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간 사모은 CD들 중 몇 장 (11).
하지만 재즈를 처음 들을 때도 주로 클래식 요소와 접붙이기한 소위 '크로스오버' 식의 것을 찾아 들었던 만큼, 한국에서도 그런 시도가 있었다는 것은 충분히 내 지갑을 열 만한 소식이었다.
작년에 나는 어느 희귀 LP를 3만원 주고 구입했다. 한국 재즈 1세대라는 드러머 겸 타악 주자 류복성이 데뷰 3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것이었는데, A면을 뭔가 독특해 보이는 한 곡이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울시향이 당시 상임 지휘자였던 정재동의 지휘로 1987년에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최한 '범세대 연주회' 의 실황 일부를 담고 있는데, 류복성이 이끄는 밴드와 시향이 협연한 것이었다.
곡 제목은 'Bok-Sung Theme : 멋' 이라고 되어 있었고, 현재 KBS 사극 대부분의 OST를 작곡하고 있는 김동성이 편곡했다고 나와 있었다. 시향과 협연한 밴드는 류복성 외에 김수열(테너색소폰), 신관웅(피아노), 함기호(베이스), 김희현(드럼) 5인조로 짜여져 있었다. 하지만 그저 희귀한 가치 때문에 구입한 것이고, 턴테이블은 버린 지 한참 돼서 들어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몇 달 전에 지인으로부터 참 허무하다면 허무한 소식을 들었다. 저 LP에 든 곡이 CD로도 나와 있다는 거였다. 괜히 듣지도 않을 LP를 3만원 씩이나 주고 구입했네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문제는 또 있었다. CD가 나오기는 했지만 절판 상태고 온라인/오프라인 통틀어 구입하기가 힘들다는 거였다. 실제로 온라인에서 팔던 건 알라딘 중고매장에서 누군가가 6만원(!!!)이라는 가격에 내놓은 것 뿐이었다.
하지만 저 자비심 없는 가격 때문에 되레 오기가 생겼다. "내가 6만원 주고 저 CD를 사나 보자!" 는 식으로. 그렇게 해서 이런저런 중고음반점들을 돌아다녔는데, 정말 눈에 쉽게 띄지 않았다. 그러다가 또 허무하게 입수했는데, 의외로 정말 가까운 곳에 있었다. 7월에 일해서 받은 돈을 가지고 뭘 살까 하다가 오랜만에 황학동 중고음반점 쪽에 가보자고 생각했는데, 사실 황학동 쪽은 회현동보다 새 중고음반이 들어오는 주기가 느려보였고 재즈 쪽도 주로 외국 재즈 음반 위주라서 별 기대도 하지 않았다.
들른 가게 중 한 군데인 장안레코드에서 '혹시 한국 재즈 음반만 모은 코너가 있나' 하고 물어봤는데, 통로 쪽 진열장에 있다고 하면서 보여줬다. 그런데 거기에 내가 찾던 그 CD가 떡하니 들어 있었다. 값이 얼만 지 물어 봤는데, 2만원이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정말 간단한 승리(???)를 거두었는데, 일단 집에 와서 다른 수록곡은 다 제쳐두고 그것만 우선 들어봤다.
CD 두 장으로 구성된 이 앨범은 류복성의 데뷰 50주년 기념으로 나온 두 종류의 음반 중 하나인데, 사실 제목에서도 보듯이 1987년의 저 실황이 주가 되는 앨범은 아니다. 언제 녹음했는 지 정확히 나와 있지는 않지만, 대략 2000년대 중반 무렵에 강남구 삼성동의 재즈 클럽인 재즈파크에서 녹음한 실황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문제의 1987년 실황은 첫 번째 CD의 마지막에 실려 있다.
일단 들어보니 원곡은 이 앨범에서도 첫 번째 CD의 처음과 두 번째 CD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류복성의 히트 넘버 중 하나인 '수사반장' 테마였다. 1980년대에 태어나고 자란 터라 나도 MBC에서 히트를 친 저 드라마의 테마 음악은 꽤 낯익었는데, 아마 그 인기 때문인지 이 테마를 가지고 김동성이 재즈 밴드와 관현악을 위해 확대 편곡한 것으로 보였다.
