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잡설
괜한기획-베를린 필의 최초 녹음.
머나먼정글
2008. 6. 24. 13:12
흔히 유럽의 독일어권 국가에서 자웅을 겨루는 관현악단으로 독일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Berliner Philharmoniker)와 오스트리아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Wiener Philharmoniker)를 꼽곤 한다. 물론 양 악단이 피터지고 이갈리도록 대립 구도를 견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두 악단이 태생이나 운영 방침 등의 면에서 꽤 차이가 많이 나서 어느 한 쪽을 섣불리 편들어주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고.
하지만 두 악단 중 전통주의에 속하는 것이 빈 필이고, 그에 대응해 비교적 문호 개방이 충실히 되고 있는 곳이 베를린 필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진보적인 관현악단의 척도라고 할 수 있는 녹음이나 여성 단원/지휘자 기용과 섭외, 국적과 성별에 관계없는 광범위한 단원 영입 등에 있어서 확실히 빈 필과 비교되고 있는데, 녹음을 취입하기 시작한 시기도 빈 필보다 앞서 있다.
사실 녹음기와 음반이 등장한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이었는데, 토머스 에디슨이 '포노그래프' 라고 이름지은 유성기와 실린더형 레코드가 1870년에 첫 선을 보였다. 하지만 채산성이 맞지 않아 주춤한 사이 독일계 미국인 에밀 베를리너(또는 벌리너. Emil Berliner)가 실린더형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원반형 레코드와 그 유성기인 '그라모폰' 을 각각 1888년과 1890년에 발명했고, 이후 엘드리지 존슨 같은 유능한 기술자들을 협력자로 얻는 행운도 있어서 단기간에 개량이 이루어졌다.
결국 음반과 유성기 시장에서 베를리너 방식의 것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는데, 물론 베를리너가 에디슨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음반과 유성기가 대량 생산이 용이하고 경제적이었다는 이유 외에도 유명 성악가들이나 연주자들을 일찌감치 섭외할 수 있었던 것이 주효했다.
가히 공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섭외 전략은 베를리너 그라모폰의 첫 전속 프로듀서 프레드 가이스버그(Fred Gaisberg)의 공이 특히 컸는데, 가이스버그는 레코드 역사상 첫 전업 프로듀서로 역사에 남았을 뿐 아니라 당대의 유명 음악인들을 어떻게든 설득해 나팔관 앞에서 녹음을 하도록 만드는 수완이 대단히 뛰어났던 인물이다. 그의 노력으로 엔리코 카루소나 표도르 샬리아핀, 최후의 카스트라토 가수였던 알레산드로 모레스키 등의 음성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을 정도이니.
하지만 베를리너 그라모폰도 녹음 장르는 협소한 편이었는데, 주로 성악이나 독주, 실내악 등 소편성 음악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나마 관현악 등 편성이 큰 기악 음악이 안정적으로 녹음될 만한 기술 진보가 이뤄진 것이 20세기 초반이었는데, 기술 진보라고 해도 그 당시의 관현악 작품 녹음은 지금과 비교하면 너무나 보잘것 없고 때로는 웃기기까지 한 수준이었다.
관현악단을 연주회 편성 그대로 스튜디오에 배치하고 녹음을 할 경우, 그 당시 녹음기가 소화해낼 수 있던 주파수 대역의 한계 때문에 첼로나 콘트라베이스 같은 저음 현악기가 거의 들리지 않던가 아니면 아예 안들리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그리고 그 당시의 녹음 방식은 나팔관을 통한 음의 진동이 바늘을 통해 커팅용 왁스를 긁는 식이었기 때문에, 강한 음량의 투티에서는 진동이 충격이 되면서 바늘이 튀는 등 세션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점도 있었고.
그래서 지금 관점에서는 정말 어이없는 방식들이 동원되어야 했는데, 관현악단 규모를 실내 관현악단 수준으로 줄이고 첼로나 콘트라베이스 같은 애물단지 악기들의 옆에 '그나마 잘 들리는' 튜바를 같이 연주하게 하거나 아니면 아예 튜바만으로 연주하도록 하는 방법도 사용되었다. 바이올린이나 비올라도 몸통이 없는 연습용 악기에 나팔관을 달아 연주토록 하기도 했고, 호른 같은 금관악기는 잔향 감소를 위해 지휘자에게 등을 돌리고 벽을 향해 연주하는 방식이나 심지어 곡을 새로 편곡하는 아이디어까지 동원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10년대에는 어느 정도 관현악 작품 녹음을 위한 기술과 여건이 갖추어지게 됐다. 이 분야에서도 가이스버그가 관여하고 있었는데, 가이스버그는 영국인이었으므로 베를리너가 1897년에 설립한 영국 그라모폰 지사(현 EMI)에서 랜던 로널드 같은 지휘자들과 주로 취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1898년에 베를리너의 고향인 독일에도 독일 그라모폰 지사(현 도이체 그라모폰)가 설립되면서, 가이스버그의 활동 영역은 거의 유럽 전역으로 확대되어 있었다.
