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CD도 이미 들어봐서 겹치는 곡이 두 곡 있었지만, 나머지 세 곡은 생판 처음 듣는 것이라 가치가 큰 물건이었다. 게다가 들어본 곡들의 녹음도 꽤 충공깽을 선사하는 라인업이었고.
2집 (2001)
ⓟ 2001 Internationale Isang Yun Gesellschaft e.V.
이번 앨범의 커버 그림은 김지하가 윤이상에게 선물한 한시가 같이 담긴 수묵화로 되어 있었다. 윤이상은 한국에 납치됐다가 풀려난 뒤에도 계속 한국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는데, 김지하와 김대중이 정치적인 이유로 탄압을 받자 구명 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아마 그 답례로 만들어준 작품 같은데, 지금은 뭐...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1. 대규모 관현악을 위한 '서곡' (1973, 1974 개정)
자르브뤼켄 방송 교향악단/한스 첸더
윤이상의 관현악 작품 중 처음으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세계 초연한 작품인데, 1집의 첫 곡이었던 3중주와 마찬가지로 음색/음향 탐구에서 선적인 방향으로 새로운 길을 추구하던 과도기의 작품이다.
초연 때도 지휘를 맡았던 독일 현대음악 작곡/지휘의 지존 중 한 사람인 한스 첸더가 당시 상임 지휘를 맡았던 자르브뤼켄 방송 교향악단을 지휘한 음원인데, 실황은 아니고 1975년 2월 22일에 자를란트 방송국을 위해 자르브뤼켄 콩그레스할레(회의장)에서 제작한 방송녹음이다.
생전에 윤이상과 친분이 두터웠던 첸더는 여러 윤이상 관현악 작품의 음원을 남겼는데, '무악' 과 플루트 협주곡의 경우 일본 음반사인 카메라타의 '윤이상의 예술' 시리즈를 통해 이미 선보인 바 있었다. 이 음원은 협회반을 통해 처음으로 정발된 것이다.
연주를 맡은 자르브뤼켄 방송향도 첸더 재임기에 수많은 현대음악 작품들의 초연과 재연을 맡아 유명해졌는데, 2007년에 이웃 도시인 카이저슬라우테른의 남서독일 방송국 소속 방송 관현악단과 합병해 '자르브뤼켄 카이저슬라우테른 독일 라디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로 재탄생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 플루트 네 대를 위한 4중주 (1986)
로즈비타 슈테게, 이르멜라 보슬러, 아일라 카이마즈, 수잔네 빙클러(플루트+피콜로+알토플루트+베이스플루트)
윤이상은 여러 악기들이 조합된 비일상적인 편성의 실내악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이 곡도 플루티스트 네 사람을 요구하는 독특한 작품이다. 윤이상이 쓴 관악 독주곡이나 실내악은 난이도가 킹왕짱 어렵기로 유명한데, 이 곡도 어느 플루티스트던 현대음악 연주에 발군의 실력을 갖추고 있어야 소화할 수 있다고 한다.
악기의 경우, 플루트 네 대만으로는 음색과 음역 폭 등이 단조롭다고 생각했는지 다른 종류의 플루트 세 대를 각기 두 대씩 교체해 쓰도록 지정하고 있다. 기교적으로는 어렵다고 하지만, 후기 작품답게 음향이나 음색은 비교적 온화하고 부드러워진 것도 눈에 띈다.
네 명의 플루티스트 중 윤이상 플루트 곡의 많은 음원을 남기고 있는 슈테게의 이름이 여기서도 보이고 있는데, 슈테게는 이 곡의 세계 초연 때도 연주에 참여한 바 있다. 녹음은 초연 후 1년여 뒤인 1987년 11월 25일에 자르브뤼켄 음악대학에서 진행한 연주회의 실황이다.