다만 원래 곡 자체가 클래시컬한 면이 거의 없다 보니, 주로 전면에 나서는 것은 관현악이 아닌 밴드다. 관현악은 일단 인트로와 이후 나오는 수사반장 테마의 코러스, 솔로 사이의 브리지(이행부) 정도고, 나머지는 밴드 멤버들의 솔로가 채우고 있다. 물론 클라이맥스는 후반부에 나오는 류복성의 솔로인데, 봉고와 콩가, 팀발레스, 쿠이카, 카우벨, 탬버린 등 다양한 타악기를 이용해 현란한 연주로 분위기를 한껏 띄우고 있다.
이렇게 재즈 관점에서는 매우 흥미로운 연주인데, 다만 당시 청중들이 재즈 쪽에는 아직 경험이나 지식이 없었는지 각 주자들의 솔로가 끝날 때마다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나마 류복성이 쿠이카로 특유의 동물 울음소리를 내자 웃음이 터져나오면서 박수가 나오는 정도? 물론 청중들의 서먹한 반응은 부차적인 것이고, 지금은 완전히 원로급이 된 한국 재즈 아티스트들이 중견 시절 선보인 라이브를 들을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충분한 레어템의 가치를 한다고 본다.
그러고 나서 나머지 수록곡을 들어봤는데, 이것도 꽤 쏠쏠한 재미를 주는 녹음이었다. 강남 쪽 재즈클럽은 동네가 동네다 보니 가격도 꽤 세고 분위기도 뭔가 고급스러워서 거의 가보질 못하고 있는데, 물론 그 만한 수준의 음향과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지 이런 라이브 앨범도 나올 수 있는 것 같다. 수록곡은 일단 류복성이 라틴 재즈 계통 음악을 주로 하고 있어서 자작곡 외에는 대부분 라틴 재즈가 차지하고 있다.
류복성을 보좌한 밴드는 재즈파크 전속 밴드인데, 완편된 빅 밴드는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혼 섹션과 리듬 섹션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몇 곡에서 말로가 보컬리스트로 특별 출연하고 있는데, 특히 류복성의 자작곡 Blue Rain에서는 한국 재즈 아티스트라면 누구나 공연 현장에서 겪었을 고충을 담담하게 털어놓는 가사가 인상적이었다.
류복성 자신도 타악 연주 외에 약간 어눌한 듯 하면서도 털털한 느낌의 목소리로 보컬을 맡고 있는데, Mo' Better Blues와 Tequila에 자작의 가사를 붙여서 부른 것을 들어 보면 아마 클럽에서 듣고 있던 사람들 중에 테킬라 한 잔은 추가로 주문했을 듯 하기도 하다. 그리고 상술했듯이 앨범의 처음과 끝은 수사반장 테마가 자리하고 있어서, 확실히 아직까지도 인기가 있는 모양이다.
지금도 류복성은 정기적으로 클럽 무대에 서고 있는데, 내가 꽤 자주 가는 편인 이태원 올댓재즈에서도 1/3주 금요일에 정기적으로 공연하고 있다고 한다. 언제 한 번 보러 갈 예정인데, 보통 라이브에서 맛을 들여 음반을 찾는 것과 달리 음반으로 맛을 들여 라이브를 찾아가게 되는 예가 될 것 같다.
다음에 주절댈 음반은 라이브에서 맛을 들여 찾은 음반이 되겠다. 공연 때마다 거의 개근하고 있는 필윤그룹의 피아니스트는 내가 독일에 가기 전까지는 송준서가 맡고 있었는데, 나중에 귀국하고 나니 생소한 이름의 다른 피아니스트로 바뀌어 있었다. 이명건이라는 연주자였는데, 밴드 멤버 중 가장 어린 축에 속했지만 불붙으면 보여주는 엄청난 힘의 속주나 코드 연주가 인상적이었다.
사이드맨 외에 자신이 리더로 이끄는 피아노 트리오도 있다고 했는데, 올댓재즈에도 정기적으로 출연하고 있고 음반도 한 종류 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그 음반이 클래식 쪽에서 처음 접했다가 한 번 제대로 데인 적이 있는 오디오가이(Audioguy) 제작이라 좀 망설였다. 오디오가이는 요 근래 출범한 한국 음반사들 중 상당한 수준의 기술과 장비로 고급스러운 음색의 음반을 제작하기로 유명한데, 일단 재즈 쪽에서는 평판이 꽤 좋은 것 같았다. 그래서 고민 끝에 저 트리오의 데뷰 앨범을 다른 앨범과 함께 온라인 음반 쇼핑몰인 아이뮤직에서 구입했다.