하지만 두 악단 중 전통주의에 속하는 것이 빈 필이고, 그에 대응해 비교적 문호 개방이 충실히 되고 있는 곳이 베를린 필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진보적인 관현악단의 척도라고 할 수 있는 녹음이나 여성 단원/지휘자 기용과 섭외, 국적과 성별에 관계없는 광범위한 단원 영입 등에 있어서 확실히 빈 필과 비교되고 있는데, 녹음을 취입하기 시작한 시기도 빈 필보다 앞서 있다.
사실 녹음기와 음반이 등장한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이었는데, 토머스 에디슨이 '포노그래프' 라고 이름지은 유성기와 실린더형 레코드가 1870년에 첫 선을 보였다. 하지만 채산성이 맞지 않아 주춤한 사이 독일계 미국인 에밀 베를리너(또는 벌리너. Emil Berliner)가 실린더형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원반형 레코드와 그 유성기인 '그라모폰' 을 각각 1888년과 1890년에 발명했고, 이후 엘드리지 존슨 같은 유능한 기술자들을 협력자로 얻는 행운도 있어서 단기간에 개량이 이루어졌다.
결국 음반과 유성기 시장에서 베를리너 방식의 것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는데, 물론 베를리너가 에디슨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음반과 유성기가 대량 생산이 용이하고 경제적이었다는 이유 외에도 유명 성악가들이나 연주자들을 일찌감치 섭외할 수 있었던 것이 주효했다.
가히 공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섭외 전략은 베를리너 그라모폰의 첫 전속 프로듀서 프레드 가이스버그(Fred Gaisberg)의 공이 특히 컸는데, 가이스버그는 레코드 역사상 첫 전업 프로듀서로 역사에 남았을 뿐 아니라 당대의 유명 음악인들을 어떻게든 설득해 나팔관 앞에서 녹음을 하도록 만드는 수완이 대단히 뛰어났던 인물이다. 그의 노력으로 엔리코 카루소나 표도르 샬리아핀, 최후의 카스트라토 가수였던 알레산드로 모레스키 등의 음성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을 정도이니.
하지만 베를리너 그라모폰도 녹음 장르는 협소한 편이었는데, 주로 성악이나 독주, 실내악 등 소편성 음악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나마 관현악 등 편성이 큰 기악 음악이 안정적으로 녹음될 만한 기술 진보가 이뤄진 것이 20세기 초반이었는데, 기술 진보라고 해도 그 당시의 관현악 작품 녹음은 지금과 비교하면 너무나 보잘것 없고 때로는 웃기기까지 한 수준이었다.
관현악단을 연주회 편성 그대로 스튜디오에 배치하고 녹음을 할 경우, 그 당시 녹음기가 소화해낼 수 있던 주파수 대역의 한계 때문에 첼로나 콘트라베이스 같은 저음 현악기가 거의 들리지 않던가 아니면 아예 안들리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그리고 그 당시의 녹음 방식은 나팔관을 통한 음의 진동이 바늘을 통해 커팅용 왁스를 긁는 식이었기 때문에, 강한 음량의 투티에서는 진동이 충격이 되면서 바늘이 튀는 등 세션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점도 있었고.
그래서 지금 관점에서는 정말 어이없는 방식들이 동원되어야 했는데, 관현악단 규모를 실내 관현악단 수준으로 줄이고 첼로나 콘트라베이스 같은 애물단지 악기들의 옆에 '그나마 잘 들리는' 튜바를 같이 연주하게 하거나 아니면 아예 튜바만으로 연주하도록 하는 방법도 사용되었다. 바이올린이나 비올라도 몸통이 없는 연습용 악기에 나팔관을 달아 연주토록 하기도 했고, 호른 같은 금관악기는 잔향 감소를 위해 지휘자에게 등을 돌리고 벽을 향해 연주하는 방식이나 심지어 곡을 새로 편곡하는 아이디어까지 동원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10년대에는 어느 정도 관현악 작품 녹음을 위한 기술과 여건이 갖추어지게 됐다. 이 분야에서도 가이스버그가 관여하고 있었는데, 가이스버그는 영국인이었으므로 베를리너가 1897년에 설립한 영국 그라모폰 지사(현 EMI)에서 랜던 로널드 같은 지휘자들과 주로 취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1898년에 베를리너의 고향인 독일에도 독일 그라모폰 지사(현 도이체 그라모폰)가 설립되면서, 가이스버그의 활동 영역은 거의 유럽 전역으로 확대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