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베르트의 교향곡과 관련해 음악학자들을 돌아버리게 만든 것이 후기 교향곡과 관련된 논쟁이었는데, 8번 '미완성' 과 9번 '그레이트' 사이에 빈 근교의 가슈타인(Gastein)이라는 요양지에서 1824년 작곡한 교향곡(흔히 '가슈타인 교향곡' 이라고 칭함)이 존재했다는 주장이 제시되기도 했다.
그래서 번호 재분류가 시급하게 논의되기도 했는데, 번호 분류 외에도 저 가슈타인 교향곡이 대체 어떤 곡이었는지에 대한 추측도 난무했다. 어떤 이들은 작곡되었지만 악보가 없어졌다고도 주장했고, 어떤 이들은 타 장르의 대규모 작품이 교향곡으로 착상되었다가 용도 변경되었다고도 주장했다.
후자의 가설을 주장한 사람들은 같은 해(1824년)에 쓰여진 두 곡의 작품을 그 후보로 고르기도 했는데, 피아노 연탄 소나타 C장조(D.812 '그랑 듀오')와 8중주(클라리넷+바순+호른+바이올린 2+비올라+첼로+콘트라베이스) F장조(D.803)가 특히 많이 거론되었다. 전자의 곡이 '가슈타인 교향곡' 이었을 가능성을 제시한 이들은 슈베르트의 후배인 로베르트 슈만 등이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추측과 논의에도 불구하고, 결국 '가슈타인 교향곡' 이 정말로 착수되었고 실재하는 지에 대한 유력한 증거는 현재 남아있지 않은 상태다. 1970년대에는 저 곡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기에 이르렀고, 지금도 그 주장이 대세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형편이다.
진위가 어떻던 간에, 저 피아노 연탄 소나타는 슈베르트가 이전에 쓴 피아노곡들보다 훨씬 관현악풍의 사운드와 교향곡풍의 구조-스케르초를 포함한 4악장제-가 강조되어 있다. 아마 그런 점에서 이 곡이 원래 착수됐을 때는 교향곡이었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가슈타인 교향곡과 연관되어 있음을 주장한 이들 중 한 사람이 이미 1855년에 관현악 편곡을 해 교향곡으로 만들어 놓았다.
바로 요제프 요아힘(Joseph Joachim)이었는데, 요아힘은 주로 브람스 등의 작곡가들과 친교를 나눈 대가 바이올리니스트로 음악사에 남아있다. 하지만 그는 작곡이나 지휘도 했고, 바이올린 독주곡과 협주곡을 비롯한 작품도 쓴 바 있다. 요아힘 외에는 마리우스 플로투이스(Marius Flothuis, 1940-42)와 프리츠 외저(Fritz Oeser, 1948), 르네 라이보비츠(René Leibowitz, 1965경), 레이먼드 레퍼드(Raymond Leppard) 등이 교향곡화를 시도한 인물들로 손꼽힌다.
하지만 이 곡의 완성은 결국 피아노곡으로 이뤄졌고, 그런 점에서 과도한 작업이었다는 비판도 가해지고 있다. 바인가르트너의 베토벤 '함머클라비어 소나타' 관현악 편곡과 관련된 비판이 맥을 같이하고 있는데, 더군다나 이 곡과 연관지어 논의되던 가슈타인 교향곡의 존재마저 부정되고 있는 터라 음악사적인 흥미도 불러일으키지 못하게 됐다는 문제도 지니게 됐다.
그나마 여러 사람들의 시도 중 요아힘의 것이 가장 유명한 편인데,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도이체 그라모폰에 자신이 창단한 유럽 실내 관현악단을 지휘해 슈베르트의 교향곡 전집을 녹음했을 때도 포함시킨 바 있다. (하지만 음반에는 원곡인 피아노 연탄 소나타의 곡명과 비공식 부제 '그랑 듀오' 를 가장 굵고 크게 기입해 놓았고, 교향곡이라는 단어는 작게 표기하고 있음)
아바도 이전에도 이런저런 녹음이 이뤄진 것 같은데, 낙클어에도 옛날 녹음이긴 하지만 한 종류가 확인되고 있다(음반 번호 9.8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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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성 7번의 녹음보다 1년 전인 1951년에 마찬가지로 빈 국립오페라 관현악단이 연주한 물건인데, 지휘는 펠릭스 프로하스카(Felix Prohaska)가 맡고 있다. 프로하스카는 지명도가 그다지 높은 인물은 아니지만, 2차대전 종전 후 나치 집권기 동안 활동한 많은 지휘자들이 나치 부역 혐의로 활동 금지를 당했을 때 대역으로 공연을 이끈 지휘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프로하스카 외에 지난 번에 소개한 프란츠 리트샤우어, 그리고 안톤 파울리크나 루돌프 모랄트, 한스 스바로프스키도 마찬가지로 빈 국립오페라의 전후 공연을 이끌었다. 이들의 이름을 미국 음반사들에서 의외로 많이 찾을 수 있는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다만 활동 금지를 당했던 인물들 대부분이 비나치화 심리를 통과하고 속속 복귀한 뒤에는 다시 그들의 그늘에 가리는 형편이 되었는데, 그나마 미국을 중심으로 한 마이너 레이블에서 녹음을 이것저것 남긴 것이 그들의 이름을 잊혀지지 않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한 셈이었다.