3. 세 목소리와 타악기를 위한 '추억' (1974)
기젤라 자우어-콘타르스키, 카를라 헤니우스, 윌리엄 피어슨 (목소리+타악기)
1970년대에 작곡된 윤이상의 성악곡들 중 색다른 컨셉을 취한 것이 1972년의 '가곡' 과 여기 수록된 '추억' 이다. 두 곡 모두 성악 파트의 가사가 아무 의미없는 음성학 상의 발음 배열만으로 되어 있고, 정확한 음정 기보가 아닌 대략적인 음정 단위를 오선보에 기보해놓고 있다. 성악가의 음역도 완전히 자유롭게 선택 가능한데, 당시 현대음악계를 휩쓸던 '우연성' 혹은 '불확정성' 이론을 얼마간 받아들인 것으로도 추측된다.
'가곡' 의 경우 성악과 기악 연주가 따로 분류되어 있었지만, 여기서는 가수들이 타악기 연주도 같이 하도록 되어 있다. 물론 드럼이나 팀파니, 실로폰 같은 연주하기 어려운 유율 타악기는 아니고, 트라이앵글이나 템플블록(여러 규격의 목탁), 핸드벨 등 비교적 작고 연주하기 쉬운 타악기를 맡기고 있다.
수록된 음원은 1974년 5월 24일에 자르브뤼켄의 자를란트 방송국 대강당에서 열린 방송 연주회의 실황인데, 로마에서 초연 후 11일 뒤에 치른 공연인 셈이다. 성악가들도 초연 때와 동일한데, 한스 베르너 헨체와 '엘 시마론', '나타샤 웅게호이어의 아파트로 가는 험난한 길' 등 당시로는 파격적인 컨셉과 정치적인 입장을 모두 취한 작품들을 초연한 바 있던 피어슨이 포함된 것이 흥미롭다.
4. 소프라노와 실내 합주를 위한 '밤이여 나뉘어라' (1980)
도로티 도로우 (소프라노), 자르브뤼켄 인테그라시옹 앙상블/한스 첸더
나치의 탄압을 피해 스웨덴으로 망명했던 유대인 작가 넬리 작스의 시를 가지고 만든 성악 작품인데, 오페라 '심청' 의 타이틀 롤과 함께 윤이상 성악곡 중 소프라노를 무진장 혹사시키기로 악명높은 작품이다. 윤인숙의 한국어 번안 녹음(SKC)과 리향숙의 독일어 원어 녹음(베르고)이 든 CD들을 이미 갖고 있고 서울 윤이상 앙상블의 창단 연주회에서도 들어본 바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그럭저럭 친숙한 곡이기도 하다.
이 음원은 1981년 4월에 비텐에서 공개 초연하기 한 달 가량 앞선 3월 22일에 자르브뤼켄의 자를란트 방송국 대강당에서 방송용으로 녹음한 것인데, 독일에서는 이러한 사전 작업이 꽤 일반적이라고 한다. 미리 충분한 연습과 시연, 녹음을 거쳐 초연 무대의 완성도를 높인다는 포석인 셈. 도로우의 목소리는 약간 어두운 질감이지만, 윤이상이 요구하는 극단적인 음역을 무난하게 소화하고 있다.
5. 교향곡 제 3번 (1985)
자르브뤼켄 방송 교향악단/정명훈
윤이상은 1983년에 베를린 필 창단 100주년 기념으로 위촉받은 교향곡 1번을 시작으로 1987년까지 매년 한 곡씩의 교향곡을 발표했는데, 이 곡은 그 중간 쯤에 위치한 단악장의 작품이다. 후기 작품의 일반적인 컨셉인 음양의 대립과 조화, 한결 부드러워진 음향 등 신낭만주의풍 성향이 이 곡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윤이상 관현악 작품 중 유일하게 한국 출신 지휘자인 정명훈의 지휘로 세계 초연된 곡이기도 한데, 여기 수록된 녹음은 '밤이여 나뉘어라' 와 마찬가지로 1985년 9월에 베를린에서 공개 초연하기 5일 전인 9월 21일에 자르브뤼켄 콩그레스할레에서 미리 제작된 방송녹음이다.
후속 음반인 3집의 경우, 지인에게 주기 위해 구매한 것 외에 협회 가입 특전으로 6집과 함께 공짜로 배송된 것이 있어서 더 일찍 들어볼 수 있었다. 관현악 작품 네 곡을 담아놓은 앨범인데, 이것도 모두 한국에서는 음반을 구할 수 없었던 곡들이라 이것 또한 굉장한 레어템이다. 다음 편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