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잡설
1920~40년대에 베를린 필을 지휘한 일본 지휘자들-1
머나먼정글
2010. 7. 29. 13:50
한때 '세계 3대 관현악단' 이네 뭐시깽이네 하는 등수놀이가 있었다. 흔히 독일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오스트리아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미국의 뉴욕 필하모닉 세 단체를 칭한다고 평론가들의 입방정이 작렬했는데, 뉴욕 필이 리즈시절 갔다고 까이고 있고 나머지 악단들도 잘 보면 뭔가 나사빠진 면모도 없지는 않아서 이제는 쉰 떡밥 취급 받는 것으로 안다.
사실 저 악단들도 세계적인 인지도를 확립하게 된 것은 레코드라는 간접적인 감상 매체가 널리 보급되었기 때문인 것도 컸고, 각기 음악의 전통과 세계적인 경제 규모를 자랑하는 나라의 악단이라는 배경도 꽤 크게 어필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지휘자나 독주자, 성악가들의 프로필에는 저 악단들 중 하나라도 지휘해 본 경력이 있다면 거의 100% 기입될 정도이니, 명불허전이라는 생각도 들고.
그 중 베를린 필이 2차대전 패전 때까지 일본 지휘자 다섯 사람 밑에서 연주한 경력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좀 다뤄보고자 한다.
I. 고노에 히데마로 (近衛秀麿, 1898-1973)
근현대 일본사에 정통하거나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고노에' 라는 성을 보고 누군가 떠올렸을 것 같은데, 일본의 제 34, 38, 39대 총리를 역임한 바 있는 고노에 후미마로(近衞文麿)가 가장 확률이 높을 듯. 고노에 히데마로는 후미마로의 동생이다.
일본에서 관직을 독식하다시피 한 '고셋케' 의 일족이었던 고노에 집안은 가가쿠(아악)의 전수를 주로 담당하고 있었는데,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이것이 필수가 아닌 선택지로 바뀌었다. 그래서 궁내성 악부에 소속되어 가업을 계속 이어갔던 3남 나오마로를 제외하고, 장남 후미마로와 차남 히데마로는 각각 정치인과 지휘자의 길을 걸었다.
고노에는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서양음악을 접했고, 이어 작곡과 지휘 쪽에도 관심을 가지면서 독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당시 유럽이나 미국 유학은 재력과 권력 모두가 갖춰진 귀족 집안 아니면 부를 어마어마하게 축적한 신흥 재벌의 자제들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는데, 물론 고노에는 귀족 집안 출신이므로 큰 어려움은 없었다.
베를린에서 에리히 클라이버와 칼 무크, 막스 폰 실링스 등에게 지휘를 배운 뒤, 고노에는 1924년 1월 18일에 소위 '돈지랄' 의 절정에 달하는 이벤트성 공연을 개최했다. 베를린의 베토벤잘에서 자신의 돈으로 베를린 필을 기용해 연주회를 개최한 것이었는데, 일본 지휘자가 베를린 필 무대에 선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프로그램은 모차르트의 극음악 '극장 지배인' 서곡, 랄로의 첼로 협주곡, 고노에 자신의 가곡 네 곡과 러시아 작곡가인 바실리 칼린니코프의 교향곡 제 1번으로 구성되었다. 랄로 협주곡에서는 펠릭스 멘델스존의 증손자였던 첼리스트 펠릭스 로베르트 멘델스존이, 고노에 가곡들에서는 드레스덴 국립 오페라단의 알토 가수인 프리다 렝엔도르프가 각각 독주와 독창을 맡았다.
