지 하고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가게 내부는 (인사동의 연장으로서) 삼청동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소쿠리나 자그마한 지게 등 '전통 민예품' 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붓글씨로 쓴 족자나 격언 등을 새겨넣은 나무판도 쉽게 볼 수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글씨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야 뜻풀이가 되는 특이한 것도 있었다. (내용은 잘 기억 안나지만, 아마 삶이 힘들어서 눈물이 나와도 웃고 지낸다는 류의 것 같음)
그리고 기다리던 음식을 받았는데, '처음이시고 배고프실 것 같아서 좀 많이 담았어요' 라는 멘트가 더해졌다. 우왕ㅋ굳ㅋ. 위 짤방에 보이는 대로 잘게 썬 김치와 김가루, 삶은 달걀 1/4쪽(반쪽이 아님), 깨가 뿌려진 김치말이국수와 밑반찬인 깍두기, 도토리묵, 두부부침, 양파 등의 간장 장아찌라는 비교적 단촐한 상차림이었다.
이런저런 말을 들어보니 '너무 밍밍하다', '국수맛 밖에 안났다' 는 의견들도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간이 적당하다고 느껴졌다. (사실 진짜 밍밍했다는 느낌이 든 음식은 지금까지 을지면옥 물냉면밖에 없었다.) 오히려 같이 나온 깍두기가 억양이 강해서 좀 에러였다고 생각될 정도였고. 김치국물은 잘게 썬 김치의 색깔과 마찬가지로 거의 동치미 정도로 붉은 기가 덜했는데, 적당히 시원한 것도 좋았고.
(여담이지만, 더운 날씨라고 찬 음식의 국물을 거의 슬러시 수준으로 설겁게 얼려 내오는 집을 더러 볼 수 있는데, 그런 곳에서 나오는 음식들은 너무 차가운 탓에 전체적인 맛을 느끼지 못한다는 부작용도 있다고 본다.)
시원하고 깔끔하게 그릇을 비운 후 가게를 나와서, 다음 장소로 찍어둔 '서울서 둘째로 잘하는 집' 을 찾아봤다. 대충 눈나무집에서 30~40m쯤 내려와서 왼쪽에 있다고 되어 있었는데, 가게가 잎이 무성한 가로수에 좀 가려 있어서 지나쳐갈 뻔했다. 그리고 가게 이름판도 붓글씨로 되어 있었는데, '서울서 둘째로 잘 아는 집' 이라고 쓰여있는 줄 알았고.
가게의 규모는 겉보기에 비교적 작았지만, 들어가 보니 뒤뜰을 전용한 공간도 있고 단체 손님을 받을 수 있는 넉넉한 별채도 딸려 있었다. 메뉴는 벽에 걸려있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잡으면 종업원이 손님에게 내오는 메뉴판으로 되어 있었다. 여기서도 고민할 필요 없이 미리 생각해둔 단팥죽(5000\)을 주문했다.
이 가게 안의 꾸밈새도 눈나무집과 비슷했지만, 민예품 류는 거의 없이 동양화나 붓글씨 등을 담은 액자들이 틈틈이 걸려 있는 정도로 단촐했다. 그리고 전통차를 파는 집 답게 각종 약초 말린 것들을 담은 자그마한 나무상자도 벽에 붙여 놓았고.
확실히 단팥죽이 인기 메뉴였는지, 들어온 손님들의 대부분은 더운 날씨에도 꼭 단팥죽 한 그릇을 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부엌에서도 항상 단팥죽을 떠서 대접할 수 있도록 냄비 두 개를 약한 불에 끓이고 있었고. 찬 음식을 먹었으니 더운 음식으로 균형을 잡는다는 모양새가 됐다.
단팥죽에는 보이는 대로 큼지막한 찰떡과 삶은 밤 너댓 조각, 은행 두세 개가 들어 있었다. 계피가루도 뿌려서 내왔는데, 양은 약간 적어 보였지만 꽤 달아서 오히려 적당하다고 느껴졌고. 뜨거운 것을 잘 못먹는 고양이혀라서 처음에 슬쩍 숟가락에 묻혀서 먹어봤는데, 그렇게 미칠듯이 뜨겁지는 않았다. 다만 찰떡의 경우에는 진짜 뜨거워서 숟가락으로 조금씩 떼어가면서 먹어야 했고.
많이 단 편이었지만, 밤과 은행의 구수함이나 떡의 찰진 느낌 때문에 '혀가 썩는 듯한' 모 도너츠 정도로 극단적인 맛은 아니었다. 이것도 꽤 만족스러웠는데, 가끔 전통적인 디저트류가 땡길 때 오면 좋을 것 같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가게들이 많았는데, 오래된 점포가 있는가 하면 삼청동이 관광지로 부각되면서 새롭게 들어서고 있는 체인점들도 있었다. 물론 그런 새 가게들을 '유행 편승' 이라고 무조건 격하시키고 싶지는 않지만, 삼청동을 찾는 사람들 중에 '서민적이고 고즈넉하다고 해서 왔더니 꽤 바가지더라' 는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도 괜한 시비걸기나 트집잡기는 아닌 것 같고.
어쨌든 이제 남은 방학 중 식충기행은 '정광수의 돈까스가게' 인데, 미진과 삼청동에서 좀 오버버닝한 관계로 잠깐 쉬어야 할 듯. 지금 지휘 일도 아예 무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알바도 못하고 있는 이상 자금 조달은 부모님께 굽신굽신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 외에도 지금 왔다갔다 하고 있는 H대 쪽에도 모 유명 수제소시지 집을 비롯해 꽤 여러 맛집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도...lllOT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