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내가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호감 혹은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는 뮤지션은 얼마 되지 않는다. 한국의 대중음악씬 자체가 자생적이기 보다는-물론 영국이나 미국의 경우에도 100% 순국산이라는 어이없는 개념을 쓸 수 없지만-일본이나 미국 등 강대국의 힘에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꽤 많았던 탓에 그렇기도 하고, 나의 '잘 팔리는' 노래에 대한 관심도 바닥을 기다 못해 운하를 파고 지하철을 뚫는 정도로 현상유지가 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과거의 어두움' 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몇몇 뮤지션들도 섣부른 '정치적' 행동을 보여주는 바람에 멀리하게 된 경우도 적잖은데, 나 자신이 '음악은 정세나 사회 현상과 무관할 수 없다' 는 생각을 지금껏 견지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모순된 현상이기도 하고. (나도 인간인 만큼, 정치적 지향성이 있고 선호하는 계파가 있다. 멀리한 뮤지션들의 대부분은 나와 거의 정반대로 가버린 부류들이다.) 그래서 그 '좋은 인상' 의 뮤지션들은 대개 자신의 음악 외에는 일체 어떤 입장이나 견해도 표명하지 않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작년과 올해에 각각 6년과 4년만에 정규 앨범을 발표해 화제가 된 두 인물들인 유희열-엄밀히 말하면 프로젝트 그룹 '토이' 의 이름으로-과 김동률도 호감을 갖고 있는 부류에 속하고 있는데, 이번에 쓸 뻘글의 주제는 김동률에 관한 것이다. (다만 최근의 5집은 아직 구입하지 못했기 때문에 극히 비중이 적다. 그래서 제목에 '과거' 라고 명시해 놓은 것이고)
김동률은 서동욱과의 듀엣 그룹 '전람회' 활동을 끝낸 뒤 이적과의 프로젝트 그룹 '카니발' 로 잠시 외도를 하거나 신해철의 첫 영화 OST인 '정글스토리' 의 편곡 등을 도와주는 등의 부업을 하면서 자신의 첫 독집을 준비했는데, 그 결과로 나온 것이 1집 '망각의 그림자' 였다. 예전의 전람회 앨범에서도 그 편린을 느낄 수 있었지만, 김동률이 가요 활동을 하면서도 나름대로 자신의 곡들에 '클래식적인' 색깔을 입히기 위해 본격적으로 시도한 곡들이 담겨 있어서 의미가 있기도 하고.
그 시도는 앨범의 세 곡-'배려', '걱정', '동반자'-에 23인조 세션 스트링을 사용한 것이었는데, 정글스토리 OST 작업 때도 김동률이 주로 맡은 것이 메인 테마의 스트링 편곡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예정된 수순이기도 했다.
그러나 1집을 내고 콘서트를 가진 뒤 김동률이 택한 행보는 조금 의외였는데, 미국 유학을 택한 것이었다. 버클리음대에 등록해 영화음악을 전공했다고 하는데, 유학 기간 동안에도 솔로 앨범 작업을 병행해 두 장의 독집-2집 '희망' 과 3집 '귀향'-을 출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때 나온 앨범들의 스케일은 전작 앨범들을 훨씬 뛰어넘은 것이었다.
2집의 크레딧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런던 교향악단(London Symphony Orchestra)이 기용되었다는 것이었다. 물론 토이 3집에서 런던 필이 그랬던 것처럼 해당 악단의 정규 멤버들이 그대로 들어간 것은 아니었고 악단 규모도 실내 관현악단 수준으로 줄여서 녹음한 것이었지만, 영국 관현악단 중 '빅 파이브' 의 반열에서 여전히 손색없는 명성과 연주력을 자랑하는 악단을 섭외한 것은 분명 신선한 충격이었고.
아직 유학 초기였던 시기에 나온 2집에서는 김동률 자신이 직접 관현악 편곡을 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는데, 크레딧에 보면 관현악 편곡과 지휘를 맡은 이가 케빈 캐스카(Kevin Kaska)라고 나와 있다. 그런데 저 캐스카라는 인물이 그 당시에 디씨 식으로 표현하자면 '듣보잡 젖뉴비' 였던 인물이 결코 아니었던 거였고.
캐스카는 1972년에 시애틀에서 태어난 인물로, 고등학교 시절 헐리웃에서 일하던 편곡자에게 작곡 레슨을 받으면서 스승과 같은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버클리음대에 진학해 영화음악을 전공했는데, 재학 중에도 틈틈이 빅밴드나 관현악단용 편곡을 만들어 돈을 벌기도 했고 정규 편성의 관현악 작품도 써가면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시작했다고 한다.