사실상 자기 만족을 위한 사적 공연에 가까웠기 때문에, 비평이 어떻게 나왔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고노에는 분명히 만족감을 느꼈고, 일본에 돌아와서는 스승이었던 야마다 고사쿠(3부에서 설명)와 함께 일본 최초의 관현악단을 만드는 데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일본에 돌아와서도 고노에는 종종 해외 객원 지휘를 병행하며 활동했는데, 1931년 1월에는 이탈리아 밀라노의 라 스칼라 오페라극장 관현악단을 지휘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스페인 기상곡' 과 베토벤의 교향곡 제 1번 두 곡을 파를로폰에 취입했다. 일본 지휘자가 서양 관현악단을 지휘해 취입한 첫 녹음으로 화제가 되었고, 일본 파를로폰에서도 SP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히틀러가 수상이 되면서 나치가 정권을 잡게 된 1933년에는 10월 4~5일 이틀 동안 베를린 필과 두 번째로 공연했는데, 이 때는 슈베르트의 현악 5중주와 일본 가가쿠 곡들 중 하나인 에텐라쿠(越天楽)를 고노에가 정규 관현악 용으로 편곡한 것들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돈 후안', 막스 레거의 '조국의 서곡' 이 공연되었다. 이틀 동안의 연속 연주회였던 것으로 봐서는, 1924년의 첫 대면처럼 악단을 매입해 공연한 것이 아닌 정기 연주회 혹은 그에 준하는 공연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노에는 약 3개월 뒤인 1934년 1월 7일에도 베를린 필을 지휘했는데, 이 때는 모차르트의 신포니아 콘체르탄테(바이올린+비올라+관현악용 곡인지, 위작설이 있는 목관 4중주+관현악용 곡인지는 불명)와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제 1번(프리드리히 뷰러 협연), 무소륵스키의 모음곡 '전람회의 그림(모리스 라벨 관현악 편곡판)' 이 공연되었다.
하지만 국내외의 이러한 활발한 활동이 늘 순탄하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일본에서는 귀족 집안 자제답게(???) 꽤 독선적인 성격으로 종종 물의를 빚었는데, 결국 1935년 여름에 터진 악단 매니저의 회계부정 의혹 때 친분이 있었던 매니저 측을 비호했다가 악단 전체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쫓겨나는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비록 악단과 지휘자 모두에 타격을 주었기 때문에 얼마 가지 않아 주변의 권고와 주선으로 '공식적인' 화해를 했다고는 하지만, 고노에의 관심은 그 때부터 일본이 아닌 해외에 주로 집중되었다. 이듬해인 1936년부터 중국과 이탈리아, 독일, 영국, 라트비아 등지에서 객원으로 활동했으며, 그 해 12월 29일에는 베를린 필과 네 번째 공연을 가졌다. 프로그램은 슈만의 교향곡 제 3번 '라인', 관현악 반주의 가곡과 아리아들(바리톤 게르하르트 휘슈 독창)과 브람스의 교향곡 제 1번이었다.
공연 며칠 후인 1937년 1월 4일에는 베를린 필과 영국 컬럼비아(현 EMI)에 모차르트의 목관 신포니아 콘체르탄테를 취입했는데, 베를린 필 수석 주자들이었던 에리히 벤츠케(오보에)와 알프레드 뷰르크너(클라리넷), 마르틴 칠러(호른), 오스카 로텐슈타이너(바순) 네 연주자가 독주자로 연주했다. 이는 고노에가 베를린 필을 지휘해 녹음한 첫 레코드이자, 베를린 필이 일본 지휘자 밑에서 처음으로 취입한 레코드이기도 했다.
녹음 후 고노에는 미국으로 향했고,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와 맺었던 친분을 토대로 필라델피아 관현악단과 NBC 교향악단을 객원 지휘했다. NBC 쪽에서는 부지휘자 영입도 추진했다고 하지만, 중일전쟁 발발로 인해 미일 관계가 악화 일로를 걷게 되면서 좌절되었다. 결국 고노에는 이듬해 부터 주로 이탈리아와 독일 등 '추축 진영' 국가들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독일과 일본은 1936년에 '반코민테른 협정' 을 맺고 한층 더 가깝게 다가서게 되었고, 이 관계는 훗날 '3국 방공 협정' 같은 전시 조약이나 협정을 통해 더 견고하게 다져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고노에는 단순히 일본의 지휘자라는 음악적인 직위 뿐 아니라, 추축 진영의 예술가들을 대표하는 정치적인 권위도 가지게 되었다. (더군다나 형인 고노에 후미마로가 총리를 역임했다는 것도 그러한 권위에 분명히 한몫 했다.)
