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비디오 게임들 OST의 관현악판 앨범들을 질러대면서 이런저런 인물들을 곁다리로 알게 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특히 마리오 클레멘스(Mario Klemens)라는 이름의 지휘자가 자주 눈에 띄었다.
클레멘스는 히사이시 조의 '원령공주' 와 '하울의 움직이는 성' 교향 모음곡판 앨범들과 노미 유지의 'AIR 극장판' 특전 교향곡 앨범에서 체코 필을 지휘했던 인물인데, 이것저것 찾아보니 꼭 관현악판 앨범은 아니더라도 콧수염 건담(턴에이 건담)이라던가 울프스 레인, 오 나의 여신님 극장판 등의 OST 녹음 때 체코 필이나 바르샤바 국립 필 등의 지휘자로 얼굴을 자주 내비쳐서 일본 애니음악 팬들에게도 어느 정도 알려져 있는 것으로 안다.
대충 프로필을 찾아 보니, 클레멘스는 1936년에 체코의 흘루메츠(Chlumec)라는 곳에서 태어났고 프라하 음악원에서 바츨라프 스메타체크에게 지휘를 배운 뒤 1959년에 졸업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인물이었다. 1966년에는 프랑스의 브장송 국제 지휘 콩쿨에 참가해 1위로 입상했는데, 저 콩쿨을 거쳐간 지휘자들 중에는 오자와 세이지, 미셀 플라송, 즈데넥 마칼, 헤수스 로페스-코보스, 실뱅 캉브를랭, 사도 유타카 등 현역으로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지휘자들이 꽤 많다.
하지만 1위 입상이라는 화려한 경력을 추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고국인 체코나 동유럽권 국가들에서만 활동했는데, 아마 콩쿨 입상 2년 뒤에 벌어진 '프라하의 봄 민주화운동' 때문에 서방에서 활동하는 데 큰 제약을 받게된 것 같다. (헝가리의 1956년 반공 봉기 때처럼 극악의 유혈 사태가 벌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공식 집계로만 53명의 체코인과 19명의 슬로바키아인이 바르샤바 조약군의 진압 과정에서 살해당하고 수십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그렇게 활동 범위가 좁아진 탓에 서방 세계에서는 미지의 인물이 되어 버렸는데, 고국의 수프라폰을 비롯한 동유럽 국영 음반사에 남긴 녹음도 거의 없어 그가 젊었을 때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관해 알아보는 것이 굉장히 힘들다. (특히 클래식 쪽에 남긴 음반은 극히 드물다.)
그나마 자신의 소질을 영화음악에서 찾은 것 같은데, 약 150여 편의 영화와 뮤지컬, 애니메이션 등의 OST 녹음들에 이름을 내걸고 있다. 사회주의 정권 시절에는 동유럽 영화에만 참여했으나, 1980년대 후반에 민주화가 된 이후에는 외국 영화의 작업도 병행했다. 그러나 참가한 작품들의 대다수는 아직 한국에 소개도 되지 않았고, 되었다고 해도 이렇다할 흥행 실적이 없는 것이 또 다른 핸디캡이 되었고. (내가 영화관에서 본 것 중에는 장 르노가 신나게 망가졌던 '비지터' 가 전부다. 물론 애니메이션 중에는 SICAF 때 봤던 '파름의 나무' 를 비롯한 여러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었고.)
다만 개인적으로 이런저런 자리에서 만났던 작곡가 김대성의 앨범 중 뮤지컬 '태풍' 의 하이라이트 음반에도 이름이 올라온 것을 확인했는데, 거기서는 (아마 녹음 세션을 위해 임시로 조직된 듯한) 프라하 스튜디오 교향악단을 지휘했다.
브장송 콩쿨 입상 1년 뒤에는 아들인 아담 클레멘스가 태어났는데, 아담도 프라하 음악원에서 아버지에게 지휘를 배우고 현역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다만 아버지와 달리 작곡가로도 활동하고 있고, 마찬가지로 영화음악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어서 IMDb에도 이름이 올라가 있다.
마리오 클레멘스가 지휘해 녹음한 클래식 레퍼토리 중 브람스 교향곡 1번이 낙소스 산하 초염가 레이블인 아마디스(Amadis)에서 출반되었다는 사실을 작년 말에 확인했는데, 낙소스 뮤직라이브러리에서도 서비스하고 있다(음반 번호 7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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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현악단은 필하모니아 카소비아(Philharmonia Cassovia)라는 '듣보잡' 악단이었는데, 확인해 보니 슬로바키아 제 2의 도시인 코시체(Košice)를 거점으로 하는 슬로바키아 국립 필하모닉 오케스트라(Slovak State Philharmonic Orchestra. 브라티슬라바의 슬로바키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는 관계없는 단체임)의 단원들이 중심이 된 실내 관현악단이라고 한다. (이보다 더 작은 규모의 악단으로 '카메라타 카소비아(Camerata Cassovia)' 도 활동하고 있는데, 낙소스 산하 마르코 폴로의 요한 슈트라우스 1세 대전집에 참가한 바 있다.)
동구권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하면서 '국립' 이었던 관현악단들도 철밥통에 금이 가는 바람에 한바탕 재정난을 겪게 되었는데, 그 재정난 타개에 어느 정도 플러스 요인이 된 것이 낙소스 등 저가 음반사들의 진출과 일본 등 해외에서 수주하던 영화음악 녹음 작업이었다.
필하모니아 카소비아도 낙소스가 초저가로 추진하던 서브 레이블인 도나우(Donau)에 꽤 많은 레퍼토리들을 녹음했는데, 낙소스의 간판 지휘자인 요하네스 빌트너를 비롯한 지휘자들이 참가했다. 나도 클래식 초짜였던 초딩 시절에 장당 3000\이라는 가격에 혹해 대량으로 구입했었는데, 지금은 한 장도 남아있지 않고.
그 때 저 아마디스 음반과 같은 커플링의 것도 한 장 가지고 있었는데, 내용물이 완전히 똑같았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교향곡 2번도 필하모니아 카소비아 연주였는데, 그 녹음의 지휘자는 오타카르 트릴리크라고 확실히 기억하고 있음)
실내 관현악단 연주라 그런지는 몰라도 상당히 '경량급' 으로 감량된 형태였는데, 개인적으로는 '너무 가볍다' 라는 인상이었다. 내가 원체 푸르트벵글러나 아벤트로트 등의 올드타입 지휘자들이 만든 녹음을 주구장창 들어버릇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그런 스케일의 경중 외에도 해석 상으로도 뭔가 자기 주장이 부족하고 안전빵으로 지나가려 한 듯한 느낌을 계속 지울 수 없었다. 염가판인 만큼 녹음도 그리 좋지는 않은데, DDD라고 무조건 고음질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물건이기도 하고.
아무튼 국내에서 구하기 거의 불가능한 앨범이지만, 그렇다고 해외 사이트에 구매대행까지 해가면서 구할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혹시 '극렬 마리오 클레멘스빠' 가 있다면 분명 구입해야 될 자료일텐데, 물론 내가 위에서 저렇게 깠다고 '완전 구제불능 졸연' 까지는 아니니 너무 위축될 필요는 없다.
p.s.: 토에이의 '클라나드' 극장판 DVD 스펙이 발표됐다는데, 이번에도 스페셜 에디션이랑 컬렉터즈 에디션 두 종류가 한정판으로 나온다고 한다. 하지만 은근히 기대했던 교향곡 'AIR' 의 후속작인 교향곡 '클라나드' 는 없는 듯. 개인적으로는 노미 유지가 이번에도 마법을 발휘해주길 바라고 있어서였는지 좀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