1990년대부터는 미국 유수의 관현악단 중 하나인 보스턴 교향악단과도 작업하기 시작했는데, 보스턴 교향악단은 비시즌기에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 로 활동해서 유명하기도 하다. 그래서 캐스카도 보스턴 팝스 용으로 많은 편곡을 만들었는데, 그 때 팝스 지휘자였던 존 윌리엄스에게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존 윌리엄스는 최근에 영화음악 외에도 트럼펫 협주곡이나 튜바 협주곡 등의 '정통 클래식 작품' 들을 작곡하고 있는데, 캐스카도 그것을 벤치마킹했는지 보스턴향 하피스트의 위촉으로 하프 협주곡을 작곡하기도 하고 세계적인 유포니움(euphonium. 취주악단에서 중저음역을 맡는 금관악기) 주자인 애덤 프라이를 위해 협주 작품 두 곡을 써주기도 했다.
같은 학교 선배가 저런 활동을 하고 있고, 또 모교에도 나와 강의하고 있었으니 김동률에게도 분명히 대면 기회가 주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캐스카의 관현악 편곡과 지휘로 '2년만에' 와 '벽', '악몽', '크리스마스 선물', '한여름밤의 꿈', '윤회(기악)', '모험', '희망' 여덟 곡이 녹음된 것이었고. 수록곡의 절반 이상이나 되는 관현악 비중을 보아도 범상치 않은 시도였다.
물론 '윤회' 의 경우에는 사카모토 류이치의 영향이 너무 많이 묻어난다는 비판도 있었고, 김동률 자신도 앨범을 발표한 뒤 자신이 직접 관현악 편곡까지 맡아야 겠다는 열망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3집에서도 런던 교향악단을 기용하되, 관현악 편곡은 한 곡을 제외하고 자신이 직접 맡기 시작했고.
3집에서는 크레딧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사랑한다는 말' 과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하소연', 'REQUIEM', '망각', '귀향' 여섯 곡에 관현악을 사용했는데, 캐스카와 같이 편곡한 '귀향' 을 제외한 나머지 곡들은 모두 김동률 자신이 관현악 편곡을 맡았다. 지휘자의 경우에는 캐스카 대신 데이비드 스넬(David Snell)이 섭외되었는데, 저 스넬이라는 인물도 여간내기가 아니었고.
스넬은 요전에 영국의 텔레비전 장기자랑 프로그램에서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 에 나오는 '공주는 잠못 이루고' 를 불러 청중들은 물론 고압적인 자세의 심사위원들도 감명시켜 화제가 된 폴 포츠의 앨범 'One Chance' 를 갖고 있으면 알 만한 인물이다. 해당 아리아와 여타 관현악 반주곡들에서 지휘자로 나왔으니까.
물론 그 이전에도 영화음악에서 잔뼈가 굵은 지휘자이자 편곡자로 오랫동안 활동하고 있었는데, 한국에 개봉되었던 주요 작품들은 '아버지의 이름으로(1993)' 나 '컷스로트 아일랜드(1995)', '엠마(1996)', '애딕티드 러브(1997)', 그리고 '시월애' 의 미국판인 '레이크 하우스(2006)' 등이 있다.
참가작 중 대박을 터뜨린 흥행작은 없었다고 해도 나름대로 건실한 활동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영화음악 외에도 캐스카를 언급할 때 잠깐 썼던 존 윌리엄스의 튜바 협주곡을 비롯한 근현대 작곡가들의 협주 작품들을 담은 클래식 음반도 영국 ASV에서 제작하기도 했다. 프로그레시브 락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면 분명히 알고 있을 릭 웨이크먼의 'Return to the Centre of Earth' 에서도 런던 교향악단을 지휘해 크레딧에 올라와 있고.
캐스카 때와 마찬가지로 같은 영화음악 분야를 배웠던 김동률도 스넬과 자연스럽게 접촉했으리라 생각되는데, 그래서 3집 외에 4집 '토로' 에도 마찬가지로 런던 교향악단과 스넬이 기용되었다. 3집의 경우에는 일단 2집의 스케일감이나 관현악의 전면적인 사용을 좀 자제한다는 방침 때문에 '오케빨' 이 좀 죽은 듯한 느낌도 있었으나, 4집에 와서는 다시 2집의 노선으로 회귀해 과반수인 여덟 곡에 관현악을 사용했고.