사실 이 앨범을 구입하기 전에도, 또 이 트리오의 라이브를 보러 가기 전에도 이들의 연주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유튜브에서 Alternative TV라는 인터넷 방송이 제작한 동영상으로 세 곡을, 온스테이지 유튜브 채널에서 또 세 곡을 경청했는데, 이걸로 앨범 수록곡의 2/3을 미리 감상할 수 있었다. 물론 연주할 때마다 음악이 매 번 달라지는 재즈의 특성 상, 이 동영상의 연주들도 앨범의 것과 비교해 듣는 재미가 있었다.
이명건 외에 오재영(베이스)과 김건영(드럼)으로 구성된 이 트리오는 2008년 가을부터 공연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2010년에 오디오가이 주최의 공개 오디션에서 발탁돼 이듬해에 데뷰 앨범을 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수록곡의 대부분은 이명건의 자작곡인데, The Angel Blues와 Outcry 두 곡은 베이시스트 오재영의 곡이고, 앨범의 정중앙에 놓인 달팽이라는 곡은 가요 좀 들어본 사람이면 알 만한 패닉의 히트곡을 재즈로 편곡한 것이다.
아홉 곡 중에 가장 인상적으로 들은 곡을 몇 곡 꼽아보면 뭔가 누아르 영화에 써도 될 법한, 차분함과 긴박함이 묘하게 공존하는 Outcry와 5박 계통의 당김음 리듬이 이어지는 가운데 기분좋은 선율이 이어지는 Good Morning, Snowfalls, 그리고 달팽이의 모던한 재즈 편곡이었다. 물론 그 외에도 해설지에서는 트로트풍이라고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러시안 폴카가 더 연상된 Is This a Real Life?, 앨범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타이틀 곡인 The Best is Yet to Be도 각각 재미있고 기분좋게 들을 수 있는 곡이었다.
이 트리오가 또 언제 후속 앨범을 낼 지는 모르겠지만, 앨범에 수록된 곡만으로도 앞으로 몇 년은 질리지 않고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공연에 가보면 앨범 수록곡 외에도 이런저런 스탠더드도 섞어서 연주하니, 이런 걸 듣는 재미로 갈 수도 있겠지만. 트리오 공연은 매주 화요일에 청담동의 소울투갓에서 열린다고 하는데, 다만 강남 부촌 클럽이라 뭔가 비쌀 것 같아서 돈 없는 강북 촌놈은 덜덜 떨며 갈 엄두를 못내고 있다. lllorz 물론 올댓재즈에서도 한 달에 한 번은 출연하니 다행이지만.
이명건 트리오 앨범과 함께 주문한 다른 앨범은 또 특이하다. 라이브로도 접해본 적 없는 아티스트고, 또 이런 음반이 있구나 하고 안 것도 저 앨범을 주문하면서 배송료 안내려고 다른 것과 같이 주문하기 위해 이것저것 검색하면서였으니까.
1940년대에 비밥의 대명사로 불리던 알토색소포니스트 찰리 파커는 평소 보여준 괴팍하고 변화무쌍한 연주가 아닌, 발라드 위주로 구성된 앨범을 내놓아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바로 현악 합주를 동반해 제작한 'Charlie Parker with Strings' 라는 앨범이었는데, 비록 비평가들이 파커가 변절했네 돈밝히네 하면서 까기는 했지만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파커는 의외로 클래식에도 관심이 많았고, 그 때문에 현악 합주를 동원한 세션을 매우 반겼다.
파커 자신은 만족스러웠을 지 몰라도 편곡이 영 좋지 않아서 지금도 음악적으로는 저평가되고 있지만, 파커 이후로 상당히 많은 재즈 아티스트들이 이 구상을 그대로 혹은 응용해서 앨범을 내고 있다. 내가 아는 경우만 해도 디지 길레스피, 쳇 베이커, 클리퍼드 브라운, 벤 웹스터, 해리 카니, 스탄 게츠, 캐논볼 애덜리, 폴 데스먼드, 웨스 몽고메리, 빌 에반스, 아트 페퍼 등 재즈 계에서 아직도 회자되는 거물들이 이런 앨범을 만들었다.
