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은 있지만 마땅한 반찬이 없을 때 흔히 생각나는 대안이 '비벼먹기' 다. 특히 3분요리 쇠고기카레/짜장은 값도 싸고 쉽게 구할 수 있어서 자취생들의 대안이라고 하는데, 카레든 짜장이든 간에 나도 마찬가지로 비벼먹을 수 있는 소스라면 다른 반찬이 꼭 필요하지는 않으니 이것저것 차려먹는 것을 번거로워 하는 성격에 안성맞춤인 것 같다.
다만 같은 카레라고 해도 일본 카레는 비벼먹지 않는게 그 쪽 관습이라고 하는데, 어차피 한국에서 일본 룰을 꼭 따르라는 법은 없으니 나는 그냥 시쳇말로 '꼴리는 대로' 먹는 편이다. 오히려 먹는 법보다 일본 카레가 한국 카레와 상당히 다르게 느껴진 것은 조리법과 맛, 모양새였는데, 다르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닌 것처럼 일본식 카레를 한국식 카레와 다르다고 해서 거부할 이유는 없다.
일식 카레를 처음 먹어본 곳이 홍대 정문 근처의 서교푸르지오 상가에 있던 멘야도쿄였지만, 저기는 이미 문을 닫은 지 오래였고 그 뒤로도 일식 카레를 먹을 일은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창 더울 때였던 7월 초순에 같은 상가의 다소 눈에 띄지 않는 2층 안쪽에서 두 번째로 일식 카레와 대면할 기회가 있었다.
가게 이름은 '사토시카레' 였고, 나중에 찾아 보니 일본인 아주머니가 직접 운영하는 곳이라고 했다. 하지만 한국어가 별로 어눌하지는 않아서 눈치채기는 쉽지 않았고, 아이러니하게도 저 가게에서 처음 먹은 것은 카레가 아닌 냉모밀이었다. 워낙 더위에 시달리다 보니 아예 찬 음식을 기대하고 갔기 때문이었는데, 그나마 정신줄 좀 붙잡은 뒤 두 번째 갔을 때는 가게 이름으로 내건 그 카레를 먹어보기로 했다.
들어가자마자 볼 수 있는 가게 안의 모습.
호롱이나 일본화 등으로 장식한 내부 공간에서는 물론 일식집 분위기가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소위 '로바다야끼' 집마냥 완전히 그 분위기로 도배되지는 않은 모습이었다.
물론 마네키네코도 장식되어 있었는데, 특유의 일본색을 떠나 고양이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자연스레 눈길이 가는 조형물이다. 보통은 왼발이든 오른발이든 앞발 하나만 들고 있지만, 제일 큰 노란 마네키네코처럼 두 발을 다 들고 있는 인형도 있는 모양이다.
카레에 대한 간단한 소개. 몇 군데 맞춤법이 어색한 부분은 있었지만, 한국 식당에서도 어렵잖게 오타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이걸 갖고 일본인이 하는 집이라고 쉽게 추측하기는 힘들었다.
가게가 언론에도 몇 차례 소개되었는지, 관련 기사가 스크랩되어 있었다. 물론 나는 한국 언론 전반을 매우 불신하고 있으므로 사진만 찍고 자세히 보지도 않았지만.
기사보다 더 중요한게 당연히 메뉴판이다. 아무래도 입지가 입지다 보니, 가격대는 다소 센 편이었다. 기본 메뉴인 사토시카레에 이런저런 토핑을 얹은 것이 주가 되었는데, 기본 카레보다는 그 밑에 있는 토핑 카레 삼총사에 눈길이 갔다. 그래서 첫 번째 카레는 돈까스카레로 주문했다.
우동이나 소바 소짜를 더한 세트메뉴도 있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이 집의 묘미는 카레 그 자체인 것 같아서 카레 단품으로 먹기로 했다. 토핑에는 메뉴에도 있는 돈까스나 생선까스, 고로케 외에도 새우와 관자 같은 해산물도 있었는데, 이건 따로 메뉴가 없어서 사토시카레를 시키고 추가 토핑으로 주문해야 먹을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주문한 돈까스카레. 물론 이것만 휑하니 나오는 건 아니고, 샐러드와 밑반찬 두세 종류, 국이 같이 나온다. 하지만 샐러드에는 일본 생채 요리에 거의 필수로 들어가는 싱싱한 생오이가 들어가서 패스했고, 앞서 말한 것처럼 비빔 요리를 먹을 때는 반찬에 거의 손을 대지 않기 때문에 단무지나 오뎅 볶음 정도만 조금 먹었을 뿐이었다.
카레는 칠판에 쓰여진 것처럼 양파를 주로 넣고 약간의 고기를 더해 마치 살짝 걸쭉한 수프 같은 모양새였고, 매운 맛은 거의 느낄 수 없었고 양파 덕분에 오히려 달달했다. 멘야도쿄에서 처음 먹었을 때는 한국식 카레 외에 다른 변종이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다소 실망했었지만, 일본 카레는 원래 저렇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는 그 달달함도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었다. 매콤하고 건더기 많은 카레를 먹고 싶을 때는 한국 카레, 달달하고 부드럽게 넘어가는 카레를 먹고 싶을 때는 일본 카레라는 식으로.