이 때문인지, 고노에가 그 뒤로 베를린 필을 꽤 자주 객원으로 지휘한 것을 볼 수 있다. 1938년 4월 21일에는 베를린의 뤼초프슈트라세 111번지에 있는 폴리도르(현 도이체 그라모폰)의 스튜디오에서 베를린 필과 두 번째이자 마지막 녹음 세션을 가졌다. 이 때는 좀처럼 음반으로 듣기 힘들었던 하이든의 교향곡 제 91번과 무소륵스키의 '민둥산의 하룻밤' 두 곡이 녹음되었는데, 이것 뿐 아니라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 와 독일 국가인 '독일인의 노래', 역시 당시 독일 국가이자 나치당가였던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 까지 포함되었다.
양국 국가를 녹음했다는 것은 이 세션이 다분히 정치적인 이해 관계 속에서 행해졌음을 증명하는데, 사실 고노에는 나치 집권 이전이었던 1929년에도 신교향악단을 지휘해 기미가요와 독일인의 노래를 녹음한 적이 있었다. 대일본제국에 대한 자긍심과 독일에 대한 경외심이 이제는 나치에 대한 호감과 협력으로 번진 셈. 나치 집권 초기였던 1933년에 이미 나치 선전성 소속 고위 관료였던 한스 힝켈에게 '빨리 총통님 사인든 사진좀 보내주세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스킬을 시전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독빠에서 히빠로 이미 증세가 악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녹음 세션 며칠 뒤인 4월 23~24일에는 고노에와 베를린 필의 다섯 번째 공연이 있었다. 이틀 모두 1부 서곡과 2부 메인 프로그램은 각각 베버의 오페라 '오베론' 서곡과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제 9번(당시에는 5번) '신세계로부터' 였고, 협주곡으로는 23일에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당시 베를린 필 악장이었던 지크프리트 보리스 협연)이, 24일에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제 5번(빌헬름 켐프 협연)이 연주되었다.
9월에 잠시 귀국해 히틀러 청소년단의 일본 방문 기념 방송 연주회를 지휘한 뒤, 고노에는 다시 독일로 떠났다.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독일에 머물며 관변 단체인 일본-독일 협회 주최의 관현악 연주회나 독일 적십자 후원 연주회, 겨울 구호 기금 마련 연주회, 독일 국방군 위문 연주회 등을 거의 매달 지휘하며 독일에서 활동하는 동맹국 일본 지휘자라는 이미지를 확실히 각인시켰다.
12월 16일에는 베를린 필과 통산 여섯 번째 공연을 가졌고, 여기서는 슈베르트의 교향곡 제 8(7)번 '미완성' 과 고노에 자신의 피아노 독주 협연으로 연주된 베버의 콘체르트슈튀크, 베토벤의 교향곡 제 2번과 레오노레 서곡 제 3번이 연주되었다. 이듬해 부터는 베를린과 마그데부르크, 프랑크푸르트, 켐니츠, 쾰른, 도르트문트 등지의 오페라극장에서 오페라 지휘자로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유럽전이 본격화된 1940년 10월 18일에는 베를린 필과 일곱 번째 공연을 가졌고, 이 공연은 독일의 제국 방송을 통해 생중계 되었다. 프로그램은 글린카의 오페라 '루슬란과 류드밀라' 서곡,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 1번(한스 벨츠 협연), 쿠르트 폰 볼푸르트의 대규모 관현악을 위한 3중 푸가, 베토벤의 교향곡 제 3번 '영웅' 이었다.
이것이 현재 확인되고 있는 고노에와 베를린 필의 마지막 공연인데, 1942년 6월 15일에 고노에와 베를린 필의 연주가 제국 방송에서 중계되었다고 하지만 사실 여부와 공연 곡목은 불분명하다. 전장이 확대되면서 고노에의 활동 영역도 독일에 국한하지 않고 동맹국이었던 핀란드와 불가리아나 점령지가 된 벨기에와 폴란드, 프랑스 등지까지 확대되었다. 분명히 고노에를 일본의 음악 대사 격으로 내세운 정치적인 공연들이었고.
1943년에 독일이 스탈린그라드에서 참패를 당한 뒤, 괴벨스가 대대적인 국민 총동원령을 선포하면서 독일의 음악 활동은 상당히 위축되었다. 국가와 나치에서 인정한 '제국' 호칭의 관현악단 몇 개 단체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악단들은 해단되었고, 단원들도 징병되거나 군수공장 등에 노동자로 투입되었다.