비록 전후 만신창이가 됐다고는 해도, 오스트리아 1급 악단이었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EMI나 데카 같은 메이저 음반사들과 계약을 맺고 작업하는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빈 필의 경우 빈 국립오페라 관현악단이라는 상부 악단의 단원들이 자립형으로 꾸려나가는 형태의 악단이었기 때문에, 한 발 늦은 음반사들은 꿩 대신 닭으로 빈 국립오페라 관현악단이나 빈 교향악단을 섭외해야 했다.
하지만 당시의 빈 국립오페라 관현악단은 빈 필의 상부 조직이라고 해도 지금처럼 연주력이나 단원 구성이 비슷한 상태는 결코 아니었다. 빈 국립오페라극장이 폭격으로 전소된 상태여서, 오페라단은 그보다 규모가 작은 빈 국민오페라극장과 테아터 안 데어 빈 등의 극장들에서 '셋방살이' 를 하고 있었다.
오페라단 전속 관현악단의 단원들도 전쟁을 거치면서 죽고 다치거나 나치 부역 혐의로 강제 해직된 이들이 많았고, 결국 결원을 보충하기 위해 빈 국민오페라 관현악단의 단원들을 대거 공식 혹은 비공식 영입했다고 한다. 사실상 합동 관현악단의 형태로 공연과 녹음을 진행한 셈인데, 그래서 스튜디오 녹음임에도 간혹 합주력이 덜그럭거리거나 하는(!!) 웃지못할 상황의 녹음들도 있다.
녹음 상태는 1952년의 미완성 7번 녹음과 비슷한데, 마찬가지로 모노 녹음이다. 고음역 쪽이 다소 시끄러운 감이 있는데, 거기에 음질 열화를 피하기 힘든 옛날 LP를 복각에 써야 했다는 문제도 있다. 녹음의 문제 이전에 이런 편곡 행태에 관심이 없거나 비판하는 이들에게는 관심의 대상이 되지도 못할 물건이기도 하고.
그리고 낙클어에는 이외에도 비슷한 형태의 관현악화 작품들을 더 찾아볼 수 있는데, 혹시나 관심있는 사람들을 위해 따로 적어둔다;
1. 프란츠 슈베르트: 환상곡 C장조 D.760 (흔히 '방랑자 환상곡' 이라고 칭함)
→ 피아노 독주곡인 원곡을 프란츠 리스트가 피아노와 관현악의 협주 형태로 편곡한 버전. 헝가리 출신 피아니스트인 에디트 퍼르너디(Edith Farnadi)의 독주와 아드리언 볼트(Adrian Boult) 지휘의 런던 필(런던 필하모닉 프롬나드 관현악단으로 표기되어 있음)이 1956년에 녹음했다(9.80646). 녹음 상태는 깨끗한 편이지만, 마찬가지로 모노 녹음.
2. 펠릭스 멘델스존: 현악 8중주 E플랫장조 작품 20 → 한 쌍의 현악 4중주를 한데 합친 편성의 곡. 20세기 초중반을 풍미한 대가 지휘자로 손꼽히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가 현악 합주용으로 편곡했는데, 토스카니니 자신이 지휘한 NBC 교향악단의 1947년 녹음을 낙클어 복각본으로 들어볼 수 있다(9.80284). 역시 모노.
3. 베드르지흐 스메타나: 현악 4중주 제 1번 '나의 생애로부터'
→ 현악 4중주를 현악 합주용으로 확대 편성해 연주하는 경우는 많지만, 이 곡의 경우 단순한 확대 편성이 아닌 관악기와 타악기가 들어가는 정규 관현악용의 편곡도 있다. 조지 셀(George Szell)의 것인데, 마찬가지로 셀 자신이 클리블랜드 관현악단을 지휘한 1949년 녹음을 들을 수 있다(9.80079-80). 역시 모노.
4. 클로드 드뷔시: 작은 모음곡
→ 원래는 피아노 연탄곡이었고, 드뷔시 생전에 절친한 관계였던 작곡가 겸 지휘자 앙리 뷔세르(Henri Büsser)가 관현악용으로 편곡했다. 다른 편곡판보다 연주 빈도도 높은 편이고 평가도 좋은데, 낙클어에는 세르주 첼리비다케(Sergiu Celibidache) 지휘의 베를린 방송 교향악단-소속 방송국이 소련군 점령 지역에 있었던 까닭에 분단 후 동독 관현악단이 됨-이 종전 직후인 1945년에 방송 녹음한 것으로 들을 수 있다(9.80737). 다만 연도가 연도고 패전 직후의 어려운 상황에서 만든 것이라 음질은 다른 것과 비교해도 가장 좋지 않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