토핑으로 올라앉은 돈까스들. 물론 돈까스 전문점은 아니었으므로 두께는 그리 두껍지 않았지만, 고기 층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는 되었고 맛도 괜찮았다. 애초에 돈까스 자체가 오무라이스와 함께 내가 가장 즐겨먹는 '경양식' 이니, 새까맣게 태우거나 설익히지 않는 한 별로 불평할 수 없는 메뉴니까.
그렇게 달달함을 음미해가며 한 그릇을 무난하게 비웠다. 원래는 이걸로 끝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나머지 메뉴도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들어서 8월 초순과 말에 두 차례 더 갔다왔다.
두 번째 갔을 때는 생선카레를 시켰다. 메뉴 이름만 봐서는 생선(さかな)이라는 말이 들어가서 카레에 생선구이 같은 걸 올려서 먹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보이는 바와 같이 생선까스가 올라간 카레다. 생선까스의 크기는 돈까스보다 다소 작았는데, 가게에 들어오기 전 복도에 있던 현수막에도 크기가 작게 나온 것을 보면 아무래도 단가 문제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숟가락으로 몇 번 잘라본 뒤. 생선까스를 먹을 때면 늘 우려하는 가시 같은 것은 없어서 안심하고 먹을 수 있었다. 물론 원재료의 특성상 돈까스보다는 담백했지만, 돼지고기를 매우 좋아하는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돈까스카레가 좀 더 괜찮아 보였다.
그리고 세 번째 갔을 때 청한 고로케카레. 공교롭게도 저 날은 내가 이 거사를 치른 날이었고, 한일 관계가 이명박의 독도 방문과 일왕에 대한 사과 요구 발언으로 한층 더 싸늘해지던 시점이었다. 그런 점에서 참 미묘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음식에까지 그런 것을 생각하자니 그것도 참 고지식해 보여서 먹는 데 집중했다.
아담한 사이즈의 고로케 두 조각이 올라간 모양새였는데, 역시 숟가락으로 갈라보니 으깬 감자와 삶은 달걀을 섞어 반죽해 튀긴 감자 고로케였다. 크림 고로케로 했을 경우 고로케 속과 카레 소스가 섞여서 맛이 애매해지기 때문에 그랬는 지는 모르겠지만, 포슬포슬한 감자의 맛과 달달한 카레의 궁합도 자연스럽다고 느껴졌다. 물론 익힌 감자 특유의 끝내주는 뜨거움 덕분에 먹는 데 좀 시간이 더 걸리기는 했지만.
이외에 이 가게의 최고가 메뉴인 사토시스페셜도 있지만, 한 끼 식사에 쓰는 돈이 8000원대 이상이 되면 아무리 맛있어 보여도 쉽게 지갑을 열 수 없는 탓에 포기했다. 그냥 사토시카레에 새우튀김 토핑 또는 관자 토핑을 추가해서 먹는 게 좀 더 부담이 덜할 것 같은데, 어차피 10월 서코 예매권도 사러 가야 하기 때문에 한 번 시도해 보고 싶다. 물론 카레+토핑으로 하면 500원 더 비싸지는 것을 감수해야 겠지만.
여담으로 내가 이 가게 주인이 일본인이라는 것을 눈치챈 것은 손님이 식사를 마치고 나갈 때의 모습이었다. 보통 한국 식당에서는 어지간한 단골이 아닌 이상 주인이 주방 바깥으로 나와 손님에게 인사하는 경우를 보기 힘든데, 여기서는 먹고 계산한 뒤 나올 때마다 주인이 나와서 깍듯이 예의를 차린 인사를 하고 있었다.
물론 인사는 한국어로 했지만 그 스타일이 일본 드라마나 영화 등에 나오는 일식집의 그것과 너무 흡사해서, 그냥 시크하게 '잘 먹었습니다' 라고 한 마디 하고 나오는 것에 익숙해진 나로서는 약간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그리고 나는 단골도 아니고 그냥 생각날 때+주머니 사정이 좀 좋을 때 가끔 갔을 뿐인데. 하지만 이런 친절도가 가게 이미지에 주는 효과는 음식 맛의 그것과 비교해도 꽤 긍정적인 효과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이 가게를 쉽게 잊어버리기는 힘들 것 같다.
이제 밀린 짤방이나 글 소재도 점점 줄고 있다. 그래도 아직 노량진 쪽의 어느 볶음밥집과 오랜만에 평택까지 가서 먹은 것 두 종류, 평택보다는 가까운 인천가서 먹은 만두국, 안암동 모 중국집에서 먹은 볶음밥 등 이 카테고리에 쓸 것은 아직도 많은 편이다. 외식에 쓰는 돈을 조금씩 줄이고 있기는 하지만, 거리와 비용을 따져봐서 괜찮은 곳 같다면 여전히 호기심을 주체 못해 발걸음을 옮기는 본능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