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클래식 음악들 중 '작곡자 불명' 의 것들은 대개 문서 자료가 별로 없거나 아니면 소실되어 있는 것들이 많다. 대개 중세나 그 이전에 아주 저속한 광대 집단으로 치부되던 길거리 예인들이 만들었을 세속음악들이 그런 상황에 처해 있고, 흔히 'anonymous' 라는 단어가 작곡가 이름이 들어갈 자리에 기입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칼 오르프가 가사만 따 곡을 붙인 것으로 유명한 '카르미나 부라나' 가 있음)
하지만 작곡가가 당당한 직업으로 정립된 베토벤 이후에도, 아주 가끔이지만 작곡자가 불명인 채로 남아 있는 작품들이 존재한다. 이번 것은 용의자(???)가 몇 사람 존재하지만, 그 중 누구도 확실한 증거가 없어서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1940년대 후반에 하인리히 추픽(Heinrich Tschuppik)이라는 음악학자 겸 작곡가가 빈의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 고문서 자료실을 뒤지다가 흥미로운 악보를 발견했는데, 제목은 '교향 전주곡(Symphonisches Praeludium)' 이라고 되어 있었다. 덧붙여 '1876년에...아마도 안톤 브루크너(aus dem Jahre 1876...angeblich von Anton Bruckner)' 라는 문구가 기입되어 있고, 사보가였던 루돌프 크시차노프스키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하지만 누가 곡을 작곡했는지에 대한 확실한 정보는 하나도 없었고, 원래 작곡할 때 편성은 분명 관현악이었겠지만 피아노용으로 편곡한 형태의 것이었다. 아마 악보에 적힌 문구로 보아 사보가인 크시차노프스키도 작곡자가 누군지 정확히 몰랐던 것 같고, 사보할 때는 관현악용 악보도 존재했던 모양인지 곳곳에 어떤 악기로 연주해야 하는가에 대한 주석도 적혀 있었다.
추픽은 악보의 지시를 바탕으로 관현악 재구성과 보충 편곡을 마친 뒤, 당시 브루크너 교향곡 지휘의 전문가 중 한 사람인 폴크마르 안드레에(Volkmar Andreae)에게 악보를 보여주고 초연을 의뢰했다. 안드레에는 즉석에서 동의했고, 1949년 1월에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초연할 예정까지 다 잡아놓았다.
하지만 이 초연 계획은, 공연 악단으로 선정된 빈 필 단원들이 '브루크너의 작품이 아닌 것 같다' 면서 자체 회의 끝에 연주 거부를 선언하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추픽은 이 곡을 받아줄 다른 지휘자와 관현악단을 찾아봐야 했고, 결국 같은 해 9월 7일에 프리츠 리거(Fritz Rieger) 지휘의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대신 초연했다. 그러나 초연한 지 몇 달 후인 1950년 초에 추픽이 급서하면서, 이 곡에 대한 연구나 재연 작업은 잠정 중단되고 말았다.
추픽이 너무 급작스럽게 세상을 뜨는 바람에 연구에 쓴 자료들이 대부분 도서관에 반환되지 않았기 때문에 후속 연구도 한참동안 답보 상태였는데, 그나마 당시 브루크너 작품 연구와 편집의 최고 권위자 중 한 사람이었던 레오폴트 노바크도 연구와 편집에 들어갔다가 작품의 진정성을 의심했는지 연구 중단 혹은 방치한 바 있었다.
연구가 본격적으로 재개된 것은 1970년대 말에 가서였는데, 말러 연구가였던 폴 뱅크스(Paul Banks)가 추픽이 갖고 있던 자료의 일부를 취리히에서 입수하면서 그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 것이 신호탄이었다. 하지만 뱅크스의 논문은 이 곡이 '완전히 새롭게 발견된 곡이며, 말러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는 논조를 펴면서 혼란과 오류를 동시에 가져다 주었다(그 당시에 뱅크스는 리거 지휘의 초연이 이뤄졌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것 같다).