물론 기악 연주자들 외에 빌리 홀리데이와 엘라 피츠제럴드, 사라 본, 헬렌 메릴 등 유명 보컬리스트들도 마찬가지로 현악 합주를 곁들인 편성으로 여러 녹음을 남긴 바 있었는데, 다만 이런 아이디어가 한국 재즈 앨범에서 선보여진 것은 정말 최근의 일이었다. 2011년에 한국 재즈 트럼페터 중 1세대로 손꼽히는 최선배가 A Trumpet in the Night Sky라는 앨범을 내놓은 것이 첫 결과물이었고, 이번에 구입한 재즈 보컬리스트 박성연의 따끈따끈한 신보 'Park Sung Yeon with Strings' 가 두 번째다.
박성연도 찾아 보니 1969년에 데뷰한, 현재 생존 중인 한국 여성 재즈 보컬리스트로는 거의 최선임 급의 아티스트였다. 1978년부터 야누스라는 이름의 재즈클럽을 운영하며 공연을 계속 하고 있는데, 다만 클럽의 경우 한국 재즈라는 장르의 시장성이 매우 협소한 관계로 수많은 경영난에 시달리다가 지금은 교대역 인근으로 옮겨서 명맥을 잇고 있다고 한다.
이미 환갑을 넘기고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의 아티스트지만, 지금까지 낸 앨범은 이 신보를 포함해 겨우 세 장에 불과하다. 물론 아직 재즈라는 장르가 극소수의 매니아를 제외하면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1970년대에 데뷰 앨범을 낼 만한 여건이 안된 것도 사실이고, 그나마 좀 대중화되기 시작한 1980년대도 한 아티스트나 그룹이 앨범을 내려면 상당한 예산과 용기를 필요료 하던 때였다.
속지는 앨범의 음악 자체에 대한 이야기 보다는 이 앨범을 2006년부터 준비했다는 프로듀서 하종욱이 제작 과정의 험난함을 술회한 내용이 주가 되고 있다. 하긴, 냉정하게 따져 보면 나이가 들면서 가장 쇠락의 폭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보컬, 그 중에서도 그 폭이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큰 여성 보컬이 그 나이에 앨범을 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부담일 텐데. 거기다가 현악 합주를 위한 편곡과 섭외 비용도 꽤 들었을 것 같고, 또 미리 녹음해 둔 리듬 섹션과 현악 합주의 녹음에 보컬 파트를 더빙하는 데 든 추가 예산과 작업 시간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2010~11년 동안 녹음되고, 믹싱과 마스터링은 올해가 되어서야 마무리된 앨범이 오디오가이에서 출반되었다. 총 열세 곡을 담고 있는데, 박성연의 자작곡인 물안개를 제외하면 모든 곡이 기존의 스탠더드 혹은 그에 준하는 곡들이다. 리듬 섹션은 송영주(피아노), 옥진우(기타), 최은창(베이스), 오종대(드럼)가, 현악 합주는 민간 악단인 인씨엠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맡았다. 그리고 빅 밴드와 마찬가지로 이런 종류의 앨범에서 매우 중요한 편곡과 지휘는 재즈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인 최희정이 담당했다.
생판 처음 들어보는 아티스트의 노래였고, 또 전성기를 한참 지난 보컬의 노래였으니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하고 들어봤다. 물론 기교나 발성, 발음 면에서 아쉬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는데, 대신 스캣 같은 기교가 요구되는 가창법을 배제하고 발라드 위주로 차분하게 가는 방향을 택해 음악적인 약점을 최대한으로 줄이려고 한 것 같다. 그래서 앨범 전체의 분위기는 상당히 차분하고 또 진지하게 다듬어진 느낌이다.
물론 '1980~90년대에 이런 아이디어로 녹음했다면...' 이라는 아쉬움이 끈덕지게 남지만, 한국에서 두 번째로 시도된 'with Strings' 음반이고 사람에 따라서는 음악 이상의 무언가를 느낄 수도 있을 만큼 연륜이 느껴지는 노래라서 분명한 가치는 갖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 음반이 길잡이가 된 최선배의 앨범도 구입하려고 하는데, 이것도 류복성의 앨범처럼 나온 지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닌데도 상당히 많은 인터넷 쇼핑몰에서 재고가 없거나 절판이라고 처리되고 있어서 좀 서두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이것 외에도 엄밀히 따져보면 비정규반이기는 하지만, 아르떼TV에서 제작하고 있는 재즈 DVD 중에서 두 종류를 시험 삼아 질러볼 예정이다. 사실 해당 영상은 홈페이지에서 유료 결제하면 24시간 한정으로 볼 수 있지만, 아무래도 그러자니 감질나서 그냥 DVD가 있어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이 달 중순에 돈이 제대로 들어와야 하겠지만...