'사랑하지 않으니까요', 와 '이제서야', '잔향', '양보', '신기루', 'Déja-vu', '청원', '고별' 이었는데, 특히 '청원' 과 피아노 솔로곡인 'River' 에서는 피아니스트 김정원과 작업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미 '두 사람' 을 언급해버렸지만, 김정원도 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 에 출연하는 등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고 베토벤이나 쇼팽, 라흐마니노프, 차이코프스키, 모차르트 등의 작품을 음반으로 취입해 클래식 피아니스트로 입지를 굳히고 있고.
다만 김동률도 2집부터 3연속으로 런던 교향악단을 기용하는 등 재정 지출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인지, 4집 발매 후에는 방송 활동에 주력하면서 완충기를 갖고 있다가 올해에야 5집 '독백' 을 낸 거였고. 물론 그 사이에 데뷰 10주년을 기념하는 콘서트를 개최하기도 했고, 미발표곡 '감사' 가 포함된 베스트 앨범을 내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이 때에는 여러 사정상 공연이나 음반 녹음을 위해 임시 편성한 세션 오케스트라나 스트링이 기용되었다.
이번 5집에서도 김동률은 굳이 해외 악단을 기용하기 보다는 ('감사' 에서처럼) 국내 세션 연주자들로 구성된 K-Strings를 섭외했는데, 저 현악 합주단은 이미 수많은 국내 가요 앨범에 참여한 경력이 있는 세션 전문 단체였다. (듣기로는 부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단원들과 서울대 음대 관현악과의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있다고 하는데, 자세한 정보는 불명확하다.)
5집의 노선도 3집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수구초심' 경향 때문에 관현악의 등장이 많이 자제되어 있다고 하는데, 마지막 곡 'Melody' 에서는 콘서트 때 김동률과 새로이 관현악 편곡을 준비하고 지휘를 맡았던 이지원이 기용되어 예외적인 스케일감을 선보이고 있다고 한다.
물론 4집 이후 몇 년간 한국 가요계에서 활동하는 세션 뮤지션들의 기량이나 표현력도 괄목할 만큼 발전하고 향상되었기 때문에, 김동률 본인으로서도 '이제 국내 연주자들이 주축이 된 관현악단을 사용해도 될 것 같다' 는 판단을 했던 것 같다. 최근에 발표된 고양과 성남, 서울 세 곳에서 가질 예정이라는 콘서트들에서도 마찬가지로 관현악이 사용될 것 같은데, 차후 6집이 나온다면 그 때는 어떻게 될 지 아직 모르겠다. 2집이나 4집 등 '짝수 앨범들' 에서처럼 다시 관현악이 강조된다면 또 런던 교향악단을 사용할지, 아니면 세션 악단이나 국내 정규 관현악단을 기용할지.
*참고로 위에 잠깐 언급한 것처럼 대중음악 음반 녹음 때는 런던 교향악단이던 세션 관현악단이건 일반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풀 오케스트라가 아닌 축소 편성으로 스튜디오에 들어가게 되는데, 특히 스트링의 규모를 대폭 줄이는 것이 보통이다. 대개 제 1바이올린 8/제 2바이올린 6/비올라 4/첼로 4/콘트라베이스 1~2 정도로 편제되는데, 콘트라베이스의 경우에는 일렉 베이스가 음량상 유리하기 때문에 제외하기도 한다(토이 2집과 4집 참조).
스트링 숫자를 줄이면 그 만큼 돈이 적게 들어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유리한데, 녹음과 편집 기술이 비약적으로 향상된 덕에 소편성 관현악이라도 커다란 스케일감을 낼 수 있다는 데도 힘입은 것이다. 라이브에서도 스트링을 마찬가지 규모로 쓰되, 각 악기들의 프로그(frog. 악기 몸통과 줄 사이를 받쳐주는 나무조각)에 마이크를 달아 음량을 증폭시키는 방식으로 제작비나 출연료를 절감하고 있다. (김동률 10주년 콘서트 때도 그랬고, 뮤지컬 공연 때도 자주 쓰이는 방식임)
관악기는 대개 목관악기가 종류별로 한 쌍씩 편성되는 2관 편성이나 그 이하인 1관 편성으로 편제되는 경우가 많은데, 김동률 라이브 때에는 플루트 1/오보에 1/클라리넷 1로 간소하게 사용했다. 그러나 호른을 넣을 경우에는 1관 편성이라도 꼭 한 쌍을 사용하는데, 악기 자체가 풍성한 코드 공급과 보강에 유리하기 때문에 하이든과 모차르트 시대부터 관례로 내려오고 있고.
참고 사이트:
케빈 캐스카 홈페이지
('Listen to MP3s' 에 들어가 보면 'Arrangements by Kaska' 에 'Asian Music' 이라고 되어 있는 파일을 볼 수 있는데, 클릭해 재생시켜 보면 2집의 '윤회' 일부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