아무튼 뱅크스가 발견한 4단 오선보 축약본 악보는 알베르트 귀르싱(Albert Gürsching)이라는 작곡가에 의해 관현악 편곡되었고, 이 버전은 1981년 3월 15일에 로렌스 포스터(Lawrence Foster) 지휘의 서베를린 방송 교향악단(현 베를린 도이치 교향악단)에 의해 초연되었다. 규르싱 편곡판의 초연 실황은 예전에 브루크너 음반목록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다운로드할 수 있었는데, 아마 미국의 어느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에서 편집해 실어놓은 것 같았다(지금은 저작권 문제 때문에 항의가 들어왔는지 삭제됨).
이 곡이 말러의 미발표 작품이 확실한 것인양 이렇게 재소개되면서 처음 발견되었을 때보다 더 웃지못할 상황이 벌어졌는데, 귀르싱의 편곡 작업도 그러한 전제 하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관현악 사운드가 말러 작품의 양상을 띄고 있다는 것도 오해에 부채질을 한 셈이 되었다. 아무튼 귀르싱 편곡판은 샨도스에서 출반된 네메 예르비(Neeme Järvi) 지휘의 로열 스코티시 내셔널 오케스트라의 말러 교향곡 6번 녹음의 여백에 끼워져 상업용 음반으로 첫 선을 보이기도 했다(참고로 이 녹음이 2009년 현재까지도 유일하게 구할 수 있는 상업용 녹음이다).
ⓟ 1993 Chandos Records Ltd.
한편으로는 이 곡을 말러와 너무 지나치게 연관지어 연구하는 행태에 비판을 가하고 추픽이 보유하고 있던 자료들을 찾아 연구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는데, 볼프강 힐틀(Wolfgang Hiltl)이라는 음악학자 겸 지휘자가 그 역할의 중심에 서 있었다. 힐틀은 첫 발견자였던 추픽의 사후 뿔뿔이 흩어져 있던 자료들의 소재를 가능한한 확실히 파악해 소유주들로부터 사들였으며, 작곡 스타일이나 특징적인 음악 어법등을 집중적으로 연구해 논문으로 발표했다.
논문과 동시에 현재 확인되고 있는 관련 자료들을 모두 참고해 힐틀이 직접 개정한 새로운 관현악판 악보도 발간되었는데, 힐틀의 연구와 곡의 관현악 재구성은 추픽이 추정한 것처럼 브루크너의 작품일 가능성이 많다는 전제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말러 작품이라는 입장에서 연구한 뱅크스나, 브루크너 작품이라는 입장에서 연구한 힐틀 두 사람 모두 이 곡의 연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작곡자의 자필보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지금까지도 이 곡의 진짜 작곡가를 발견하지는 못하고 있는 상태다.
뱅크스와 힐틀이 추정한 두 사람 외에도, 다른 음악학자들은 브루크너 주위의 작곡가들을 '용의자' 로 거론하고 있기도 하다. 당시 음악계에서 괴짜 취급을 받던 브루크너를 옹호한 '용감한 젊은이들' 이었던 말러와 로트, 볼프, 그리고 이 곡의 2차 사료인 피아노용 축약판 악보를 남긴 크시차노프스키가 작곡자가 아닌가 하는 의문도 있고. 실제로 말러와 로트, 볼프, 크시차노프스키 네 사람은 브루크너가 빈 음악원의 교수로 재직할 때 그 곳에서 음악을 배웠고, 브루크너 작품을 열성적으로 좋아한 만큼 브루크너의 후광을 등에 업는 혜택을 받기도 한 인물들이었다.
작곡자의 진위 연구도 연구지만, 이 곡이 리거나 포스터, 예르비 등 극소수의 지휘자들이 한두 번 다룬 뒤 지금까지 연주가 없다는 것도 좀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사실 냉정하게 따져봤을 때, 이 곡은 그리 짜임새있게 구성된 작품은 아니다. 매우 드라마틱한 작품이기는 하지만, 그 효과의 구현에만 너무 집중한 과시용 작품으로도 들린다고나 할까.
물론 내가 들어본 것이 '극히 말러화된' 귀르싱판의 연주였기 때문에, 추픽이나 힐틀의 관현악판을 들으면 또 생각이 바뀔 수도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로트의 작품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하고 있기는 한데, 아무튼 진위 여부의 결정에 확실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원보의 발굴이 선행되지 않는 이상 뜬구름 잡는 소리에 불과할 것 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