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번 CD는 '엘 시스테마' 의 최근 성과물들이라는 대제목에는 완전히 부합되지 않는 물건이다.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관현악단이 연주한 곡은 수록곡 다섯 곡 중 마지막 곡 하나일 뿐이니까. 하지만 이름도 생소한 작곡가의 작품들을 처음 들어보는 기회도 마련한 음반이었다.
1954년에 쿠바의 아바나에서 태어난 오를란도 하신토 가르시아(Orlando Jacinto García)는 1961년에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는데, 연도를 봤을 때는 아마 쿠바에 카스트로 정권이 수립된 뒤 미국의 사주로 반공 성향 쿠바 망명자들이 일으켰다가 실패한 피그스 만 침공 사건을 전후해 쿠바를 떠난 망명자들 중 한 부류로 여겨진다.
미국 정착 후에는 마이애미 대학교에서 모튼 펠드먼을 비롯한 작곡가들에게 배웠고, 졸업 후에도 계속 플로리다 주를 중심으로 한 대학교들의 작곡 강사와 현대음악제 조직위원회 등에서 활동했다. 이외에도 풀브라이트 장학재단 프로그램 강사로 베네수엘라 중앙 대학교와 에스파냐 살라망카 대학교에서 전자음악과 현대음악 분야를 강의하기도 했고, 현재 플로리다 국제 대학교에서 작곡과 담당 과장 겸 교수로 재직 중이라고 되어 있다.
ⓟ 2004 New Albion Records, Inc.
CD 수록곡들은 수록 순서대로 보면 이렇다;
현악 4중주와 기타 독주 '과거의 단편들 (Fragmentos del pasado)' (1998)
콘트라베이스와 테이프를 위한 세 개의 소품 (1990) 중 마지막 곡
기타 독주 '인공적 음색 #1 (Timbres artificiales #1)' (1992)
소프라노 색소폰과 테이프 '분리 (Separación)' (2001)
관현악 '벨라조로부터 온 소리엽서 (Vedute sonore da Bellagio)' (1999)
CD를 받자마자 틀어본 곡은 당연히 마지막 곡이었는데, 앨범 수록곡 중 유일한 실황녹음이기도 했다. 2002년 11월에 카라카스에서 열린 라틴아메리카 음악제 공연에서 녹음했다고 되어 있는데, 지휘는 구스타보 두다멜이 아닌 알프레도 루헬레스(Alfredo Rugeles)가 맡았다고 한다.
'엘 시스테마, 꿈을 연주하다' 에서 본 바로는 시몬 볼리바르에 입단 희망자가 쇄도하면서 악단을 A와 B팀으로 나눴다고 하는데, A팀은 엘 시스테마 창립 멤버들을 위시한 노련한 성인 연주자들로 구성된 악단이고 B팀은 30세 미만 청소년/청년 연주자들로 구성된 악단이라고 되어 있다.
A/B팀이 언제 나눠졌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언급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A팀을 맡고 있는 지휘자가 루헬레스고 B팀은 두다멜이라고 되어 있었던 만큼 아마 이 연주도 A팀 연주로 여겨진다. 물론 루헬레스가 B팀을 이끌고 공연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1949년 미국 워싱턴DC에서 태어난 루헬레스는 독일 뒤셀도르프의 로베르트 슈만 음악학교에서 작곡과 지휘를 배웠고, 아직 유학 중이던 1981년에 시몬 볼리바르 연주회에서 지휘자로 공식 데뷰했다. 귀국 후에는 카라카스 시립 교향악단 부지휘자와 테레사 카레뇨 복합문화공간 음악 감독을 거쳐 1998년부터 시몬 볼리바르와 라틴아메리카 음악제의 예술 감독으로 재직 중이라고 한다.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이런저런 음반과 영상물을 내놓고 있는 두다멜과 달리 루헬레스의 녹음은 구하기가 매우 힘든 편인데, 그나마도 낙소스 뮤직라이브러리 검색하다 발견한 이 녹음이 음반으로서는 거의 유일한 듯 하다. (아마도 하루의 연주를 무편집으로 담아냈을) 실황이라서 가끔 객석으로부터 나오는 기침 소리 등 소음이 좀 거슬리기는 하지만, 이들이 동적인 에너지만 갖고 있는 악단이 아님은 연주 시작 후 몇 분 지나지 않아 느낄 수 있다.
제목이 마치 표제음악처럼 되어 있어서 뭔가 극적인 수사를 풍부하게 구사한 곡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일단 들어보니 비교적 정적이고 느릿하게 진행되는 곡이었다. 작곡가가 이탈리아 벨라지오의 록펠러 센터에 머물던 중 받은 인상을 그려낸 작품이라고 되어 있는데, 3관 편성의 표준 관현악에 다양한 타악기를 요하는 곡이지만 전체적인 음향이나 음색은 부드러우면서도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 그리고 작곡자가 선(禪)이나 만트라 같은 동양/인도 사상에 영향을 받아서인지는 몰라도 명상적인 느낌도 강하고.
단일 작품으로는 거의 19분에 달하는 꽤 긴 곡이라 이렇게만 나가면 꽤 지루할 법한데, 의외로 뭔가 제례악 같은 궁중음악 듣는 느낌도 나서 개인적으로는 흥미있게 들었다. 다만 전위적이고 강렬한 면모를 기대하기는 힘든 작품이기도 했고.
나머지 작품들도 성향은 대체로 비슷했다. 중남미계 작곡가는 화려한 리듬과 열정적인 수사를 많이 쓴다는 선입견에 비춰보면, 가르시아는 미니멀리즘과 동양 사상에 강한 영향을 받아 간명한 어법을 구사하면서 극적인 대비 보다는 소소한 음향과 음색의 변화와 대조에 신경쓴다는 인상이었다.
어쿠스틱 악기와 전자음향이 곁들여지는 두 곡에서는 전자음향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쓰이고 있는데, 콘트라베이스 소품에서는 미리 녹음한 테이프를 틀어두기만 한 데 반해 '분리' 에서는 녹음된 테이프의 소리를 틀어놓고 조작/변조하는 '연주자' 와 악기 연주자와 협연하는 소위 '라이브 일렉트로닉스' 계열의 아이디어를 도입하고 있다.
세 번째로 도착한 CD는 두다멜과 함께 '엘 시스테마' 를 통해 유명해진 젊은 콘트라베이시스트의 독주를 담은 콘트라베이스 협주곡들을 담고 있는데, 이것 역시 다음 편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