다른 독일 지휘자들과 마찬가지로 고노에도 갑자기 독일에서 일거리가 줄어들게 되었고, 이 상황을 타개해 보려고 일본-독일 협회에서도 1942~43년 시즌에 고노에를 베를린 필 무대에 세우기 위한 물밑 접촉을 시도했다가 좌절되기까지 했다. 베를린 필 단장이었던 게르하르트 폰 베스터만이 고노에 대신 또 다른 일본 지휘자를 추천했던 것이었는데, 그 지휘자는 베스터만의 결정 대로 자신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베를린 필 무대에 설 수 있었다. (누군지는 나중에 쓸 4부 참조)
그 대신 고노에는 독일 국내보다 점령지나 동맹국 연주에 더 치중하게 되었고, 공연 뿐 아니라 언론 인터뷰에서도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매우 뚜렷하게 피력했다. 물론 그 입장은 전쟁의 승리를 위해 음악가들도 군인들과 함께 투쟁해야 한다는 식의 전형적인 군국주의론이었고, 이는 전황이 악화되어 독일 국내 뿐 아니라 점령지에까지 연합군의 공습이 가해져 공연이 사실상 불가능할 때까지 계속 되었다.
패전 직전 라이프치히에 피신해 있었던 고노에는 미군이 도시를 점령하자 추축국 고위 인사로 분류되어 포로가 되었고, 태평양 전쟁이 종결될 때까지 수용소 신세를 져야 했다. 다른 나치 부역자들과 마찬가지로 비나치화 심사를 통과한 뒤 1945년 12월에야 일본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돌아오자마자 고노에가 듣게 된 소식은 형 후미마로가 전범 재판 회부를 거부하고 음독자살했다는 것이었다.
자살한 형과 달리, 고노에는 그 뒤에도 계속 일본에서 지휘 활동을 재개했다. 하지만 고노에를 무턱대고 반기던 동료들은 예전처럼 많지 않았고, 오히려 독일에서 행한 음악활동이 나치즘과 제국주의 선전이었다고 까는 안티들이 생겨났다. 베를린 필도 고노에를 두 번 다시 객원 지휘자로 부르지 않았고, 고노에 자신도 유럽과 미국 무대를 밟는 일이 거의 없었다.
2차대전 후 고노에의 해외 활동 기록은 1960년에 자신이 창단한 ABC 교향악단을 이끌고 유럽 순회 공연을 한 것이 전부였고, 그 마저도 재정 지원 부족으로 인해 몇몇 공연은 취소되고 단원들도 귀국 비용이 부족해 순차 귀국해야 하는 현시창이었다. (결국 ABC 교향악단은 이듬해 심각한 재정난에 봉착해 해산되고 말았다.)
따지고 보면, 악단을 사서 데뷰했고 그 뒤로도 독일과 일본의 우호 관계에 편승해 지휘 무대를 마련했기 때문에 '정말 음악 실력이 좋아서 그렇게 유럽 활동을 많이 한 걸까?' 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공연 대부분이 악단에서 자체적으로 마련한 것이 아니라 관변 단체나 조직에서 개최하는 특별 공연이었던 점을 봐도, 고노에의 음악 역량 이상으로 정치적인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전후 일본 음악계를 부흥시키는데 앞장섰고, 말년에는 후배 음악인들로부터 원로 대접을 확실히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돈빨과 권력빨로 만들어진 음악인' 이라고 매도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대정익찬회' 를 창립한 형 못잖게 군국주의나 나치즘 같은 극우 사상에 심하게 물들어 있었고, 그 사상이 극단화해 촉발된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자신의 음악 재능을 이용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고노에의 베를린 필 다회 지휘 기록도 결코 자랑스럽기만한 기록은 아닐 것이다.
귀족 출신이라는 혈통과 권위를 앞세운 고노에 외에도 베를린 필을 2차대전 때까지 지휘한 일본 지휘자들은 네 명 더 있다. 그들 중 두 명은 고노에와 마찬가지로 녹음도 남겼는데, 악단을 지휘한 순서대로 다음 편에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